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깨운, 한 아이의 바보 같은 질문 (3/3)
나를 깨운, 한 아이의 바보 같은 질문 (3/3)
고흐,
영원의 문 앞에서 (1)
모네가 순간에서 영원을 보았다면,
고흐는 영원으로 가는 문 앞에 섰던 화가였다.
그렇게, 자신이 보았던 '일상'안에 '영원의 모습'을 그려두고 떠났다.
9년이라는, 길지 않은 '화가의 삶'동안 그가 남긴 작품은, 습작 1100여 점, 유화 900점에 이른다.
마치, 해리포터에서 마법의 세계로 가는 신기한 기둥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던, 그 신기한 문처럼,
고흐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장면을 선택해서,
그 장면을 통해, 자신의 그림을 통해, '일상'을 '영원의 문' 앞에 가져다 두었다.
모네는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어 놓았고,
고흐는 영원으로 가는 문을 열어두었다.
고흐는 말했다.
"나는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을 보고 있어, "
사람들이 만나게 될 모습을 미리 그림으로 그려놓은 셈인데,
소름 끼치게도,
예술이 무어냐고 백남준 선생에게 물었을 때,
말년의 선생의 답은,
"예술이란,
미래의 시선으로 현재를 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고흐도 백남준도,
같은 문 앞에,
같은 곳에 서있었던 셈이다...
윌렘 대포가 주연한 고흐를 다룬 영화의 제목이 '영원의 문 앞에서'인 것은 의미심장했다.
참 잘 지은, 잘 찾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고흐가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그린 그림의 제목도 '영원의 문에서'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것일까..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모델의 모습이나
그 모델을 그리고 있는 화가의 마음이나,
너무나 고통스럽게 닮아있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고통스럽게 만든 것일까..
'빈센트'라는 노래가 있다.
돈 멕클렌 이라는 가수가 부른 곡이다.
1971년 발표되었는데, 영국에선 싱글 차트 1위에 오를 만큼 인기를 얻었고, 지금까지도 사랑받는다.
"starry starry night,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돈 멕클렌이 고흐에 관한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고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나는 돈 맥클린이 진정 '깊이' 빈센트 반 고흐를 이해했고, 사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vincent'라는 노래 제목 때문이다.
돔 멕클렌은, 제목을 반 고흐라고 하지 않았다.
빈센트 반 고흐를 지칭할 때 우리는 그의 풀네임이 아닌 그의 패밀리 네임, 반 고흐로 주로 쓴다.
미술관도 반 고흐 미술관, 재단도 반 고흐 재단이다.
그러나, '반 고흐'는 고흐 자신이 너무나 끊고자 했던, 벋어나고자 했던 '패밀리 네임(성)'이었다.
"테오, 네가 반 고흐 테오, 이기에 널 좋아하는 것이 아니야,
넌 내게, 반 고흐 테오가 아니라, 그냥 '테오'야..."
너무나 잘 알려진, 그 누구보다 가깝고 유일했던 동생 테오에게,
집안을 거두어내고, 한 인간으로서의 테오를 바라보았고 사랑했다.
그가 마지막 작품인 나무뿌리를 그리며,
'나는 뿌리로부터 공격받고 있다.'라고 적어두었던 것도,
그가 얼마나 가족의 그늘에서 벋어나고 싶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글에선, 빈센트도 아니요, 빈센트 반 고흐도 아닌, 그저 '고흐'라고 적는다.)
고흐는 네덜란드의 목사집안에서 태어났다.
고흐의 집안을 특징짓는 두 가지는 목사와 미술 중개상이다.
고흐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목사였다. 그리고 고흐의 둘째 삼촌은 미술 중개상이었다.
유럽의 유명 화방이었던 구필 화방에서 미술 중개상으로 크게 성공한 삼촌이었는데, 흥미롭게도 그 삼촌의 이름도 뱅상, 빈센트였다. 가족들 사이에선 센트 삼촌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고흐는 6남매의 장남이었고, 아버지는 10남매의 세쩨 아들이었다. 삼촌들이 유럽대륙에 훑어져 있는 대가족이었다.
