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쩔수가없다>와 존엄의 세 갈래 길

[앗싸들의 책수다 #5] 영화<어쩔수가없다>와 『이처럼 사소한 것들』

by 최은녕 라온나비

[앗싸들의책수다 #5] 어쩔수가없다와 존엄의 세 갈래 길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 클레어 키건의『이처럼 사소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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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선생님, 영화 〈어쩔수가없다〉분석이 너무 궁금해요.
저는 그 영화 너무 재미있게 봤거든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잠시 멈췄습니다. 나는 그 영화를 봤고, 마음 한구석이 오래 불편했습니다. 불쾌감이 지나쳐서, 스스로도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곱씹게 됐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재미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작품을 보고 이렇게 다른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이 묘하게 불편했습니다. 왜 우리는 같은 영화를 보고도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르는 걸까요? 그 차이는 어디에서 생기는 걸까요?

그 질문이 머릿속에 오래 남았습니다. 결국 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다시 펼쳤습니다. 두 작품 모두 ‘어쩔 수 없음’의 벼랑 끝에서 인간의 선택을 묻고 있었습니다.

"존엄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쩔 수 없는 상황속에서도 인간은 어떤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1. 경제적 압박이 갉아먹는 존엄

영화는 ‘실직’이라는 현실의 무게가 한 가정을 어떻게 잠식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만수의 아내 미리(손예진)는 딸의 첼로 레슨만 남기고 자신의 테니스와 댄스 레슨을 중단합니다. 남편의 분재잡지를 끊고, 반려견을 친정으로 보내고, 미역국에 들어갈 소고기마저 아낍니다. 이 장면은 경제적 압박이 단순한 금전 문제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자존감과 삶의 질을 서서히 갉아먹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가장인 만수(이병헌)는 이 무게를 온몸으로 감당합니다. 실직자 상담에서 “사랑하는 가족은 나를 온마음으로 지지한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공허하게 들립니다.

그럼 실직은 누구의 책임일까요? 그리고 가족의 지지는 내가 저지른 모든 잘못까지 감싸야 하는 걸까요?


면접을 앞둔 만수에게 아내는 격려하며 말합니다. “최고의 면접이 될 거야, 다 죽여버려.” 농담처럼 던진 그 말은 불길한 예언처럼 남습니다. 만수는 면접에서 떨어진 뒤 담배를 피우며 “어쩔 수가 없다”를 되뇌고, 그 한마디가 절벽 끝으로 내몰린 인간의 내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2. “내 삶은 종이” ― 좁아진 존엄의 정의

만수가 제지공장 반장을 죽이려 옥상에서 화분을 들던 장면이 있습니다. 화분에 준 물이 그의 머리 위로 흘러내리며, 잠시 정신이 맑아지는 듯 보이죠. 하지만 그가 깨달은 건 “저 사람만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경쟁자들도 모두 제거해야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냉혹한 계산. 그때부터 그는 머리를 쓰기 시작합니다. 가짜 구인 광고를 내고, 이력서를 모아 자신보다 우위에 있을 법한 면접자들을 선별합니다.


첫 번째 대상은 제지기술자 범모(이성민)입니다. 그는 전형적인 실직자의 삶을 보여줍니다. 불 꺼진 방에서 술을 마시며 하루를 보내고, 아내의 구박과 “다른 일이라도 해보라”는 권유에도 “난 종이밥 먹은 지가 25년이야. 난 이렇게 살게 돼있어. 어쩔수가 없어.”라고 말하며 끝까지 특수용지 기술자의 길을 고집합니다. 이 말은 단순한 집착이 아닙니다. 평생을 걸어온 기술, 쌓아온 경력, 인정받았던 순간들이 응축된 정체성의 선언입니다.

실제로 범모의 아내(염혜란)는 그에게 다른 길을 제안하죠. "당신 음악 좋아하니까, 음향기기 갖다놓고 당신이 좋아하는 음악 들으면서 카페 운영하는 건 어때?"라고. 하지만 범모는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음악은 취미일 뿐, "한평생 종이밥"을 먹고 산 사람에게 음악으로 돈을 버는 건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었습니다.


만수는 그를 살해하려하지만, 우연히 범모의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을 목격하고 잠시 망설입니다. 하지만 결국 만수는 살인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범모의 아내에게 발각되고, 세 사람 사이의 격렬한 몸싸움 끝에 총이 발사되고 범모는 쓰러집니다.

그녀가 울부짖는 장면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오랜 좌절과 무력감이 뒤섞인 절규로 들립니다. “정말 총 두 번 맞았다고 죽나요?” 그것이 의도든, 우연이든, 그 장면은 한 가정의 몰락이자 사회의 균열을 상징합니다.



