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본 세상
종종 그린 것보다, 우연히 그려진 것이 더 나아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우연의 결과가 늘 '좋은 결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연'을 조절할 수 있을 경지가 아니면,
늘 우연으로 얻어진 이미지는,
흘러가고 만다.
그런데,
그린 것보다 그려진 것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화가 이우환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아프리카 나라들까지 모두 독재가 사라지고, 민주화와 자유화가 이루어지는 마당에,
왜 화가들은 자신의 화폭을 자기 영토라고 생각하고 독재를 하려고 하나요?
그 화폭에게 물어봤나요? 그 물감에게 물어봤어요?"
지금으로부터 30년도 넘은, 1990년대,
국제 갤러리에서 있었던 전시 중, 작가의 말이었다.
당시에도 그는 유명했다.
화폭에 점을 하나 찍는 화가, 도봉산에서 돌을 주워다가 놓고 작품이라고 하는 작가,
그리고 일본의 현대미술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까지. 그에 대한 일화들은 모두 화젯성이 있었다.
그러나 어찌 보면 1990년대에 그가 한국 화단에 등장할 때까지, 그는 가려져 있었다.
그의 세미나 발언들은 정말 흥미로왔다.
나중에 그의 책으로 비슷한 내용들이 소개되기도 했다.
작가들이 작품의 영역을 자신의 영토라고 생각하고,
철저하게 자신의 생각을 관객에게 강요하는 것을 비판하며,
그는 작품에서 자신을 철저히 지우고 외부와 소통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덜어낸다고 해도, 또 덜어내었다고 해도,
빈 공간에 점하나여도,
현대미술의 난해성에 기가 눌린 관객의 입장에선,
그 역시도 독재일 수 있었다.
그러나,
꽉 찬 작품이 아닌 무언가 비어있고, 무언가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조금이나마 관객이 숨 쉴 공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점 하나를 작품으로 내어놓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인문학적 수고가 이루어졌을까?라고 생각하면,
그의 작업을 말없이 바라보게 된다.
실제로 1996년 호암미술관에서 있었던 한국 추상회화의 정신전 세미나에서,
그는 작가 이전해 한 철학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작품세계에 있어서, 철학계의 관점에서 보기에도 오류가 없을,
거의 유일한 한국 추상 회화 작가가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린 것보다 그려진 것..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
인생도 세상도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엇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물 흐르듯이 두어서 내 행위로 대상을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결과가 무엇을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늘, 안타깝게 너무 빨리 떠난 고 박원순 시장의 말이 생각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장'이 되겠다..
어디든 무엇 짓고 부수고 만드는 이 천박해지는 서울을 보며,
그의 말이 그가 했던 일들이 생각나고 또 생각난다.
건축가 유현준은 도시를 지키기 위해선, 건물을 지키기 위해선 '도로'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도 파리 곳곳엔 세모꼴이거나, 이상하게 얇은 건물들이 있다.
그런 건물들은 모두 '도로'를 지키려다 보니 그리 된 것이었다.
그렇게 도시는 지켜지고 새로운 공간이 , 기대하지 않았던 생명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무엇을 그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려진 모습처럼.
자아들이 비대해져서 충돌하는 시대,
조금씩 비우고, 덜고, 강요하기 전에 생각해 보는,
화가가 색을 칠하기 전에 그 색에 물어보는 그 마음처럼,
우리는 채우기보다 비우기를 먼저 생각할 수 없을까?
파리의 하늘이 아름다운 이유는 단 하나,
높은 건물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을 찌르는 구조물이라고는
서쪽에 에펠, 동쪽에 몽파르나스타워 둘 뿐이다.
라데팡스의 빌딩숲은 파리의 서쪽 바깥에 있다.
새로 지어진 높은 건물인 듀오 타워도, 파리 동쪽경계선까지 물러나 앉아있다.
그래서 온전히 열려있는 하늘을 시민 모두가 누린다.
걸으며, 자전거를 타며, 차를 타고서도,
국경이 없는 하늘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각자의 생각을 시간을 채우게 해 준다.
서울 하늘, 광화문 하늘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날이 오면,
우린 그 하늘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저런 천박한 시장은 다시는 뽑지 말자'라고 나는 생각할 것 같다.
한 사람의 잘못된 생각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과 역사에 '해악'으로 남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장이 되겠다고 말한 박원순의 생각은 너무 앞선 세계였다.
마치 바보 대통령이 우리에게 너무 빨리 찾아와 준 것처럼..
그의 생각이 '읽혀'지기엔, 우리의 삶이, 서울 시민의 삶이 너무 팍팍했다.
비움보다 집값을 지켜야 했다.
바보 대통령, 서민 대통령도 우리에게 너무 이른 이야기였다.
우린 그런 대통령을 가질 준비도, 자격도 없었다.
그리고 결국 우린 그를 지키지조차 못했다.
다시금,
채우기보다 비울 줄 아는, 깊은 사람을 선택할 수 있을까?
작가가 화폭을 자기의 영토라고 생각하고, 군림하는 독재를 일삼듯이,
국민을, 나라를, 도시를, 자신의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짓밟는 자가 아닌,
작가 이우환이 말하듯,
나를 비우고, 몰입된 자아를 비우고, 보는 이로 하여금 그 공간이 채워지게 하는,
작가가 자신의 회복과 공간을 관객에게 내어주듯,
자신의 권력의 공간을,
국민의 손에 내어주는,
스스로 국민의 종복이라 칭하고, 공적인 의식을 갖은, 부지런한 종을,
우리는 선택할 준비가 되었을까?
아집보다 소통이 먼저인,
끝없는 숙고에도, 자연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그리기보다 그려지는 지혜의 시대를 고대하며...
우연을 순간으로 담아둘 수 있는 그 시간까지 노력을 경주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