고흐의 가족사에서 특이점은, 고흐가 장남이었지만, 고흐가 태어나기 1년 전에 고흐의 어머니는 사내아이를 사산하게 되는데, 그 아이의 이름이 빈센트였다. 다시 말해, 고흐는 죽은 형의 이름을 이어받은 셈이다. 그렇게, 어쩌면 부모의 시선 속에서 죽은 형의 그림자를 느끼면서 살았을 고흐는 화상으로 크게 성공한 센트 삼촌의 권유에 따라 구필 화방에서 직원으로 몇 해간 일을 하지만 고객들과의 잦은 마찰로 추정되는 경력으로 말미암아 화방일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목회자가 되고자 준비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조차도 실패하고, 고흐는 목회자가 아닌 사설 선교사가 되기로 결정한다. 흥미로운 것이 이러한 결정이 '가족회의'에 의한 '결정'이었다는 점이다. 고흐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엄한 아버지의 인정을 받는 길이 실패하자, 마치 온 가족의 판결에 가까운 결정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사설 선교사의 길 역시도 성공하지 못한다. 당시 사회의 가장 극빈층 속으로 들어가 선교를 하는 것이 일이었는데, 고흐는 그 극빈층보다 더 가난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마치 나중에 그림과 삶을 분리하지 못했던 것처럼, 가난 이들과 자신을 분리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택한 사랑 마저, 한 사람은 집안의 사촌으로 아이가 딸린 미망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아이가 딸린 창부였다. 모두 가족의 반대로 사랑을 이어가지 못하고, 다시 고흐는 좌절하며, 처음으로 1년여간 가족과의 연락을 끊는다. 처음으로 긴 침묵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1년여 뒤에, 동생 테오와의 마지막 상의를 거친 뒤, 화가의 길로 들어서겠다고 선언하게 되는데,
그때가 1880년, 고흐의 나이 27세였다. 화가로선 한참 늦은 나이였던 셈이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2년여의 연습기간을 거치고, 본격적으로 화가의 기로 들어서기 전까지 고흐는 많은 습작을 그렸다. 모델이 없어 정물과 꽃을 많이 그렸고, 그가 살던 고장의 사람들을 그렸다.
그 시기에 그려진 작품 중 하나가 1885년에 그려진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그곳은 '뉘넨'이라는 고흐의 아버지가 목회활동을 하던 곳이었고, 그림이 그려진 해는 고흐의 아버지 세상을 떠난 해였다.
고흐의 아버지의 죽음과 이 그림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반면, (고흐의 아버지의 죽음은 그해 3월 산책에서 돌아오던 중 심장마비로 인한 사망이었다.) 고흐가 끝내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다시 말해, 고흐에겐, 아버지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프로이트가 분석한 '친부살해의 욕구'가 진정 한 남성이 그 주체성을 확립하는 단계라는 가설을 생각한다면, 고흐로선 영원히 하나의 완전한 성인으로 거듭날 기회를 원초적으로 잃어버린 것이다. 가령, 모네의 경우, 카미유와의 만남으로 집안의 반대와 제정 지원 차단이라는 아버지의 결정에 정면을 반발하며, 끝내 성공도 거두고, 아버지의 인정까지 받아낸, 완벽하게 아버지를 극복하며 한 사람의 성인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면, 고흐는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다.
선교사의 길에 실패하고, 또 선교사의 길의 실패를 속죄하듯, 가장 가난하고 힘든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그 봉사를 실천하며 살아가려던 고흐의 구상이 실패한 것 역시도, 그 이후로, 완전히 정리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 반대로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그것은, 일생을 통해, 가난하고 힘든 이들을 볼 때마다. 자신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가족의 반대에 부딪혀), 또 자신이 버린 것이 되고만, 사랑했던 여인들의 모습과 동일시되고 말았고, 어쩌면, 그것이, 화가로서의 고흐의 작업이, 단순이 '직업'이 아닌, 한 '인간'의 운명을 손에 쥔 '숙명'같은 것으로 변화해서, 삶과 예술을 분리할 수 없게 만든 것이 아닐까?라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고흐가 예술과 삶을 구분할 수 있었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이 버려야 했던, 버리고만 사람들이 여전히 세상에 끊임없이 존재하고, 자신도 그 공범이었기에, 그렇게 처절하게 슬픈 세상에서 자신의 그림만이라도 '의미'가 있어주어야 했던 것이다.
"내가 예술에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삶에서도 성공하지 못할 거야"
'독백'하듯 테오에게 말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은 목회집안이라는 물리적 환경과는 별개로, 고흐는 종교적이었고, 문학적 인간이었다. 동생과 주고받은 900여 통의 편지는 단순히 형제사이의 안부를 묻는 차원의 글이 아니었다. '서간 문학사'에 남을수 있는 하나의 문학작품이었다.
"지구상의 누군가가 고통받고 있다면, 내가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라고 질문했던 톨스토이의 사상이, 고흐에게도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작곡가 말러도 그런 톨스토이의 사상에 깊이 영향받았었고, 그러기에 세상을 이야기하는 거대한 곡들을, 수많은 정신적 고통 속에서 써 내려갔다. 고흐 역시도, 풀리지 않는 질문들과 세상의 고통 앞에서 '의미'있는 무언가를 갈망했고, 그 무언가가 고흐에게는 '그림'이었다.
(계속)
https://www.youtube.com/watch?v=0vwowOBoMR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