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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암스테르담에 가지 않았다
뒤 프레와 바렌보임, 바렌보임을 욕하지 말자...
백남준은 암스테르담에 가지 않았다 - 열두 번째 이야기
by
위대한 일상을 그리는 시지프
Jan 11. 2019
스위스의 산악 마을 체르마트를 가기 위해 안데르마트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안데르마트 역 앞에 있는 체디 호텔을 잠시 구경 갔었다.
많은 호텔을 보았지만, 그 호텔만큼 사람 기를 죽이는 곳도 없었다.
6미터는 족히 넘을 것 같은 높은 로비 천정과 짙은 갈색의 내부 디자인은
안데르마트 산골짜기 안에 웅장하게 자리한 호텔답게 거만해 보였다.
더욱 놀란 것은 로비에서 한창 세일즈 중이었던 공연 포스터였는데,
연주자가 랑랑(Lang Lang)이었다.
그리고 다른 연주자 중 낯익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미카엘 바렌보임(Michael Barenboim)
한창 세일즈 중인 직원에게 눈짓으로 맞냐고 물었더니,
웃으며 맞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내 질문은 그 유명한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의 인척이냐고 물은 것이었고,
직원은 맞다고 답했던 것이다.
바렌보임의 아들 미카엘 바렌보임이 바이올린 주자였던 것이다.
바로 떠나야 했기에 공연을 보지 못해서 아쉽다는 말을 전하며
호텔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이 사연 많은 마에스트로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자크린 뒤 프레 & 다니엘 바렌보임 (
Jacqueline du Pré, 1967-1987 & Daniel Barenboim, 1942- )
바렌보임을 말하자면 쟈크린 뒤프레를 말하지 않을 수 없고,
뒤프레를 말하자면 바렌보임이 나온다.
그렇게 그 둘을 이야기하다 보면,
불치의 병이 걸린 아내를 두고 바람난 놈이라는,
바렌보임을 향한 욕과 함께 결론이 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정말 그렇게 바렌보임이 나쁜 것일까?라고 되묻게 되었다.
유학 초창기였다.
돈을 아껴야 해서, 양파를 사려면 멀리 돌아서 가야 했다. 어떤 슈퍼마켓 한 곳이 더 쌌기 때문이다.
이 물건 저물건, 어디가 얼마나 더 싼 지 고민을 해야 했다.
그러다가 문득
"정명훈 선생이 양파값으로 고민을 하실까?"란 생각이 뜬금없는 들었다.
(왜 갑자기 정명훈 선생이 생각이 낫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언젠가, 파리에 정명훈 선생의 연습실엔 딱 피아노만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 때문이었던 것 같다.
풍문이고, 근거 없는 뜬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역시 대가에겐, 딱 음악 하나뿐이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했던 대목이었다.)
돈을 아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게 시간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던 나 자신을 본 것이다.
석사 과정 중이었다.
지도 교수께서 주신 텍스트에 이런 말이 있었다.
"예술가의 유일한 고민은 예술이어야 한다."
나는 그때부터, 작업 외에 쓸데없는 고민은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노력이든 노력하지 않았든 내게 오는 위안조차도, 작업에서 오는 위안 외에는 갖지 않으려 노력했다.
전자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민들이 찾아와서 잘 되지 않았고,
후자만큼은 다른 모든 위안들을 포기하면 되는 것이었기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다만, 조금 외로워질 뿐이었지만, 음악이 있어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바렌보임은 창창한 음악가였다.
뒤 프레도 마찬가지로 창창한 음악가였다.
그들은 이미 젊은 나이에 정상에 있었다.
타고난 재능도 있었고, 또 노력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았을 것이다. 어디로 얼마나 가야 하는지..
그러다 한 명이 쓰러졌다.
나머지 한 명이 옆을 지키려고 할 때, 그 쓰러진 사람은 뭐라고 할까?
뒤 프레는 자신이 음악을 사랑한 만큼, 바렌보임에게 떠나라고 했을 것 같다.
또 뒤 프레는 바렌보임을 사랑한 만큼, 또다시 바렌보임에게 떠나라고 했을 것 같다.
그렇게 사랑한 음악이 얼마나 이루기 힘든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어떻게 곁을 지켜달라고 잡겠는가?
뒤 프레가 어중간한 수준의 연주자였다면, 최고의 정점을 모르는 음악가였다면,
바렌보임을 잡았을 것이다. 남아달라고 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잡는 달콤함이 더 컸던 음악가라면, 뒤 프레는 바렌보임을 원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바렌보임을 사랑했지만, -그녀는 조국도 버렸고, 종교도 바꾸었다.-
그렇게 사랑했기 때문에 보내지 않았을까...
수많은 뒤 프레 팬들의 원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러나 난,
움직일 수 없는 병에 걸렸던 뒤프레에게,
바렌보임의 음악만이 오히려 위안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감히 한다.
그리고 행여, 뒤 프레에겐 위안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적어도 인류에겐,
바렌보임이 만들어낸 음악들과
또 그의 죄책감 때문인지 모르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문제에 대한 그의 지적인 행보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팔레스타인의 청년들과 이스라엘 청년들을 하나의 오케스트라로 만드는
그의 행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한번 감사하고 싶다.
p.s. 1.
출처를 알 수 없는 전언에 의하면,
뒤 프레가 바렌보임에게 오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p.s. 2.
난 사실 어떤 연주가 좋은 연주인지 알지 못한다.
난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다.
그래서, 뒤 프레가 왜 그렇게 대단한지 사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늘 음악을 더 알고 싶을 때의 가장 손쉬운 방법은,
그냥 '많이 듣는 것'인 것 같다.
아래 링크한 1965년도의 연주를 주의 깊게 다시 들어보았다.
1965년의 연주이니 53년이 지난 연주다. 반세기가 지난 것이다.
언젠가 토스카니니와 동시대를 살았던 토스카니니의 한 지인이,
토스카니니의 실재 연주와 음반이 너무나 차이가 난다는 말한 대목을 읽은 기억이 났다.
현장에서 받은 느낌이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뒤 프레의 연주를 들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래된 녹음인데, 참 세월이 아무것도, 또 뒤처졌던 기술이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구나.
첼로라는 악기여서 그런가?
아직 잘 모르겠다.
아직도 시공을 초월한 절절함이 느껴진다.
그녀 나이 고작 스물이었다.
p.s. 3.
화려한 시절, 보기만 해도 너무나 아름다운 두 쌍이다.
신념에 찬 마에스트로와 폭발하는 요정.
아마도 신께서 질투하셨나 보다...
https://www.youtube.com/watch?v=OPhkZW_jw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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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첼로
마에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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