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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ph Mar 01. 2022

웹 3.0의 첫인상

가브리엘 르네 / 댄 메이프스의 '공간 웹 (2019)'을 읽고


흡사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을 연상케 하는 웹3.0 메니페스토. PC에서의 읽기 전용 웹사이트로 대변되는 웹1.0,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의 웹2.0에 이은 웹3.0을 ‘공간웹'으로 명명했다. 웹의 역사를 조망하는 초반 몇 챕터, 그리고 공간웹의 구성과 이점 등으로 구성된 책이다. 


그런데 공간웹이 뭐냐고 물어보면 책을 완독한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당연하다. 그건 책을 쓴 저자들도 마찬가지다 �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기에… 편의상 요즘 유행하는 메타버스, NFT, 블록체인, 몇년 전까지 유행했다가 죽지도 않고 돌아온 IoT 등을 전부 때려 넣은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비지니스 기회를 창출해보려는 동기를 가진 사람들에겐 구미가 당길 책이나 대부분의 사람은 아닐 것이다. 웹2.0이 만든 생태계에 어느순간 익숙해진 것처럼 어차피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소시민은 만들어진 환경에 순응하고 따라갈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 대부분의 '나머지'가 이런 책에서 얻어갈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테크놀로지의 금빛 미래를 예견하는 저자와 같은 테크노필(technophile)들이 그리고 있는 청사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내가 생각하는 '더 좋은' 미래와 어느정도 일치하는지 가늠해보는 것이다.


도구를 사용한 시점부터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신체의 변화가 멈춘 인류에게 기술의 진보는 인류의 진보와 동의어가 되었다. 이제 그들에게 공간웹이란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은, 지각과 감각의 확장이다. 공간웹과 함께 만들어질 그 미래에 대한 저자들의 낙관적 전망은 책을 뚫고 나올 정도로 시종일관 노골적이다. 큰 맥락에서 보면 신체의 강화를 통해 죽음을 안락사 시키고 우주로 활동범위를 확장하겠다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이상과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며 늘 가지고 있던 질문을 다시 떠올린다. 외부환경을 더 효과적으로 컨트롤 하기 위해, 더 많은 연결과, 더 많은 경험과, 더 높은 효율을 위해 AI와 같은 외부존재에게 대부분의 결정을 아웃소싱해야 시대가 온다면 인간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 될까. 우리는 정말 지금보다 더 많은 연결, 더 높은 효율과 편의가 필요한가? 그게 정말 우리의 삶에 더 많은 만족을 줄까? 


저자 또한 책에서 강조하듯 공간웹이 인류 진화의 역사 자체를 바꿀 수 있는 대분기점이라면 이건 정말 중요한 질문이다. 그 변화를 만들어갈 사람들이 인류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너무나 극극극 소수의 불과한 그룹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지난 10년간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시용하며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며 관계를 맺는 방식이 얼마나 극적으로 바뀔 수 있는지 목격했기 때문이다.  전지구단위의 연결로 인해 이 소수들이 얻게 된 영향력은 몇몇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스케일을 아득히 넘어버렸단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린 최소한 그들에게 책임감과 나름의 도덕성을 기대하는 수 밖에 없는데 나는 일론 머스크와 같은 거대 테크기업의 비저너리들의 동기가 오로지 탐욕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태생부터 Geek이고 Nerd인 그들 속엔 개인으로서의 모험심이나 나름의 소명의식 같은 것이 뒤섞여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더 나은 (better) 미래'의 정의가 너무나 대동소이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공간웹의 복음을 설파하는 이 책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데이터, 수량화, 편리, 연결의 무한확장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 미래. 그렇게 만들어진 필요가 또 다른 필요를 잉태하고 선택 가능한 유일한 미래처럼 소비자들에게 주어진다. 예를들어 딥마인드 CEO 하사비스에게 '더 나은' 미래는 알약으로 모든 음식을 대체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미래를 원하지 않는다. 에릭 슈미트의 '새로운 디지털 세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더 나은 (better)'이지만 나는 그 책을 읽으며 그가 만든 미래에 일부가 되고 싶단 느낌을 거의 받지 못했다. 아무리 좋고 선한 의도라고해도 단 하나의 'better'만 존재하는 세상이라면 그곳이 바로 디스토피아가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아이러니는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디스토피아의 예언자인 마가릿 애트우드를 인용했다는 점일지도 모르겠다. 


올해엔 디지털 인문학 관련 책들을 많이 읽고 리뷰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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