왜 다른 길을 보지 못했나

주인공 만수는 식물을 잘 키웠습니다. 그는 집 한쪽에 온실을 만들고, 나무를 심고 가꾸는 등 식물을 정성스럽게 돌봅니다. 제지관련 일 말고 조경 일이나 원예 관련 일을 찾을 수도 있었습니다.

만수의 또 다른 정체성인 범모는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좋은 오디오로 음악을 듣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가능성들은 그들에게 '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우리 사회에서 "특수용지 기술자"는 전문직이고, "원예"나 "카페 운영"은 그저 취미나 퇴직 후의 소일거리로 여겨지기 때문은 아닐까요? 대학을 나오고 기술을 쌓은 사람이 "화초나 만지고 커피나 내리는" 일로 전락하는 건, 본인도, 가족도, 사회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종이 기술자'로만 정의합니다. 식물을 키우는 사람,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남편으로서의 다른 정체성들은 모두 지워버렸습니다. 존엄을 "직업"이라는 좁은 틀에 가둔 순간, 그 직업을 잃으면 존재 자체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3. 자격지심이 드러내는 인간의 밑바닥

화려한 댄스 파티 장면은 인간의 불안과 자격지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살인 때문에 약속시간에 늦은 만수, 화가 난 아내는 다른 남자(유연석)와 춤을 춥니다. 가뜩이나 다른 집의 불륜장면을 목격한 만수는 그 모습을 보고 화가 치밉니다. 집으로 돌아온 만수는 아내를 의심하며, 그녀의 팬티냄새까지 맡습니다. 정말 사람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화를 내고, 서로 오해와 불신으로 가득찹니다.


"포카혼타스와 해군장교, 우리가 커플이었다고" 이 말을 듣고 현타를 느낀 만수의 표정이 아주 인상깊었습니다. 사람의 자격지심이 쌓이면 이렇게 까지 망가지는 구나 싶어 씁쓸했습니다. 그의 의심은 '존엄'의 마지막 끈마저 끊어버립니다. 이 장면은 ‘가장 가까운 관계 속에서도 존엄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4. 가족애라는 이름의 도덕적 타협

만수의 아들이 엄마를 돕겠다며 휴대폰 매장에서 폰을 훔칩니다. 아버지 만수는 아들에게 거짓말을 강요하고, 어머니 미리는 아들의 실형을 막기 위해 다른 남자와 하룻밤을 보냅니다. 그녀의 행동은 가족 사랑처럼 보이지만, 결국 가장 쉬운 타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만수의 살인을 알고도 모르는 척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토막 살인을 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그날 이후 담배를 피우며 트라우마에 시달립니다. 아버지의 토막 살인을 엄마에게 말하지만, 끝내 엄마는 아들에게 그건 사람이 아니라 돼지였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결국 만수는 경쟁자들을 모두 죽이고 취업에 성공해 제지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며 환호성을 지르는 장면에서는 불쾌하다못해 역겨웠습니다. 그리고 그의 환호성이 구원의 노래가 아니라 파멸의 비명으로 들렸습니다.




5. 뿌리부터 썩어버린 이

영화 내내 만수는 치통에 시달립니다. 마지막 살인을 저지르는 순간, 그는 자신을 괴롭히던 이를 직접 뽑아 버리고, 더 이상 통증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 장면은 단순한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인간성의 마지막 감각이 사라지는 순간처럼 보입니다.


영화의 끝에서 딸이 나무를 바라보며 말합니다. “벌레가 들끓어서 뿌리부터 썩어버렸어.” 그 한마디는 곧 만수의 치아를, 그리고 그의 내면을 비추는 메타포처럼 들립니다.


처음부터 이 이야기가 불편했던 이유는 명확합니다. 취업이 안 됐다고 경쟁자를 죽이는 발상 자체가 비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실직이 아니라 실직 이후의 태도입니다.


“실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네가 실직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그게 문제라고.”
이 대사가 이 영화의 핵심을 꿰뚫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실직을 경험하지만, 모두가 살인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만수의 선택은 환경 탓이 아니라, 애초부터 부패한 내면의 드러남이었습니다. 실직은 그 부패를 드러낸 계기였을 뿐,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치아가 빠진 자리는 곧 인간성의 자리가 비워진 자리입니다. 육체의 통증은 멎었지만, 통증을 느낄 인간적인 감각마저도 함께 사라진 것이죠.


