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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위대한 일상'의 시작

풍요로운 창작의 시대와 예술, 예술작품 그리고 예술가

'위대한 일상'의 시작.




작업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었다. 9시 출근 18시 퇴근. 점심시간은 1시간 남짓이라 따로 시간 낼 수 없었고, 저녁엔 돌아와서 저녁을 먹고 치우고 나면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잠깐 책상에 앉았다가 잠들 수 있지만 충분치 않았다. 그리곤 주말뿐인데, 아이와 가족들이 있는 작은 두 칸짜리 방에서 작업하려면 차라리 모두 잠든 밤만이 조용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차에서 그리기 시작했다, 오고 가는 출근길 지하철 그리고 버스. 금방 꺼낼 수 있도록 손에 쥘 수 있는 엽서 크기의 종이. 그러니까 a4용지를 네 번 접어 자른 크기, 대고 그릴 수 있도록 남은 골판지를 엽서 크리고 오려내어 작은 화첩을 만들었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늘 쓰던 bic 검은색 볼펜을 옆에 끼워둘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위대한 일상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무엇을 그려야 할까 고민하다가 무작정 아무것이나 그려보았다. 그냥 그저 그림이 그리고 싶었고, 또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아무것이나 그리는 것이 별 흥미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더 진지하게 이야기하자면, 내가 창작에 재능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작에 재주가 없고나.. 그런데 미술을 하고 싶어서 시작하게 되었고, 또 그림은 곧잘 그리는데.. 창작에 재주가 없다.. 니.. 난 그림을 곧잘 베끼는데, 유명한 화가인 프랭크 스텔라는 구상을 전혀 못한다. 그럼에도 세게 적인 대가가 되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안셀름 키퍼를 보아도 구상력은 없다. 그러나 그의 화폭은 정말 아름답다. 내가 말한 창작력이 없다는 것은 기발한 아이디어나 창조적인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소위 예술적인 타고남이랄까.. 그 언저리쯤 위안이 되는 글을 한 줄 읽게 되었다


"선생님도 시인이 꿈이셨다고 한다. 그러나 시인은 타고나는 영역이었다. 그래서 소설로 진로를 바꾸셨다고 한다. 소설은 타고남보다 오래 의자에 앉아있을 수 있는 묵직한 엉덩이만 있으면 되니까.”누구의 글인지 아는 분은 아실 것이다. 내가 조금 각색을 했으나 요지는 이러했다. 시인은 타고나야 하는 영역이기에 타고나지 않은 것 같아 포기하지만, 글을 쓰고 싶으니 소설을 쓰자. 이렇게...


나도 마찬가지였다. 예술이 꼭 기발한 창의력만으로 되는 건 아니잖아. 내게 말했다. 나는 그림을 베끼는 것이 좋았고, 잘 그려졌을 때 더 기분이 좋았으며 그렇게 내가 그린 수많은 나날들이 한데 어우러져 걸려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제일 좋았다. 매일 그렇게 하나의 이미지를 하나의 사진을 정해서 베껴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목을 위대한 일상이라고 지었다. 그렇게 오고 가는 출퇴근길 차 안에서 위대한 일상은 시작되었다.


위대한 일상이 시작된 지 10년을 넘겼다. 365일이 하루도 빠짐없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2013년부터 였다. 그리고 그해의 작품은 파리 그랑팔레에서 전시되었다. 1992년 로트렉의 그림을 보기 위해 처음 왔던 파리. 그때 전시장이 그랑 팔레였고, 21 년이 흐른 뒤 나의 작업이 그곳에 걸렸다. 그러나 그것 뿐이었다.


난 여전히 위대한 일상을 그리고 있다. 온전이 한 해가 채워진 뒤로 7년이 지났고 이제는 2천여 개를 훌쩍 넘겼다. 그리고 요즘은 그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바보 같은 작업은 이 세상엔 없을 거야..라고. 누가 바보같이 사진을 똑같이 배껴그리는일을 이토록 오래, 그것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하고 앉아있단 말인가.. 어쩌면 나는 이제 창의적이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난 창의적이 된 것일까? 엊그제 달력을 정리하다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의 봉준호 감독의 수상소감을 적어둔 것을 다시 보게 되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 적인 것이다.” 위대한 일상은 창의적이지 않으나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이다. 나다운 바보 같은...


그럼에도 오늘도 위대한 일상을 그리고 또 올리고 있다. 내시대에 대한 나만의 기록…

“화가가 자신의 화폭에 얹는 것은 그의 삶의 나날들이며, 지나거나 지나지 않은 시간들이다.”(장 폴 사르트르, 상황 4권, 특권 없는 화가 중 한 대목) 


                                                                                                                           

                                                                                                                            -나는 파리의 우버 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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