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깨운, 한 아이의 바보 같은 질문 (2/3)
(2/3) 순간에서 영원으로,
모네는 왜.
아주 오래전 '지상에서 영원으로 라는 영화가 있었다.
버트 랭커스터와 데보라 카의 해변 키스신으로 유명했던 영화였다.
그리고 그 키스신보다 더 사랑받았던 것은,
https://www.youtube.com/watch?v=AVH3xYl7S6M
주인공이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그리며 트럼펫을 연주하는 장면이었다.
'지상에서 영원으로',
영화를 보기도 전에 '제목' 주는 '울림이 있었다. '유한'한 지상을 떠나 '영원'으로 향하는,
어딘가 슬픈, 유한한 운명 속에서 무한한 꿈을 꾸는 인간의 숙명이 느껴졌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자신에게 사진의 본질이란,
"순간과 영원을 포착하는 세심한 눈으로부터 오는 자발적인 충동"이라 했다.
우리들도, 그렇게 사라지고 마는 수많은 '순간'들을 붙잡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그런 행위의 극단에 위치한 이들이 바로 '예술가'들이다.
삶을 걸고 기필코 그 순간을 담아내고 만다. '모네'도 그랬다.
모네는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출신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캐릭커쳐로 용돈을 벌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상업 감각도 있었던 작가지망생이었던 셈이다.
청운의 꿈을 안고 파리에 입성한 나이가 18이었다.
중산층이었던 모네의 집안에선 어린 시절의 재능과 당시 고전회화에 대한 신뢰와 함께 아들을 지원한다. 그런데 파리에 정착한 모네는 아버지와 집안의 기대와는 달리, 전통적인 미술이 아닌, '근대회화'라는 새로운 미술사조에 뛰어들게 되고 미래의 부인되는 모델 카미유를 만나게 된다.
당시만 해도 모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부정적이었다. 그 만남에 반대한 모네의 아버지는 경제적 지원을 끊었고, 모네와 카미유의 고난의 삶이 시작된다. 당시 몽마르트르는 파리에서 가장 높은 달동네였다.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살았고, 그런 이유로 예술가들이 많았다. 작은 포도밭과 언덕에서 채굴되던 석고가 유일한 그곳 주민들의 생계수단이었다. 모네의 아내 카미유는 다른 집의 빨래를 해주는 일등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그들의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파리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살던 그곳에서 조차 버티지 못하고 파리 북쪽 작은 마을로 떠나야 했다.
그곳에서 카미유는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 순간은 모네의 그림으로 남아있다. 아내의 장례식에서 죽은 아내를 바라보던 모네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가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끝내 이젤을 꺼내 그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 절친했던 친구이자 인상주의의 동료화가였던 르누아르가 말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모네는,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쩌면, 아내를 위해서이기도 했겠으나, 모네 자신이 그 순간을, 영원히, 영원히 사라져 가고 잊힐 그 순간을 자신의 화폭에 담아두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캬르티에 브레송의 말처럼, '순간'을 잡아두고픈 인간의 욕망, 사진의 욕망처럼, 모네는 자신으로 손으로 자신의 눈으로, '신의 눈을 가진 사람'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그 '화가의 눈'으로 아내를 곁에 두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것이 그가 사랑한 방식이 아니었을까...
임종을 맞은 아내 카미유의 초상은,
어쩌면 화가가 마지막으로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도 자신의 어머니의 임종의 모습을 비디오로 담았다.
빌 비올라도, 모네도,
떠나고 흘러가는 무수히 많은 순간들을 자신의 작품 안에 담고자 했다.
모네가 화가의 꿈을 안고 파리에 입성했던 19세기는 기차가 발명되고 새로운 산업기술과 사회변혁 혁명 이후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근대 회화의 이상이 꿈틀거리던 시기였다.
근대 회화의 변화는 '사상적 배경'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변화' 그것도 '과학기술'에 의한 일상생활의 변화에서 기인한 바도 컸다. 흥미롭게도, 빌 비올라의 스승이자,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였던 고 백남준 선생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라는 역사적으로 지울 수 없는 '타이틀'을 얻게 된 과정에 대한 질문을 받은 자리에서(그 질문을 던진 사람은 철학자 김용옥 선생이었다.) 창조라는 것은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오는 결과라기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구한 수많은 개발자들의 성과가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답했다.
기차가 발명되어 화가들은 화실과 도시를 벋어나 파리 근교의 자연으로 손쉽게 떠날 수 있었다. 튜브물감의 발명으로 화가들은 들판에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 백남준 선생의 말처럼, 기술의 발명을 통한 일상의 변화로 새로운 미술이 싹튼 것이다. 파리근교의 인상파 회화들과 바르비종의 사실주의 회화들이 그렇게 싹텄다.
사상적 변화와 현실의 변화, 사진의 발명으로 대상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세상을 만난 회화는, 어쩔 수 없이 그 '존재의 이유'에 대한 물음에 직면하는데, 이것이 '근대 미술'의 시작이었다.
