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브게니 오네긴...

베르비에 페스티벌 후기 (02)

주차장에 차가 거의 없을 정도로 외진 곳에 있는 한산한 공간이었다.

작은 음악홀에 10여 명도 채 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나이가 지긋하신, 티켓을 체크하시는 친절한 마담에게 출력한 티켓을 보여드리자 밝게 웃으며 공연장을 가리켜주셨다.


한여름에 이상 저온과 비바람으로 날씨는 겨울처럼 추웠다. 마스터 클래스의 출연자로 예정된 소프라노가 과연 올까?라는 의문이 나도 모르게 들었는데, 예상대로 그녀는 오지 않았다. 대신 공연을 지휘하게 될 지휘자가 온다는 안내가 전해졌다. 오히려 잘된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예상 역시도 맞았다. 여주인공만 왔다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을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아무래도 소프라노가 남자 가수들의 노래까지 가르칠순 없지 않을까?) 대타로 등장한 지휘자의 공개 강연은 압권이었다. 주요 배역들이 모두 참석했고, 진지하고 깐깐해 보이는 여성 진행자분이 피아노로 오케스트라 반주를 도맡았다. 드라마 밀회에서 김희애가 유아인의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를 위한 랩소디의 오케스트라 파트를 피아노로 쳐주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번엔 피아노 협주곡이 아니라 오페라 오케스트라 반주였다.


자리를 잡고 앉은 지휘자의 설명과 함께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전채를 완주했다. 주요 배역의 가수들이 모두 참석했다. 초반에 등장하는 다중창에선, '아 괜히 왔나?;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베르비에에 음악학교 학생들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빨리 찾아보니 아니었다. 무대에 선 주요 배역들은 베르비에 페스티벌의 공연에 캐스팅된 가수들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의 목이 풀렸는지 공간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지휘자가 압권이었던 것은 러시아 생 페테르부르크 출신이었다는 점에서부터 시작됐다. 차이콥스키의 오페라가 진입장벽이 높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크라이나 출신 소프라노의 발음을 두고, 그것은 러시아 발음이 아니라 조지아 발음이라고 지적한 부분에선 몇몇 관객은 고개를 절제절레 흔들며 혀를 내둘렀다. 나도 말이 안 나왔다. 그동안 내가 들은 오네긴 음반의 가수들의 발음은 모두 맞는 발음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러시아 출신 지휘자의 지적은 정확했고 자신감 있어 보였다. 모든 가수들의 발음을 교정해 주었고, 원작자인 푸쉬킨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잘못된 번역이나 관용구를 설명해 주었다. 초반의 다중창에서 '아리아처럼 부르지 말라'라고 상냥하게 지적했는데, 그 부분도 흥미로웠다. 가수들이 자신도 모르게 독창의 분위기로 흐르는 것을 잡아준 것이다. 공연 전체와 함께 푸쉬킨과 차이콥스키의 작품에 대한 자기만의 그림과 해석이 있는 지휘자의 모습이었다.


관객들의 반응도 정확했다. 20여 명이 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초집중으로 음악을 들었고, 훌륭한 독창과 이중창에는 브라바, 브라보를 아낌없이 연발했다. 그러나 슈퍼모델 같은 여자친구와 자신의 시간에 맞추어 늦게 도착하며 객석에서 다이어트 콜라를 마시다 무대에 오른 테너가 자신의 부분을 불렀을 땐 박수는 나오지 않았다. 의례 넉살 좋은 성격인 듯 그의 역할 해석을 두고, 지휘자의 지적과 설명에 말도 안 되는 토를 달 때는, 몇몇 관객을 자리를 떠났다. 그 테너는 마지막까지 한차례도 큰 박수를 받지 못했다.


반면 마지막 악장에 자신의 독창이 있었던 베이스의 경우, (그는 시작 전부터 자리를 지켰다. 마스터 클래스는 휴식시간을 포함해서 무려 3 시간 넘게 진행됐다.) 마에스트로마저 감동된 듯 지휘를 멈추고 그의 노래를 들었다. 지하 100 미터까지는 파고 내려가는듯한, 알프스 산맥 꼭대기에서 레만호수 지하까지 파고 내려간듯한 그의 저음은 정말 아름다웠다.

"정말 아름다운 목소리네요!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마에스트로는 아무런 지적 없이 감탄을 연발했고, 관객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와 함께 브라보를 연발했다.


지루함을 느낄 수 없는 시간이었다. 피아노의 반주는 총보를 놓고 오케스트라 파트별로 연주를 했기에 이해가 더 빨랐다. "클라리넷을 따라가지 마라" 가수들에게 종종 주문하던 마에스트로의 지적이었다. 유난히도 매혹적인 오네긴의 오케스트라 반주들에 가수들이 따라간다고 느껴던듯했다.


그 밖에 무수히 많은 부분들이 있었지만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무대가 닿을 듯한 가까운 거리에서 공연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세한 설명과 함께 한곡, 한곡, 이 한 공연을 만들기 위해 이 많은 사람들이 식지 않는 '열정'을 쏟아내고 있는 모습은, 한마디로 '숭고'한 풍경이었다.

하나의 공연을 위해 쏟아붓는 저 노력과 시간, 그리고 내 눈앞에 보였던 그 땀방울들은,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로 하는지 다시금 느끼게 해 주었던, 어쩌면 너무 단순한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그랬다.

내가 택한 공연은 정식 공연이 아닌 마스터클래스였다. 가격은 0 스위스 프랑. 공짜였다.

공연 전채를 볼 수는 없었지만, 더 가까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좁은 공간 덕분에 박스들 사이로 만들어진 소리가 더 따스해졌던 경험처럼, 공연 티켓을 구하지 못한 상황 덕분에 더 값진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아름답고 감사한 반전이었다. 내가 택한 두 개의 마스터 클래스는 첫날은 예브게니 오네긴 오페라 마스터클래스와 돌아오는 이튿날은 프랑스 피아니스트 장 에트랑 바부제의 마스터클래스였다.


1박 2일의 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알찬 행운의 시간이었다. 첫날의 오네긴은 너무나 아름답게 마무리 됐다. 흐린 날씨 때문에 해발 1500미터의 도시에서 숙소로 가는 길은 비바람과 안개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난간 없는 산악길을 목숨 걸고 내려와야 하는 다시는 해보고 싶지 않은 주행이었다. 음악으로 방금까지 좋아서 죽을 뻔했다가, 비바람으로 길에서 죽을 것 같은 공포를 경험하며, 화려하게 긴 하루가 마무리됐다. 산비탈이 끝나며 맞은편 산맥에 걸쳐있던 무지개도 위안이 되지 못할 만큼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내리막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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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마에스트로의 찬사를 이끌었던 베이스는 Ossian Huskinson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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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인스타그램에서 예의 그 아리아를 들을 수 있다.


https://www.instagram.com/reel/DNBnnFwgmdu/?utm_source=ig_web_button_share_sheet&igsh=MzRlODBiNWFlZA==

https://www.instagram.com/p/DNBnnFwgmdu/




#02 마스터클래스에 선보였던 작품의 본 공연을 메디치 사이트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정말 기술의 혜택이 놀랍고 감사할 뿐이다...


https://www.medici.tv/fr/concerts/verbier-festival-2025-tchaikovsky-eugene-onegin-stanislav-kochanovsky-anton-beliaev-mira-alkhov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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