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심심함의 상실과 나 자신으로부터의 도피
이제 ‘심심함’은 게으름과 동의어가 되어 부끄러운 일이 되었고, 내면으로의 침잠이 가능한 ‘고독’은 실패의 낙인으로 간주된다.
우리는 이제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다.
좀 더 정확히는 심심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게 되었다. 지하철, 횡단보도는 물론 심지어 산책길마저도 우리는 ‘이어폰’과 끊임없는 ‘스크롤’로 삶의 빈 공간을 메우고 있다.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 자체를 견디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 심심함의 내면적 틈으로부터 무엇인가 들려오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내면의 소리를 틀어막기 위해 소비하는 콘텐츠는 이제 유희가 아니라 ‘차단’이다. 우리는 타인의 언어와 표정에 귀 기울이는 대신 자기 내면의 침묵을 피하는데 집중한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집중력 상실’이나 ‘콘텐츠의 중독’ 문제가 아니라 ‘진정한 나 다움의 퇴각’,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하이데거는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고지되는 목소리를 “양심의 부름”이라고 했다. 외부로부터 들려오는 어떤 요청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자신을 호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러한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들을 수 있는 상황을 허용하지 않게 되었다. 산책을 하면서 하늘을 보거나 삶을 사색하기보다는 콘텐츠와 재생 목록에 모든 신경을 소비한다. 동영상은 중단 없이 이어지고, 내면으로 침잠하기 위해 필수적인 침묵은 불안한 것이고 없애버려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삶이 펼쳐지는 공간과 진정한 나 다움으로 진입해 들어갈 수 있는 ‘틈새’를 외부 자극들로 뒤덮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희적 즐김이 아니라 진정한 나 다움에 가 닿는 것을 막는 회피이자 삶의 책임으로부터의 도피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우리 시대에서 “심심함이 사라졌다”라고 진단했다. 그것은 단지 정서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능력’의 상실이다. ‘깊은 심심함’은 나태나 게으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스스로에게 의미를 물을 수 있는 필수 조건인 것이다.
또한 깊은 심심함으로써의 시간, 그것 없이는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해석할 수 없다. 그리고 해석 없이는 자신의 삶을 책임지거나 방향을 정하는 용기로서의 ‘선택’이 불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삶은 본래적인 삶이라 할 수 없고 그저 타인이 제공하는 선택지들 위에서 선택이 아닌 ‘반응’하면서 흘러가는 삶이 될 뿐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고유한 주체로서의 ‘나’도, 삶의 진정한 ‘의미’도 없다.
현재의 우리는 스스로를 너무 손쉽게 ‘외부’에 내 맡긴다. 자신의 감정이나 욕망, 선택으로서의 판단까지 대부분을 위탁한다. 추천 알고리즘이 우리의 취향을 찾아 설계해서 제시하고 숏폼과 같은 동영상은 우리 사유의 리듬 그 자체를 붕괴시켜 버린다. 삶의 중요한 결정으로서의 선택조차도 외주화 시켜버린 이 세계에서 우리 모두는 ‘자신의 주인’이 아니게 되었다.
이제 귀는 열려 있으나 우리 내면의 깊숙한 곳으로부터 공명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내면의 소리는 단지 윤리적 요청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토대로부터의 소환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소리로부터 호명되는 것 자체를 차단한다. 우리의 사유는 점점 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즐김만의 유희’라는 이름의 탈사유 상태가 채운다.
이제 ‘심심함’은 게으름과 동의어가 되어 부끄러운 일이 되었고, 내면으로의 침잠이 가능한 ‘고독’은 실패의 낙인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위대한 사상가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우리 삶이 펼쳐지는 열린 공간은 고독(심심함)과 무(無)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한 고독과 무를 견디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스스로와의 만남의 기회를 영원토록 유예한 채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심심해질 수 있어야만 한다.
다시 침묵을 통해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호명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어폰과 콘텐츠 없이 깊은 심심함의 시간을 기꺼이 스스로 견디면서 우리 안에서 들리는 미세한 떨림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심심함의 심연을 딛고 그 웅장한 침묵을 통과해 낸 자만이 자기 스스로의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이를 견뎌내지 못하는 인간은 결국은 자기 스스로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그는 호흡하고 움직이면서도 부재하고, 방황하는 자이면서 스스로 선택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삶을 살게 된다.
이제 심심함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는 이렇게 묻는 일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나는 지금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