미국의 미술 비평가 아서 단토가 '아름답게' 정리한 근대미술의 기원은 이것이었다. "나는 왜 미술인가? 회화란 무엇인가?" 이 질문으로부터, 회화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서 벗어나(해방되어) 자신의 진리를, 화가 자신의 진리를 찾아 나선다.
그 문을 열었던 것은 마네였다.
모네보다 8살 연상이었던(1832년생) 마네는, 창부를 당당하게 그리고(올랭피아),
화면의 입체감을 과감히 없애버린 도발적인 회화(풀밭 위의 점심식사)로,
아카데믹 화단의 원로들에겐 공분을 샀고, 모네를 비롯한 일군의 젊은 화가들에겐 '해방의 불길'을 댕겼다. 그렇게 인상주의 길을 터준 마네는 '인상주의의 아버지'가 되었고, 그 마네가 문을 연 길을 가장 먼저 달려 나간 모네는 '인상주의의 선구자'가 된다.
눈에 보이는 형태나 신화의 이야기나, 그림을 구성하는 그 어떤 규칙에도 종속되지 않으며, 모네는 자신의 눈에 비치는 빛에 의해 만들어진 형태를 그려나갔다. 모네는 대상엔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관심 있는 것은 오직 그 대상과 화가 사이에 그 사이에 일어나는 '어떤 일'이었는데, 그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빛에 의해 변해가는 순간들이 만들어내는 '영원한 순간'들이었다. 어떤 순간은 잡히지 않고 떠나갔고, 또 어떤 순간은 그의 붓끝에 사로잡혀, 그의 화폭에 안착했다. 그렇게 그려진 그의 회화는, 영원을 담은 '순간'들의 모습이었다.
놀라운 것은,
40대의 나이에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고 파리 근교 넓은 정원과 저택을 소유하고서도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역시 언제나, 모차르트가 그랬듯, 타고난 천재가 노력까지 해버리면, '역사'가 되고 만다.
모네는 자신의 정원인 지베르니를 완성한 이후, 모든 것은 자신의 정원 안에 다 있다고 말했다.
그림의 소재를 찾아 전 세계를 다녔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그렇게, 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2층의 자신의 침실에서, 아침에 일어나 정원을 내려다보며,
그날 그릴 것을 구상하고, 정원은 가꾸고, 화가는 그렇게 여든여섯 해의 생을 살았다.
정원을 가꾸는 것도, 모네가 가장 사랑한 일중에 하나였다. 화가가 되지 않았으면, 정원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모네는, 화훼로 유명한 네덜란드로 유학을 가서 직접 기술을 배워왔다.
그리고 그 시절의 '좋은 인상'때문인지, 네덜란드식, 절제되고 규칙적인 일상을 보냈다.
그에겐 식사시간이 무척 중요했는데, 아침식사는 늘 새벽에 가까운 이른 아침이었고, 점심은 11시 30분으로 무척 일렀는데, 그 이유가 중요했다. 바로 낮시간에, '햇빛이 있는 시간'을 최대한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저녁엔 그 누구도 초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날을 위해 일찍 잠에 들어야 했기 때문이라니, 정말 '성실한 대가'였던 셈이다. 커다란 파라솔아래서 노년의 화가는 수양딸인 블랑쉬의 도움을 받으며 노년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70대의 나이에 시작해서 10여 년을 걸쳐 완성해 낸 대작이 바로 수련이다.
모네는 그렇게, 무수히 많은 빛의 조각들이 만들어내고 흘러가던 '순간'들을 자신의 화폭에 담았고,
그 '순간'들은 쉼 없이 그의 화폭 안에서 충돌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순간'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모네가 그렇게 일생토록 사로 잡혀있던 그 '대상과 화가 사이'의 그 '무엇'은,
이제 모네의 그림과 그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 '사이'에 놓여있다.
그렇게, '순간'은 '영원'이 되었다.
모네,
순간에서,
영원으로...
나를 깨운, 한 아이의 바보 같은 질문(3/3)
고흐,
영원의 문...
모네가 순간에서 영원을 보았다면,
고흐는 영원으로 가는 문을 찾았던 화가였다.
그리고, 그렇게 수많은 영원의 문을 일상의 모습 속에 그려두었다.
마치 영화 해리포터에서 마법으로 가는 신기한 기둥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던, 그 신기한 문처럼,
고흐는 아무렇지 않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장면을 그려서,
그 장면을 통해, 자신의 그림을 통해, 영원으로 가는 모습을 그려버렸다.
모네는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어 놓았고,
고흐는 영원으로 가는 문을 열어두었다.
윌렘 테포가 주연한 고흐를 다룬 영화의 제목이 '영원의 문'인 것은 의미심장했다.
잘 찾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흐는 영원을 향한 문을 찾던 화가였다.
그리고 고흐가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그린 그림의 제목이 바로,
'영원의 문'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