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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죽음에 이르는, 완벽을 향한 길

풍요로운 창작의 시대와 예술, 예술작품 그리고 예술가

풍요로운 창작의 시대와 예술, 예술작품 그리고 예술가 

– 죽음에 이르는, 완벽을 향한 길



“예술가는 그 자신의 삶을 내어주고 작품을 남긴다.” 평론가 김갑수 선생의 말이다. 

그랬다. 수많은 화가들, 그리고 음악가들 작곡가들 또 글을 쓰는 작가들, 마치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삶을 태우고 산화되어 그 재는 ‘작품’이 된다. 그 ‘재’가 때로는 ‘인류사’라는 납골당에 안치되어 ‘인생을 짧고 예술을 길다’는 말을 증명하기도 하고, 또 때론 남겨지지도 못하고 바람에 휘날려 사라지기도 한다.


고흐의 흔적이 남아있던 남프랑스 아를과 생 레미드 프로방스를 돌아보며, 또 그가 남긴 편지들을 읽으며, 만약 고흐가 ‘삶’과 ‘예술’을 분리했다면, 그렇게 일찍 떠나지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고흐는 왜 그렇게 까지 해야만 했을까.. 또 다른 수많은 예술가들은 왜 그래야만 했는가?


“관람자가 ‘예술’의 개념 안으로 점점 녹아들면서 예술을 미학이라는 천상의 자리 topos ouranios에 위치시키게 되는 과정과 발맞추어, 예술가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정반대의 과정이 진행되는 양상을 관찰할 수 있다. 무언가를 창작해야 하는 입장의 예술가에게는 예술이 계속해서 더욱 두려운 경험으로 변해가기 때문에 이를 두고 흥미로운 점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어울리지 않는 완곡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예술 작품의 창조가 아니라 창조자의 생生과 사死가 달린 문제인 것처럼, 혹은 적어도 그의 정신건강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조르조 아감벤. 내용 없는 인간,  17페이지)



‘호모 사케르’로 이름을 날린, 현대 정치 철학계의 스타. 조르조 아감벤의 글 한 대목이다. 흥미롭게도 그는 베네치아 건축대학교 디자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미학과 교수이다. ‘풍요로운 창작의 시대와 예술’이라는 제목의 글을 시작하며, 이브 미쇼가 말한 ‘미학의 금휘 환향’을 첫 글에서 언급했는데, 이런 상황을 아감벤의 글에 비추어 보자면, ‘예술가’들을 死地(사지), 즉 죽음에 이르게 하는 시대가 된다.



“아름다운 대상 앞에서 관람자가 맞이하는 경험의 무고함이 증가하는 현상과 대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바로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경험의 위험이 증가하는 현상, 즉 예술이 그에게 선사하는 행복의 약속이 그의 존재를 악으로 물들이고 파괴하는 독약이 되는 현상이다. 예술가의 활동 속에 극단적인 위험이 내재한다는 생각이 널리 확산되기 시작했다. 보들레르가 생각했던 것처럼, 예술이 마치 목숨을 건 혈투라도 된다는 듯이 ‘예술가가 패배하기 일보직전, 두려움에 떨며 울부짖는 곳에서’, 바로 이러한 생각들을 단순한 비유로 보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혹은 문학 창작가들만의 근접할 수 없는 세계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비유로 간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증명해주는 것은 미치기 일보 직전에 휠덜린이 남긴 말이다. “신들이 고대인 탄탈로스에게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숙명을 선사했던 것처럼 나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 기꺼이 나를 아폴로가 나를 격타했다고 말할 수 있다!” “                             (조르조 아감벤. 내용 없는 인간 18페이지)




아감벤은 ‘내용 없는 인간’이라는 책에서, 예술가들이 어떻게 사지로 내몰리게 되는지는 자세하게 분석해놓고, 훌쩍 정치 철학계로 떠나버렸다. 나는  ‘예술가들에 대해선 이 정도 이야기했으면 됐고, 더 시급한 세상 사람들을 구하러 떠났나 보다..’라고 혼자 결론지었다. 그리고 나는 예술의 영역에 남아있으니 만큼, 그의 글을 조금 곱씹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점점 미적으로 변해가고, 대중들의 눈높이도 점점 높아질수록, 예술가들의 생계는 점점 어려워지고 또 경쟁도 치열해진다. 그리고 그러한 ‘시장’의 논리와는 별개로 ‘작가’ 개개인들은 자신이 설정해놓은 ‘목표’와 ‘이상’을 향해 ‘인생’을 건 항해를 하게 된다. 그나마 ‘유명’해 지기라도 한다면, 살아서 빛을 보거나 경제적 윤택을 누려볼 만하겠으나, 모든 예술가들에게 그런 ‘행운’은 주어지지 않는다. 1990년대, 한국화단에서 ‘창작’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작가의 비중은 단 3%였다. 지금 그 비율이 더 높아졌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예술가들이 언제는 부유했던가?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먹고살아야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예술가이건 아니건 ‘생존’의 문제이니만큼 가벼울 수 없다.


