책 그리고 혼자 영화 <파과>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가야 할 때"
-소설 <파과>
여러분의 빛나는 시절은 언제 셨나요?
빛나본 적 없이 늙어가는 것 같아 혹시 억울하신가요?
나이 들어가는 모든 여자들을 위한 파과.
60대 여자 주인공의 서사
직업은 킬러 그리고 이혜영.
책을 읽고 보면 더 좋아요.
늙어가면서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실들을
기꺼이 수용할 수 있다면
남은 날들은 어쩌면
살아오면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늙음에 대한 상실을 거부하고
그 두려움에 매몰되어 버린다거나
시들어감에 대해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
파과가 그렇고 그런 킬러 액션이겠지만
시들어감에 대해 아파봤다면
특별한 스토리로 다가오리라 믿어요.
파과 뜻
16세 전후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시절'과
"흠집 난 과일" 두 가지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는데
저는 흠집난 과일에 더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생존을 위해 오직 동물적 본능에 의존해
40여 년을 벌레 같은 자들을 방역하는
킬러로 살아온 65세 여자 조각은
이제 서서히 노쇠하는 자신을 마주합니다.
그녀는 방역 업자라는 정체성으로 시들어 사라지기가 두려웠던 걸까요?
버려진 개를 데려다 키우고
자신을 온전한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의사를 통해
서서히 자신 안의 인간애를 찾아갑니다.
소설과 영화 비교 그리고 이혜영
책을 사랑하고
요즘은 문학을 특히 사랑하는 저는
몇 주전 이혜영 님의 표지로 리커버 된 책을 보고
망설임 없이 바로 구입해서 읽고,
오랜만에 혼자 개봉일 조조 파과를 보러 갔습니다.
원작이 있는 영화는
언제나 내면 심리의 표현 때문에
글에 못 미치는 부분이 있는데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한 영화였어요.
책과는 조금은 다른 느낌의 각색도 좋았어요.
문학은 언제나 삶의 희로애락
특히 상실과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까지 가감 없이 담는 예술이고
영화는 대중적인 장르이다 보니 희망과 영웅적인 면을 부각해야 하는 면이 분명히 존재하죠.
<파과> 책과 영화를 비교하자면
책은 오직 생존만을 위해
방역 업자로 동물적 본능에 의해 살아온 65세 여자 조각이
버려진 개와
물러터져 버린 복숭아에서 자신을 마주하며
상실의 씁쓸함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지만
강 선생(연우진)의 존재로 인해
지켜야 할 것들이 생기고
정체성을 스스로 변화해 가며
인간미를 찾아가는 서사가 좋았습니다.
영화는 같은 방역 업자 젊은 킬러 투우(김성철)와의 서사가 책 보다 더 보강된 씬들이
가슴을 아프게 울려서 책에서의 투우가 영화에서는 달리 보였어요.
매우 인상적이었죠.
그리고 조각의 마지막 결말도 책과는 조금 다른 의미가 있는데
저는 그 결말도 좋았어요.
앞으로는 60대가 상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수동적인 나이도 아니니까요.
원작 소설과 영화의 궤가
톱니바퀴같이 맞아 들어간달까요?
책 읽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혜영 님의 액션은 감탄스러웠고
나이 들어가는 여성이 이토록 멋질 수 있을까? 싶고,
어릴 때 보던 그녀도 멋졌는데
50대가 돼서 보는 그녀의 나이 듦은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혼자 영화를 보는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데
60대 여자 주인공의 서사만으로도 값진 파과의
킬러 조각을 이혜영 님의 연기로 볼 수 있다니,
읽으면서도 개봉이 기다려졌는데
기대가 흡족하게 충족되었습니다.
늙어갈 모든 여자들에게
우리도 결국 파과가 되어가겠죠?
물러버려서 더 이상 가치가 없는,
버려야만 하는 복숭아를 보고
무너져내리는 65세 여자 조각을 보며..
점점 파과가 되어가는 저에게도 닥칠 상실들을
미리 떠올려봤습니다.
문학이 좋은 건
인생에 슬픔이 있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이 있고
늙음이 있고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늘 알려주기 때문이죠.
예전엔 허구라도
슬픈 이야기는 보기 싫었고
힘든 사람도 마주하기는 쉽지 않았는데
이제 그게 삶이라는 걸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서인지
그런 것들을 끌어안을 힘이
제게도 느껴질 때 좀 벅차고 뿌듯해요.
생존하기 위해
홀로,
오직,
동물적 본능에 의지하며 살았던 조각이었는데,
타인을 통해
굳어져가는 스스로의 정체성의 틈새로 파고드는
거부할 수 없는 물줄기처럼,
인간애로 서서히 물들어가는
그 고행이 좋았습니다.
나이 듦, 쓸모와 상실, 정체성과 인간애까지
이혜영 님 표지를 보고 읽었는데
저의 진행 차례가 돌아오는 독서모임에
선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깊이도 있었어요.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뜨거운 찬사라는
구병모 작가님의 파과.
주어진 모든 상실을 거부하지 말고
온전히 받아들이고 살 수 있다면
우리에게 남은 날이
또 어떤 것들을 가져다줄지
기대되는 날들 아닐까요?
"우리는 모두 부서지고 사라지는 존재들"
-영화 <파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