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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첫날,
더 나은 나를 위하여

베토벤은 어디까지 갔을까 (2)

6월 첫날,

더 나은 나를 위하여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을 처음 들었다. 

어려운 음악이었다.

'이렇게 까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에게 익숙했던, 아름다운 선율의 베토벤은 어디에도 없었다.

친절한 조화도, 화려함도, 웅장람도 아닌, 무언가 어그러지고 일그러진 풍경이었다.

현대음악에 가까워 보였다. 다시 한번, 오래 전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정말 이 사람은, 어디까지 간 걸까?


나에게, 조각가 로뎅의 역작은 '생각하는 사람'도 '지옥의 문'도 아니었다.

로댕을 조각사에서 지울 수 없게 만든 것은 '발자크상'이었다.

로뎅은 자신의 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구상조각의 정상을 30대에 '청동시대'로 정복했다.

사람의 몸을 뜬것이 아니냐는 '착각'을 낳을 정도의 완벽한 인체표현은,

미켈란젤로가 도달했던 '이상화된 인체상'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인간의 몸'을 빚어낸 것이다.

로뎅은 자신의 작품 제목처럼 '신의 손'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로뎅, 청동시대 L'Âge d'airain 


로댕은 '발자크상'으로 조각사를 조각했다. 

지울 수 없는 '이정표'를 새겨버린 것이다.

아무것도 표현되지 않은 육중한 덩어리, 대문호의 눈자리를 후벼 파네 그늘이 만든 표정. 

그렇게, 말년의 로뎅은,

자신의 시대까지 이룩된 조각의 유산들을 단숨에 묶어버리고,

조각상 '발자크'를 통해, 새로운 조각과 새로운 '추상'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떠났다.

커피를 60잔씩 마시며 밤을 지새운 대문호 발자크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대신,

육중한 코트에 둘러싸인 기울어진 하나의 덩어리로 빚어버렸다. 

무거웠을 작가의 수많은 밤들을, 이 무거운 덩어리로, 있는 그대로 '재시'해 버린 것이다.

표현하지 않음으로 해서 표현되는, '재현'의 '의무'가 사라진, 근현대미술의 서광은,

로뎅의 황혼, 발자크의 그림자 속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로뎅, 발자크상



진리는 하나인데 현자들은 여러 가지 언어로 말한다고 한 것처럼,

음악도, 미술도, 늘 대가들의 길은 한결같다.

만들고 또 만들고, 그리고 부순다. 그리고 끊임없이 걷고 또 걷는다.

로뎅의 발자크를 통한 응어리진 새로운 차원에 대한 갈구로 빚어진 일그러진 덩어리들을,

베토벤의 현악 4중주를 들으며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음악도 일그러져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꼭 그래야만 해?(Muss es sein?)'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한 메모가 현악 4중주 16번에 적혀있다.

이 메모를 볼 때마다, 또 다른 "꼭 그랬어야 했는가?"라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유시민 - “그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뭐 대연정부터 시작해서 선거제도개혁, 안되니까요, 안될 일 말씀하시지 말고, 국민들이 원하는 거 좋아할 만한 거, 뭐 때문에 역사에 그렇게 전적인 책임을 지시려 하십니까? “ (https://www.youtube.com/watch?v=Rm5u1QZIwGM  35:41)


강원국 “여론에 영합하라고 하신 거군요”


유시민 -“그렇지, 너무 안타까우니까. 너무 잘하려다가,  공격받고 외면당하시는 게 나는 속이 상해서. 

왜 그런, 옳은 일이신데, 필요한 일이고 옳은 일인데, 안 되잖냐고. 안 되는데 상처만 입으시니까, 그런 거 하지 마시고 인제 국민들이 좋아할 것만 해주시라고”

  

‘꼭 그렇게 까지 했어야만 했을까…’ 꼭 그렇게 까지 해야만 했던 것이다. 넓은 의미로 말하면 ‘신념’의 문제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성향’의 문제일 수도 있으며, ‘운명’적으로 말한다면, 가야 할 곳을 ‘보아버린’것이다. 다가올지 오지 않을지 모를 ‘미래’, 또는 가야 할 ‘길’을 말이다. https://brunch.co.kr/@thegreatdays/82 



대가들이 대가로 남는 것은,

'경지'를 보아버린,  그 '빛'을 보아버린 원죄로 인해,

나아가고 또 나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어버린 탓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도, 좋은 것을 볼 때마다, 노력해서 무언가 성취감을 느낄 때마다,

알고 싶고, 나아지고 싶고, 감동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모두 휩싸이곤 한다. 

그러기에, '삶'에서 '예술'과 '자연'이 주는 '감동의 경험은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잠든 나를, 머물러있는 나를, '툭'하고 밀쳐준다. 일어나라고, 꺠어나라고, 나아지라고...


참담한 시대, 

전쟁이 쉬이 터지고, 쉽게 끝나지 않는 시대,

아우슈비츠를 겪은 유대인들이, 다시 가자에서 아우슈비츠를 재현하고 있는 시대.

시대의 수준에 뒤떨어진 지도자들이, 나라를 망가뜨리는 시대.

같이 퇴보하지 말아야겠다.. 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6월 첫날.

더 나은 나를 위하여,

베토벤 현악 4중주를 처음 듣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RFg4YNIKHD0


https://www.youtube.com/watch?v=BOdsRnP4tfc

https://www.youtube.com/watch?v=ZMDlqG7_TSc

https://youtu.be/oyCK3t2ELus?list=OLAK5uy_lYIuQyGcGnsl0TMEvcZ_ahOa7hq06e6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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