이쯤 되면, 처음에 언급했던 ‘예술가들은 자본주의의 선봉장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백남준 선생의 선언이 ‘야속’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떻게든 살길을 있을 것이다. 그 길을 찾기 전에 조금만 더 지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보자. 예술과 삶. 그리고 점점 죽음으로 내몰리는 예술가들에 대한 아감벤의 논고에 어김없이 고흐의 이야기가 나온다.



“또 다른 예로, 반 고흐가 세상을 떠나던 날 그가 호주머니 안에 간직하고 있던 쪽지 속의 문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나만의 일, 그것을 위해 내 삶을 위험에 몰아넣었고. 그것 때문에 내 이성의 절반은 암흑 속에 묻혀버렸다.” 릴케도 클라라 릴케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기록했다. “예술 작품이란 언제나 위험천만한 경험의 산물. 극단적인 단계로, 인간이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는 지점까지 몰고 간 경험의 산물이라고.” (조르조 아감벤. 내용 없는 인간 19페이지)




고흐는 작품이 실패하면, 인생도 실패한다고 생각했다. 예술과 삶을 따로 떼어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부질없는 ‘이상’, 또는 ‘열정’ 때문에 그렇게 삶을 접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감벤이 지적한 예술가들이 사지로 몰아넣어져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은 어쩌면, 절반 정도는 예술가들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자발적인 죽음은 아니었을까? 순간적으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자살’과는 다른 좀 더 ‘느린 자살’은 아니었을까?


뜬금없이도, 창작이 풍요로와진 시대에서, ‘죽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예술가의 삶’을 두고서 얼마 전 보았던 유튜브 방송 [노무현 대통령 서거 11주기 특별 영상] "노무현의 시대가 올까요?"에서의 유시민 이사장의 말 한 대목이 떠올랐다.



“그런 얘기를 많이 했어요, 뭐 대연정부터 시작해서 선거제도개혁, 안되니까요, 안될 일 말씀하시지 말고, 국민들이 원하는 거 좋아할 만한 거, 뭐 때문에 역사에 그렇게 전적인 책임을 지시려 하십니까? “ (https://www.youtube.com/watch?v=Rm5u1QZIwGM  35:41)

여론에 영합하라고 하신 거군요”(강원국 작가)

그렇지, 너무 안타까우니까. 너무 잘하려다가,  공격받고 외면당하시는 게 나는 속이 상해서. 

왜 그런, 옳은 일이신데, 필요한 일이고 옳은 일인데, 안 되잖냐고. 안 되는데 상처만 입으시니까, 그런 거 하지 마시고 인제 국민들이 좋아할 것만 해주시라고”(유시민 이사장)

  

‘꼭 그렇게 까지 했어야만 했을까…’ 꼭 그렇게 까지 해야만 했던 것이다. 넓은 의미로 말하면 ‘신념’의 문제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성향’의 문제일 수도 있으며, ‘운명’적으로 말한다면, 가야 할 곳을 ‘보아버린’것이다. 다가올지 오지 않을지 모를 ‘미래’, 또는 가야 할 ‘길’을 말이다. 


아감벤의 말처럼 사지로 내몰리는 예술가들을 두고, 나는 현대미술의 정당성을 물었었다. 10년에 걸친 논문의 주제였던 ‘현대미술의 역사적 정당성’은 요지와 핵심은 과연 현대 미술가들에게 ‘창작의 정당성’이란 무엇인가? 였다. ‘예술을 사기’라고 말한 백남준 선생의 선언에 영향받았던, 현대 미술, 현대 예술에 대한 나의 불신과 소외감을, ‘예술’을 한답시고 이해되지 않는 ‘작품’을 내어놓는 ‘현대미술가’들에게 그 정당성을 물은 것이다.


그러나, 논문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백남준 선생이 말씀하신 그 사기詐欺가 내가 생각한 사기詐欺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강익중 선생의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되었다. 



“백남준 선생님은 현대미술이 미래의 시제를 현재로 옮긴 것이라 하셨어요. ‘예술은 사기다’라고 하신 거, ‘사기(史記)’를 뜻하신 거예요.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역사를 쓰는 게 예술이란 말씀이시죠.” [네이버 지식백과] 미술가 강익중 - 그림을 통해 관객과 ‘연결’하는 (미술가, 이규현)

(출처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67753&cid=59117&categoryId=59117 ) 



그리고 또 한 문장, “예술은 미래의 사각으로 현재의 역사를 쓰는 게 예술”이라는 이 한 문장은, 왜 예술가들이 불나방처럼 불속에 뛰어들듯 삶을 내던지고 산화되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미래’를 보아버리고 또 ‘미래’를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이상’과 ‘미래’를 가슴에 담고, 작가는 죽어가며 ‘작품’을 남긴다.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하기엔 ‘처연한’. 그래서 ‘예술가’라는 단어에서 난 ‘멋’보다 ‘비장함’을 ‘밝음’보다 ‘어두움’이 먼저 떠오른다. 


                                                                                                                          -나는 파리의 우버 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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