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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ph Jul 11. 2022

타조 사파리


학부 졸업 후 어느 여름 방학, 잠깐 귀국해 국내 광고회사에서 여름 인턴십을 하던 때의 이야기. 인턴들에게 주어진 첫 과제는 자기소개 UCC 영상을 찍어오는 것이었다. 공모전에 도가 튼 광고쟁이 동기들 사이에서 최소 평타는 쳐야 할 텐데, 머리를 쥐어짜다가 ‘타다’라는 단어를 키워드로 영상을 만들기로 했다. 리듬을 ‘타기’ 위해 드럼을 치고, 혼자 서울랜드를 가서 청룡열차도 ‘탔고’ (롯데월드를 먼저 갔는데 커플들 사이에서 자괴감을 느끼고 다음 날 서울랜드 개장하자마자 1등으로 들어가 후다닥 찍고 나왔다.), 커피도 탔던 것 같고.. 지금이라면 썸도 탔을 텐데 ^^ 내 기억에 당시엔 그런 표현이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아이디어가 고갈되어 애만 탔다. 뭐 재밌는 거 없을까, 하다가 찾은 게 경기도 화성의 타조 사파리였다. 옳다구나. 타조를 타보자!


무척 더운 날이었다. 대중교통이 여의치 않아 택시를 타고 갔던 걸로 기억하는데, 촬영할 사람이 필요해 지금은 연락이 두절된 초등학교 동창이 동행해줬다. 손님은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해 비용을 지불하면 크기도 작고 다소 조악해 보이는 서킷 같은 곳으로 이동한다. 타조들이 나 같은 사람들을 등에 엎고 뛰어야 하는 서킷이다. 가까이서 본 타조는 실로 경이로운 생명체였다. 거대했고, 뭣보다 날개를 모두 펼쳤을 때 윙스팬이 어마어마했다. 사육사로 보이는 사람들이 위험하지 않다며 기본적으로 숙지해야 하는 사항을 말해주며 나를 안심시킨다. 지금 생각하니 별다른 안전장치도 없었던 것 같은데, 여하튼 타조 위에 올라가 날갯죽지를 두 손으로 잡고 균형을 잡으면 타조가 달리기 시작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걸었는데 나 같은 초보는 균형을 잘 잡지 못하고 사파리짬이 찬 타조는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아, 이 놈은 탈 줄 모르는 놈이군.. 타조 등근육의 촉감이 지금도 기억나다. 살아있는 생명체와 닿아 있다는 이상하게 징그러운, 그렇다고 싫진 않았던 촉감. 두 바퀴 정도 서킷을 돌고 나면 프로그램은 끝이 난다. 잠깐 동안 나를 위해 등을 내어준 그 낯선 생명체를 난 몇 번인가 돌아봤다.


안타깝게도 복구가 불가능해진 나의 미니홈피 어딘가에 그날의 내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다. 타조를 달리게 하는 데 실패해서 원하던 그림이 나오진 않았지만 제법 유쾌한 모습. 하지만 사진이 담지 못한, 이 날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알고 보니 사파리엔 타조 고기를 파는 식당이 있었던 것이다. 들어갈 땐 안보였다. 타조 체험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만 보인다. 물론 나도 타조 고기가 식용으로 팔린다는 건 알고 있었다. 런던 보로 마켓에서 본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방금 타조와 교감을 느끼고 온 사람에게 이 무슨 해괴한 고객 경험이란 말인가. 고약한 농담이라기엔 방금 전의 촉감과 체온이 너무 선명해서 난 혹시 이게 충격요법을 동원한 고차원적 동물보호 메시지 같은 건 아닐까 생각했다. 요즘 재밌게 보고 있는 드라마 속 주인공이 아쿠아리움이 얼마나 고래에게 잔혹한 환경인지 열변을 토하는 걸 보며 왜인지 떠올랐던 12년 전 그날. 아쿠아리움, 동물원, 사파리라는 공간에 대해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아도 괜찮은 세상에서 여태 살아왔다. 이제 ‘이웃’의 개념이 인간을 넘어 동물로, 자연으로 확장되어간다. 더불어 산다는 것의 참 의미는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덧, 글과는 무관하지만 UCC 영상이라는 낡은 단어가 글에 등장했기에 사족을 달자면, User Created Contents 라는 표현이 지금 생각하면 재밌다. 지금이야 유져들이 폰으로 찍고 편집해 올리는 콘텐츠가 너무 많다 보니 저런 단어를 쓰는 것 자체가 새삼스러워진 것인데 그땐 콘텐츠의 주체가 방송사나 스튜디오 같은 전문 인력이었기 때문에.. 단어에서 그런 파라다임의 변화를 새삼 느낄 수 있어 재밌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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