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비에 페스티벌 후기 (03)
첫날 사진을 한 장도 찍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쉬웠지만, 모든 순간을 마음에 새길 수 있어 좋았다.
첫날의 마스터클래스를 어깨너머로 들으며 차이콥스키의 오페라는 언어의 장벽이 높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크라이나 출신 가수의 조지아 사투리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분할 수 있을까?
가슴을 에이는 듯한 차이콥스키의 오페라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이 알려진 백조의 호수 못지않게 아름답고 슬프다. 그런데 그 언어와 감정을 제대로 전달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짐작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날의 마스터클래스는 피아노였다. 같은 공연장이었다. 아침에 가보니 무대엔 두대의 그랜드 피아노가 들어와 있었다. 임윤찬을 이야기하는 어떤 클래식 유튜브에서 들었던 바부제라는 프랑스 피아니스트의 클래스였다. 사실 따로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다 하루밖에 머물지 못했기에 다음날 아침 그것도 일요일 아침 9시 30분에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했다.
세명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연주를 했고, 바부제는 설명과 코멘트를 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바부제의 코멘트가 흡사 대법원이나 헌재 판결을 듣는 느낌이었다. 윤짜장의 시대를 지나며 잃어버린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바이든 날리면에서 무속까지 우린 얼마나 어이없는 시간낭비를 해왔던가? 생각만 해도 부아가 치민다..) 이 먼 곳까지 왔건만, 여기서도 정치 시사의 DNA는 여전히 완전히 사라지진 않은 셈이었다.
바부제의 평가가 재판의 판결 같았던 것은, 일단 큰 칭찬으로 코멘트를 시작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마치 재판에서 엄하게 꾸중하면서 시작하면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나고, 처음부터 좋게 이야기하면 나중에 판결이 반대로 나온다는 것처럼, 바부제의 감상평이 큰 칭찬으로 시작할수록 뒤로 가면서 차가운 지적이 많아졌다.
사실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피아노를 전공하지 않은 나로선 알 수 없지만, 청자로서 느낀 것은 무언가 잡히지 않는 부분들에 대해서, 바부제는 마치 전날부터 흐린 날씨로 베르비에 산맥에 걸쳐있던 안개를 아침 햇살이 거두어 내듯, 뭐라 말할 수 없는 '의아함'을 정확히 드러내 주었다.
"네 음악이 무슨 말을 하는지 난 잘 모르겠다."
그날 가장 많이 들었던 바부제의 지적이었다. 세명의 젊은 피아니스 모두에게 한 번씩은 이 지적이 나왔다. 한 젊은 피아니스트에겐, 연주를 다시 해보라고 하며 입으로 박자를 읽게 했다. 무언가 흩어졌던 음악들이 자리를 다시 잡아가는 모습이었다.
이 젊은 음악가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노력해 왔을까? 생각하며, 나이 어린 어른들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또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저 검은 피아노와 씨름하며 보내게 될까.. 마에스트로 정명훈은 피아노를 치는 것을 두고 열개의 손가락으로 저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를 들고 있는 것과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느낌이었다. 그들 모두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역사에 남기를 진심으로 기원했다.
오페라가 아닌 피아노 연주, 그것도 하이든에서 현대 음악까지 레퍼토리가 무척 넓었다. 휴식시간을 포함해서 3시간, 예정된 시간을 훌쩍 넘겼지만, 바부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에너지가 넘쳐나는 모습이었다. 어린 피아니스트들에게, 자신이 느낀 것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스승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무대 위에서 펄쩍펄쩍 뛰며, 자신의 느낌이 전달될 땐 기뻐하고, 전달되지 않을 땐 땅이 꺼지는 한숨과 함께 주저앉는 그의 모습은, 나이를 초월한 순수한 예술가,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무엇이, 어떤 열정이 저들을 저렇게 불태우게 했을까? 그러나 돌아보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에 모든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길에서 '열정'을 불사르며 살아간다. 무리해서 찾아간 베르비에가 내게 남겨준 것은, 보여준 것은 그것이었다. 열심히 살아라 저들처럼... 그리고 드라마 '미생'에서 인용된 바둑기사 조치훈의 말이 떠올랐다. 왜 그렇게 치열하게 목숨을 걸듯 바둑을 두냐는 질문에, 바둑이니까, 그리고 그래봐야 바둑일 뿐이라는 묘한 뉘앙스를 남기던 그 장면, 그 대목이 떠올랐다.
‘바둑 한판 이기고 지는 거 그래 봤자 세상에 아무런 영향 없는 바둑, 그래도 바둑, 세상과 상관없이 그래도 나에겐 전부인 바둑. 왜 이렇게 처절하게 치열하게 바둑을 두십니까? 바둑일 뿐인데. 그래도 바둑이니까 내 바둑이니까, 내 일이니까, 내게 허락된 세상이니까.’ -드라마 미생 중에서.-
각자의 바둑이 있고, 각자의 삶이 있었다. 마스터클래스의 젊은 영재들과 그들을 가르치는 거장의 모습을 보며, 나도 저렇게 열심히 살고 싶다는 생각이 그날 들은 음악만큼 내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https://www.verbierfestival.com/show/vf25-07-27-academy-bavouzet-masterclass-pi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