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로 이주한 2014년, 나는 마흔 살의 나이에 달리기를 시작했다.
달리기는 신기루 같았다. CF처럼 멋지게 달리는 내 모습을 떠올렸지만, 막상 달리기 시작한지 10분이 지나면 호흡곤란으로 죽을 것만 같았다. 타고난 저질 체력의 이 중년 남자가 달리기를 즐기게 된 계기는 서쪽에서 온 귀인을 만나고서부터다.
달리기 클리닉 이벤트에서 만난 아일랜드인 트레일러닝 강사 '가빈'. 가빈의 프로그램에 참여한 후 깨달았다.
'달리기가 힘든 것이 아니라 내가 힘들게 달렸구나.'
달리기를 시작한 지 6개월 근저족막염으로 발바닥은 물론, 허리, 어깨의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거야 원, 달리기 전보다 몸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내 몸에는 나에게 맞는 속도가 있는데 무리하니 탈이 났던 것이다. 이후로 가빈과 함께 숲을 천천히 달리며 트레일러닝(숲길 달리기)의 기본을 다졌고 달리기의 즐거움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감각의 왕국, 숲
숲은 감각을 자극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계절마다 다른 꽃들의 향기, 침엽수가 뿜어내는 신선한 피톤치드 냄새, 낙엽 냄새, 풀냄새가 풍부한 산소와 함께 폐로 들어온다.
온갖 종류의 새들의 소리를 듣고, 언제나 노루를 만난다. 노루는 나의 인기척에 하얀 궁둥이를 보이며 도망갈 때도 있고, 식사에 열중하고 있는 노루를 발견할 때도 있다. 어린 노루는 도망가지 않고 가까운 거리에서 오히려 나를 구경할 때도 있다. 풀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그 외에도 많은 야생동물을 만났다. 제주족제비, 제주땃쥐, 너구리, 멧돼지(너구리와 멧돼지는 외래종이다.). 중산간 목장의 말들, 때때로 숲길을 점령한 소 떼를 만날 때도 있다.
달릴 때는 바람과 햇살을 피부로 예민하게 느낀다. 온몸의 모공이 열리고 거기서 배어 나온 땀이 감각의 날을 세운다. 아무리 기능이 좋은 러닝 티셔츠도 땀이 배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인적이 드문 숲속에서는 가끔 상의를 탈의하고 달리는데 그 시원한 해방감은 중독성이 있다.
가쁜 호흡과 열린 모공, 시각과 청각, 후각으로 전해져 오는 감각의 정보는 양이 많고 농밀하다는 것. 같은 숲이라도 걷는 것보다 달리기가 좋은 이유다.
숲을 달리는 모험
숲길은 다이나믹 하다. 돌길, 흙길, 자갈길, 눈길 등 다양한 표면을 가진 길은 다시 각도가 다른 경사길, 오르막길, 내리막길 등과의 조합으로 무한하고 변화무쌍한 코스가 된다. 폭신하게 다져진 흙길은 기분 좋게 내달릴 수 있지만, 나무나 풀(가시덤불!)이 무성한 길은 걷기조차 힘들다. 태풍이 지난 후의 숲길은 바람으로 쓰러져 길을 막은 아름드리나무들을 뛰어넘어야 한다. 트레일러닝은 숲길의 상태에 맞는 다양한 방법으로 장애물을 뛰어넘고, 피하고, 달리면서 숲을 탐험하는 모험이기도 하다.
날씨는 트레일러닝의 시련과 축복
눈 덮인 한라산은 아름다운 풍경으로 내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지만 푹푹 빠지는 눈 밭이 금새 지치게도 했다. 녹은 눈에 발이 젖고, 속옷은 땀에 젖었지만 체온이 떨어질까봐 그대로 달렸다. 겨울에 열리는 트레일러닝 대회에 참가했을 때,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할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회가 끝나면 나쁜 기억은 사라지고 겨울 한라산의 아름다움만 기억에 남았다. 눈 덮힌 숲속의 고요함 속을 달리는 것은 트레일러닝의 경험 중에서도 특별하다.
폭우를 맞으며 달리는 숲길 역시 색다른 모험의 장소가 된다. 더운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달릴 때 내리는 비는 뜨거워진 체온을 낮춰줘서 고맙다. 비가 세차게 올수록 더 거침없어진다. 체온이 떨어지는 만큼 속도가 오르고, 물웅덩이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첨벙거리며 가로지른다. 비와 땀, 진흙이 뒤범벅된 몸에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악취가 나지만 짜릿한 재미가 있다. 한여름에는 햇볕이 들어오지 않는 숲길도 달리기가 쉽지 않아서 비만 쏟아지면 달리고 싶어진다.
태풍, 심한 돌풍, 번개가 많이 치는 날은 달리기에 위험하다. 비오는 날의 계곡은 범람할 위험이 있으니 계곡이 있는 코스는 피해야 한다.
