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스필버그 같은 카라얀 - 카라얀을 이해하는 법

백남준은 암스테르담에 가지 않았다 - 아홉 번째 이야기

1989년 7월 16일 카라얀은 세상을 떠난다.

KBS를 통해 카라얀이 지휘한 베토벤 합창교향곡이 특별 방송되었다.

늘 귓전으로 스쳐 지나가던 오케스트라의 소리들이

카라얀이 눈을 감고 지휘하는 장면들과 함께 귀에 꽂힌 순간이었다.

난 그때부터 클래식을 듣기 시작했다.


합창이 방영되는 동안, 화면 아래로 자막이 흐르고 있었다.

카라얀의 생애를 정리하였고, 업적을 나열되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두 문장은

'그의 음악은 냉전시대 동서 화합의 상징이었으며'란 대목과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이바지했다'라는 부분이었다.


그가 냉전시대에 어떤 동서화합에 어떤 상징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으나,

그가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부분만큼은 쉽게 이해가 되었다.


'사람들이 베토벤이나 바흐는 몰라도 카라얀은 안다'라는 어떤 기자분의 말처럼,

동네 이발소에도, 카페에도, 특히나 포스터를 파는 문구점엔

백발에 눈을 감고 지휘봉을 잡고 있는 그의 포스터는 빠지지 않고 있었다.


대중적으로 각인된 카라얀의 이미지는,

카라얀 자신에 의해 철저히 관리된 것이다.

악보 없이 눈을 감고 지휘하는 스타일과

공연에서, 어떤 장면이, 어떻게 클로즈업되어야 하는지 결정한 것도 카라얀 자신이었다.


베를린 필에 입성하다 만든 것은 공연 영상 제작 스튜디오였다

오케스트라 사이에 여러 대의 카메라를 배치했고,

편집을 직접 디렉팅 했다.

(안타깝게 이 스튜디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카라얀이 서거하던 해에 객석의 특집기사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내용만 기억날 뿐 이름은 잊고 말았다.)



카라얀이 철저히 관리한 것은 비단 이미지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멋있다고 해도, 실력 없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녹음 시장을 미리 간파한 '헤안'덕분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판매된 카라얀의 음반은 무려 900억 장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라얀에 대한 음악적 평가는,

뛰어나다는 찬사와 상업적이다는 비판이 공존한다.

이런 카라얀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카라얀에 대해 나는 하나의 이해의 계기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스필버그 감독에 대한 친구의 비평 덕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영화에 해박했던 내 친구는 스필버그를 딱 두문장으로 정리했었다.


"스필버그가 화면을 넘기는 기술은 역대 최고야."라는 말과


"그런데 그렇게 화면을 잘 넘기다 보니까, 멈춰야 할 때 못 멈춰."


나는 내 친구의 이러한 분석이 스필버그를 잘 정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평가를 카라얀에게 적용하면,

카라얀이 '정확히' 설명된다.


"화면을 기막히게 잘 넘긴다."는 말은, 영화를 재미있게 만든다는 뜻이다.

우리는 스필버그의 영화를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티, 죠스, 인디아나 죤스, 그리고 쥐라기 공원까지, (내가 구세대여서 그 이후를 알지 못한다,)

박진감 넘치는 스릴과 액션은 숨 돌릴 틈을 주지 않는다.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 주인공이,

천막 위로 떨어져 목숨을 건지고

튕겨져 나와 지나가는 동료가 모는 차에 떨어져

탈출에 성공하는 식이다.


그러면,

"멈춰야 할 곳에서 못 멈춘다."는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오락영화들로 흥행 불패를 이어가던 스필버그 감독이,

진지한 영화에 도전하는데, 그 작품이 바로 '칼라 퍼플'이었다.


흑인 노에의 이야기를 다룬 가볍지 않은 주제였다.

오스카 수상을 영화의 성공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스필버그는 이 영화로 단 하나의 오스카도 받지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해 내 친구가 위와 같이 말했던 것이다.

"너무 잘 넘기니까, 멈춰야 할 지점에서 못 멈췄던 거야."

그 이후 7년이 지나서야 스필버그는 '쉰들러 리스트'로 오스카를 받았다.


