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was our eye’: Reuters photographer killed in Afghanistan
2021년 7월 16일 자, 시카고 선타임스의 부고기사 제목이었다.
다니쉬 시디키(Denish Siddiqui).
로이터의 사진작가였던 그는 각종 분쟁지역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던 기자였다.
퓰리쳐상을 수상자이기도 했다.
매일, 하나의 이미지를 골라 그렸던 '위대한 일상: 프로젝트'는 기본적으로 '사진'에 '의존'적인 작업일 수밖에 없었다. 이 프로젝트의 '한계'이자 '단점'이 될 수 있는 지점이다.
'아이러니 (irony, 반어, 反語, 표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실제와 반대되는 의미로 하는 말), 라는 주제로 작업했던 2013년의 경우는 사진을 기반으로 그렸지만, '위트'를 섞어 표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대개의 위대한 일상은 '인상적이'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 많았다. 자연스럽개 시디키 와같은 사진작가의 작업들을 많이 그리게 되었다.그래서 그의 죽음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이렇게 전장에서, 또 분쟁지역에서 사망한 사진작가를 그린 것 역시 그가 처음이 아니었다.
2013년 2월 24일,
시리아 내전 현장을 취재하다 부상을 당하고 끝내 세상을 떠난 프리랜서 사진기자 올리비에 브아쟁을 그린 날이었다.
프랑스 국적이었던 그는 한국 입양아 출신이다. 아이러니가 주제인 해였지만, 그냥 담담히 그를 그릴 수밖에 없었다.
대학 석사과정에서 전쟁 사진이나 보도사진으로 작업을 시작했을 때,
나의 스승께선,
사진기자나 작가가 사진기를 들면,
그 피사체, 즉 인물들은 즉각적으로 상황을 반응해서
인위적인 행동의 상태로 변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하신 적이 있었다.
실제로 당시 영상작업에 쓰였던 뉴스 취재 영상의 경우,
가자 지구에 대피했던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옷매무세를 다듬거나, 갑자기 울음소리가 격 해지는 등,
일종의 '무의식적인 연출'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이 목격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 대한 '나의 반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일어난 것이 아닌가?"였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무의식적 또는 의도적인 '연출'이 발생했다고 해도,
그 '사건'이 존재했던 것은 '팩트'가 아닌가?"라는 점이었다.
나는 보도사진, 현장 사진의 '연출 여부'를 '분석'하는 것보다,
그 '벌어진 상황'을 '전달'하고 '기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진의 '진위'를 판별하기 위한 '논쟁'에 '방점'이 찍히면,
그 '사건'은 그리고 그 사건을 둘러싼 '상황', 그리고 그 '피해자'들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진을 배껴그린다는 '치명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끊임없이,
오늘도 '배껴그리는 작업'을 멈출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단점' 이 있건 말건, '치명적이건 아니건',
이 '사실' 만큼은 '기록'되고 '기억'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던 시절, 소풍이나 여행을 갈 때 '사진기'를 챙겨가곤 했다.
24방짜리 필름 한통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찍고 인화를 맡기도 이틀은 지나야 사진을 받아볼 수 있었고,
그렇게 '이미지'는 '사진'은 '귀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모두 전화기에 무제한의 사진을 담을 수 있다.
이미지는, 100년도 이전에 폴 발레리가 말했듯이 틀면 나오는 수돗물처럼,
또 스위치만 올리면 들어오는 '전기'처럼, 우리의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사진'을 통한 '이미지'는 더 이상 그리 썩 특별하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든,
지금 저렇게 파란 하늘을,
흔들리는 나무를,
지나가는 자동차를 사진으로 담을 수 있다.
그리고 이젠 종이로 인화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화면'을 통해 바로, 즉시 그 '이미지'를 들여다본다.
사진은 이제 자연의 일부이자, 일상의 '연장선에 있다.'
올리비에 부아쟁이 목숨을 잃으며 찍었던 사진들도,
다니쉬 시디키가 목숨을 일으며 찍었던 사진들도,
모두 넘쳐나는 이미지들, 사진들 중 하나로 스쳐 지나갈 뿐인 것이다.
하긴,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자연의 일부이니,
무엇이 그리 특별한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목숨'을 바쳐 그 '위험한 곳'에서 그 '장면'을 담아야 했던, '그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