내가 트레일러닝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흙으로 다져진 작은 오솔길을 뛰어 내려갈 때다. 자세를 낮추고 양팔을 펼쳐 중심을 잡고 중력의 힘을 이용해 빠르게 내려오면 바람 소리가 들릴 정도로 속도가 빨라진다. 그리고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에 힘차게 뛰는 심장 소리. 처음 숲을 달릴 때, 내리막길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무릎에 무리가 가기 쉽기 때문이다. 달리기로 어느 정도 근육과 내리막 기술이 자리 잡은 다음에는 내리막길은 언제나 트레일러닝의 하이라이트가 됐다.
트레일러닝을 시작하는 사람을 위한 조언
트레일러닝은 즐기는 사람으로서 트레일러닝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몇 가지 주의 사항도 함께 알려주고 싶다.
1. 너무 힘들지 않게 달릴 것.
너무 힘들지 않게 달린다는 것은 옆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정도의 속도로 달리는 것을 말한다. 호흡이 가빠져 대화가 힘들다면? 속도를 줄이면 된다.
운동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빠른 산책으로 생각하는 것도 좋겠다. 풍경으로 들어가 즐기면서 달려 보자.
경사가 급한 길이나 장애물이 많은 길은 속도를 줄이거나 걸어서 이동하자. 끝까지 달리지 않았다고 당신을 손가락질하는 사람은 없다. 기분 좋게 마무리 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를 가볍게 달리자.
2. 물병, 간식, 스마트폰은 꼭 소지할 것.
짧게 달리건 길게 달리건 숲은 변수가 생길 수 있다. 인적이 드문 곳이면 문제가 생겼을 때 도와줄 행인도 만날 수 없으니 더욱 대비해야 한다. 트레일러닝은 도로 달리기보다 땀도 더 많이 흘리고 에너지 소모도 크다. 물과 간식(에너지 젤, 시리얼 바 등)은 조금 남을 정도로 챙기는 것이 안전하다. 컨디션은 반비례 직선이 아니라 던질 공이 떨어지듯 포물선을 그리며 급하게 떨어진다. 물과 간식은 목마르기 전, 배고프기 전에 자주 조금씩 섭취하자. 자신의 몸을 힘들게 만들지 말고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달리자. 그래야 달리는 즐거움을 알게 되고, 좋은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 훈련의 강도를 올리는 것은 그다음이다.
스마트폰은 말을 안 해도 절대 놓지 않겠지만, 숲에서는 꼭 필요하다. 비상 연락용은 물론, 지나온 코스를 트래킹하는 앱을 사용하면 혹시나 길을 잃었을 때 되돌아가기 쉽다.
3. 둘 이상 함께 달리자.
혼자 달리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둘이면 문제가 없을 일들도 혼자서 감당할 때는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도와줄 사람이 없는데 숲에서 다친다면? 깊은 숲은 휴대폰은 통화권 밖일 수도 있다. 작은 부상이 저체온으로 이어지면 암담한 상황이 된다. 사고는 무심한 악조건이 더해져서 생긴다.
부득이 혼자 달려야겠다면 가족과 지인에게 돌아오는 예정 시간을 꼭 말하자. 실시간 위치 정보를 지인과 공유하는 스마트폰 앱을 이용하는 것도 좋다.
4. 숲에 대한 예의,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자.
숲을 통해 즐거움과 건강을 얻으면서 고마움을 쓰레기 투척이나 자연 훼손으로 갚는 사람이 있다. 그러지 말자.
자연의 것은 어떤 것도 가져오지 말며, 옮기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에는 작은 쓰레기라도 3개만 줍자. 눈에 띄는 데로 주우려면 그것도 부담스럽다. 3개 정도는 주머니에 찔러 넣으면 그만이다.
트레일러닝을 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숲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이 생길 수 있다. 좁은 길에서 걷는 사람들을 만난다면 걸어서 추월하도록 하고, 비켜주는 분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자.
한번은 숲의 내리막길을 내달려 가다가 같은 방향으로 천천히 산책하는 분을 발견했는데, 내가 달리는 소리를 멧돼지 소리로 오해하고 등산 스틱을 휘둘러맞을 뻔 한 적이 있다.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 작은 종(베어 벨)을 활용하면 멧돼지를 쫓는 것뿐만 아니라 멧돼지로 오해하는 일도 막아 준다. 종이 없다면 멀리서부터 인기척을 내거나 인사를 건네자.
5. 제대로 배우자.
달리기는 의외로 부상이 많은 스포츠고, 트레일러닝은 더 많은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다. 최근 많은 브랜드에서 트레일러닝 교실을 열고 있고, 전문가들의 교육 프로그램도 생겨나고 있다. 유튜브도 좋지만, 몸을 쓰는 스포츠는 정보의 습득뿐 아니라 자세를 교정해 주는 레슨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오프라인 강습을 받기를 권한다.
*이 글은 <GO OUT> 매거진 2019년 9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작가의 유튜브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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