영화는 마지막에 딸의 첼로 연주로 끝나지만, 그 선율은 구원의 음악이 아니라, 이미 썩어버린 뿌리 위에서 울리는 조용한 경고음처럼 들립니다. 겉으론 가정을 지켜낸 듯 보이지만, 그 뿌리 아래는 이미 무너져 있었던 거죠.




6. 대조되는 선택 ―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빌 펄롱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속 빌 펄롱도 다섯명의 딸을 키우는 가장으로서 삶의 무게를 감당합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만수와 다른 방식으로 존엄성을 탐색합니다.


펄롱은 과거의 상처와 마을의 암묵적인 침묵 속에서 '어쩔 수 없음'을 체감합니다. 하지만 그는 만수처럼 극단적인 폭력으로 상황을 타개하려 하지 않습니다.


만약 펄롱이 석탄 사업을 잃었다면? 그도 만수처럼 극단적 선택을 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펄롱의 존엄은 직업이 아닌 내면에 뿌리내려 있습니다. 그의 '돌봄의 감각'과 '청결=존엄'이라는 키워드는 그가 개인적인 안위보다는 한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인간다움을 지키려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어린 시절 받은 돌봄의 기억, 딸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양심을 지키려는 인간으로서 그의 존엄은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펄롱은 막달렌 세탁소의 소녀를 돕는 결정을 내립니다. 당장 가족에게 닥쳐올 어려움을 알면서도 '인간적인 도리'와 '따뜻한 돌봄'을 택하는 윤리적 실천입니다.


펄롱은 선의의 씨앗을 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펄롱이 석탄 사업을 잃었다면, 그는 다른 길을 찾았을 것입니다. "내 삶은 석탄"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의 직업으로만 정의하지 않았습니다. 다섯 딸의 아버지, 한때 돌봄을 받았던 사람, 양심을 지키려는 인간... 그의 정체성은 다층적이었습니다. 직업은 존엄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7. "당신이 죽어야 내가 살아" - 정말 그런가?

면접 경쟁자를 죽이면서 만수가 내뱉는 말. "당신이 죽어야 내가 살아." 이 말이 절규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요? 만수가 재취업한 공장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그곳은 인간 노동자 없이 로봇으로 자동화된 공간입니다.


'노동자를 자르는 건 도끼로 목을 날리는 것과 같다'던 만수의 말처럼, 시대의 흐름은 모든 인간을 '어쩔 수 없음'의 벼랑 끝으로 몰고 갑니다. 결국 경쟁자를 모두 죽여도, 시스템은 변하지 않습니다.




마무리 : 존엄의 갈림길

이 영화가 불쾌한 이유는 만수의 선택이 완전히 낯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극한의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내 속의 이기심이 들켜서 찝찝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실직이라는 보편적인 두려움을 극단적인 설정으로 밀어붙이며, 가족애, 생존, 자격지심, 도덕성의 붕괴가 뒤엉켜 인간의 가장 추악한 본능을 드러냅니다.


결국 두 작품은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사회 시스템이 개인을 어디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지에 대한 가혹한 경고이자, 극단으로 치닫는 인간의 추악한 본능을 직시하게 합니다.


책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비록 크지 않아 보여도 옳은 선택을 위해 고뇌하고 행동하는 한 인간의 섬세한 내면을 통해, 감각이 무뎌진 세상에서 '돌봄'과 '선한 의지'가 가진 가치를 깨닫게 합니다.


과연 '어쩔 수 없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그 속에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잃어버리는가? '나의 존엄은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만수는 "당신이 죽어야 내가 산다"를 선택했고, 펄롱은 "내가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이 아이를 구해야 해"를 선택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였지만, 선택은 달랐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서 왔을까요?


만수와 범모는 "한평생 종이밥을 먹고 살았다"며 다른 가능성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직업을 잃었다는 게 아닙니다. 그 상실 앞에서 살인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펄롱의 존엄은 "석탄 배달업자"라는 직함이 아니라 "인간 빌 펄롱"이라는 존재 자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어려움 앞에서 폭력이 아니라 돌봄을 선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는 그 결과와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그 무게를 견디는 것이 인간입니다.




당신에게 묻습니다

만약 지금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잃는다면? 당신은 어떤 길을 걸을 건가요?


"내 삶은 ___" 이 빈칸에 무엇을 넣으시겠어요? 그리고 그것을 잃으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건가요?


당신의 내면에는 어떤 씨앗이 심어져 있나요?






댓글로 함께 나눠요


당신은 ‘어쩔 수 없음’의 상황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 같나요? 만수의 길인가요, 펄롱의 길인가요?




다음 편 예고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대성당』 ―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선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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