자, 이제 이야기를 카라얀에게 옮겨보자.

카라얀의 베를린 필의 연주는 흠잡을 때 없는 보증수표다.

어떤 음반을 들어도 소위 '멋있다'.


완벽한 오케스트레이션과(쥴리어드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윤모 상병으로부터 내가 군 시절 확인받은 사안이다)

관악이거나 현악이거나 어느 것 하나 튀지 않는다.

더군다나, 스필버그의 블록버스터처럼 웅장하고 장면 장면이 유연하게 넘어간다.

클라이맥스가 살아있고, 드라마틱한 호소력도 남다르다.

따라서 대중들이 처음으로 클래식을 접하기엔 안성맞춤이다.

나 또한 제일 처음 들었던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은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었다.

그러나 거기 까지다.

아름답고 완벽한 음악,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

마치 완벽하게 아름다운 모델 하우스 같은 느낌의 음악인 것이다.


카라얀의 합창에 익숙한 내가 푸르트 벵글러가 지휘한 합창을 들었을 때 나의 반응은 '이게 뭐야?'였다.

1악장의 시작에서 '머뭇머뭇' 박자를 맞추는 흐름이 이상했다.

철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베토벤의 음악을 이해하는 것은, 토널 리티(Tonality, 조성)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베토벤의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음악적인 조성이나 색조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환경까지 연장시킨다.


나는 이 견해를 단순히 음악적인 '조성'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성'이라고 이해했다.

달리 말하면, 베토벤의 음악은 하나의 '건축물' 같다고 할까?

벽돌을 하나씩 하나씩 쌓아 올려가는 느낌이다.

그런데, 카라얀은 멋지게 차려입고 멋있게 건물을 지어 올리는 모습이었다면,

푸르트벵글러는 답답하게 벽돌을 한 장씩 쌓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참아가던 푸르트뱅글러의 연주가

2악장의 서정적인 부분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카라얀의 연주에서 듣지 못했던 다른 색깔의 낭만성을 느꼈다.


카라얀의 작업은 뛰어난 작업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시작으로도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그를 겪은 후엔(?) 한 번쯤 꼭 떠나보아야 하는 것이 또 '카라얀'이다.

스필버그의 쥐라기 공원만으론 우리가 무언가 허전함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p.s. 1.


카라얀의 완벽한 연주는 분명 평가받아야 하는 부분이다.

그는 토스카니니나 호로비츠 못지않게 까다로운 철저한 자기 관리로 유명했다.

아침에 먹는 음식의 칼로리까지 일정했으며 똑같은 시간에 요가를 했다.

카페에선 앉는 자리가 따로 정해져 있었다.

아직까지 그 카페에 카라얀의 자리는 비워두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카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소프라노 조수미가 생전에 카라얀을 기억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음악을 향한 열정의 소유자"라고 말한 것처럼,

그는 의심할바 없는 뛰어난 마에스트로였다.


기술발전 덕택으로,

우리는 조수미와 카라얀의 첫 만남을 유튜브로 언제든 볼 수 있다.

옆에 앉아있는 풋풋한 새내기가 바로 체칠리아 바르톨리다.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p.s. 2. 베토벤 합창을 듣는 슈퍼마켓 소년


내가 베토벤을 처음 들은 것이 중 3 때였다.

대학을 다니던 시절, 동네 슈퍼마켓에 들렀는데

계산대 책상 카세트에서 합창이 나오고 있었다.

자리를 비우신 어른들을 대신해 가게를 지키던 소년에게 물었다.


"너 이곡이 뭔 줄 알아?"


소년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합창이요"


그리곤 덧붙였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이에요"


난 바보같이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듯했고,

그 순간에 알았다.


'클래식은 귀족의 음악이 아니라,

누구나 사랑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음악이다.'


그 슈퍼마켓 소년 덕분에,

그 이후로, 나는 어디 가서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거드름 피우지 않는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클래식을 권한다.

평론가 김갑수 선생처럼 말이다.


p.s. 3.

수미 조 그리고 카라얀의 만남

https://www.youtube.com/watch?v=nuJIrBNN6zc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바흐와 윌리엄 크리스티, 하느님께서 칭찬하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