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본 세상
흑백요리사 7회에서 그려진 단체전.
생선부문의 대결에서 백수저팀은 재료를 싹쓸이한다
싹쓸이를 주도한 팀의 리더는 요리에서 재료의 중요성을 당당히 말한다
이기기 위해선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식의 논리,
팀의 구성원들은 "리더의 결정은 따라야 하는 것"이라며 군말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20년, 30년은 훌쩍 넘는 화려한 경력과 연륜을 가진,
소위 '대가'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벌이는 '치졸한 짓'을 보는 것이 서글펐다.
이기기 위해, 상대방의 허점을 노려 재료를 싹쓸이하는 모습이 당당하게 그려지는 사회,
상대편의 영악한 수에 당하고 마는, 흑수저팀의 모습,
불법은 아니지 않냐며, 법의 테두리 안에서 행사되는 수많은 '만행'들 중 하나를 보는 듯했다.
이기기 위해, 목적을 쟁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종종 '멋진 신화'로 각색되어 왔다.
목표를 위해 돌진하는 '못된 성격'의 리더도 '멋있게' 포장되곤 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처럼, 괴팍하지만 일을 잘하면 모든 것이 '용서' 됬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의 '기회의 균등'이 보장되던 시절의 이야기다.
누구든지 저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가능한 시대의 이야기였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시대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그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지리 않고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의 경로'와 '노하우'를 독점하는 시대다.
강남에서 서울대 진학률이 가장 높은 것도, 또 점점 높아지는 것도,
'수단과 방법'을 '가진 자'들이 '독식'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런 성공으로 획득한 '자원'으로 '더 나은 환경'을 조성 유지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보와 자원에서 비롯되는 차별적 환경,
'기울어진 운동장'은 전 세계, 전분야에서 '일상화'된 지 오래다.
얼마 전 파리 올림픽에선 친환경을 내세운 선수촌이 등장했다.
그 선수촌엔 에어컨이 없었고, 선풍기만 있었다.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설계였다.
그러나, 부자나라 선수들과 몸값이 비싼 선수들은 무더위를 피해 최고급호텔로 숙소를 옮겼다.
그런 선택을 할 수 없는 선수들만 선수촌 남았았다. 이것이 올림픽 정신이 사라진 오늘의 올림픽의 모습이다.
재료를 싹쓸이 한 백수저팀은 결국 이겼다.
'맛'으로 승부하는 예능이었지만,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본,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관객들이,
저 백수저팀의 천박함을, 승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몰상식을 꾸짖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작과정을 지켜봤지만 내용을 알 수 없었을 수 있고,
또, 상대편 흑수저의 요리였던 리소토의 특이한 식감이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다.
두 명의 심사위원이라도 그 '싹쓸이'의 몰상식을 지적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런 장면 역시도 없었다.
사람들은 결국 '맛있다'는 것, '예쁘다'는 것에 손을 들어준다.
아름다운 시각과 맛있는 미각은 이래서 위험하다,
도덕적인 판단과는 따로 작동함은 물론, 역으로 도덕을 교란할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이 '선한'것처럼 받아들여지게 만든다.
'힘'에 대한 논리도 마찬가지다. 마치 '강한 것'이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여,
"요리에선 재료가 최우선"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그 리더의 모습은,
너무 당당해서 무슨 짓을 해도 이기기만 하면 괜찮은 건가?라는 착각이 들게 한다.
우리 사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한 사람이 정점에 올라가서,
그 위치와 권한을 이용해 다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재산을 지켜내는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다.
어쩌면, 이 예능 프로그램은 '정확하게' 우리 사회의 경쟁방식을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오징어 게임의 경우처럼,
넷플릭스의 자본과 기술이 창작자와 만나 우리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추악한 우리 사회의 민낯'을 한 번 더 보여준 셈이다.
이스라엘은 높은 기술력으로 헤즈볼라를 공습하고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쟁을 이어가는 모습이, 이기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에서
나는, 단체전의 백수저팀의 그 전략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이기기 위해 그렇게 영악한 수를 쓰는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게,
오히려 프로의 모습으로 비치어지는 시대라면,
그것은 서글픈 시대를 넘어 희망이 없는 시대다.
이스라엘의 강공을 주도하는 네타냐후의 지지도는 레바논으로 공습을 이어가자 상승했다.
절반이 넘는 이스라엘 국민들이 그렇게 네타냐후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비리 혐으로 인한 감옥행을 막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음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그의 강공 드라이브는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시 한번, 힘의 논리, 강한 자의 논리가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고 호응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은 선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강한 것이 옳은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세상,
그렇게 '자본'과 '권력'은 자신들의 힘으로 '아름다운 것'과 '강한 것'을 만들어 내고,
자신들의 체계를 공고히 하며, 대중에게 자신들처럼 아름다워질 수 있고 강해 질 수 있다고 유혹하는 사회..
맞다, 그들처럼 아름다워지고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대신 영혼과 정신을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
네타냐의 행동에서 '인간의 영혼'을 느낄 수 없었다.
인간을 향한 '연민과 '동정'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료를 싹쓸이하던 저 대가들의 모습들도,
내겐, 생각 없이 승부에 눈이 먼 모습이었다.
맛을 이야기하는 요리 프로그램을 보며, 역겨움과 구토가 올라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유엔에서 당당히 연설하는 네타냐후를 볼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7qOwkW4P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