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를 처음으로 관람했다.
현대 미술의 최전선, 가장 핫(hot)한 작품들로
'시류'를 읽을 수 있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
요즘같은 5G의 시대는 스마트 폰으로 '촉발'된
대중들 간의 '사이버 스페이스'가 너무 빨라서,
오히려 '비엔날레'와 같은 행사가 '현실'을 따라가는데 '허겁지겁'인 반면,
당시엔, 비엔날레 같은 무대에서 '그 시대'를 읽을 수 있었다.
국제적 행사인만큼 내로라하는 기라성 같은 거장들의 작품들이 즐비했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중국 작가'들의 작품들과 그 '기세'였다.
국제 미술 시장의 '블루칩'으로 떠오르던
수많은 '중국 스타 작가'들의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비엔날레를 뒤덮은 중국 작가들의'힘'이 내게 준 인상은,
단순히 한 작가 '개인'이 뿜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시를 모두 돌아보고 내가 내렸던 결론은,
당시 '중국 작가'들의 파워의 '원천'은,
'중국 작가들의 창의력'이 아니라,
'전대미문의 변화'를 겪고 있던
당시 '중국 사회 자체가 그 힘의 진원'이라는 것이았다.
중국 작가들이 내놓은 작업들의 힘의 세기가 그 차원' 이 달랐던 것은 ,
무엇보다 당시 중국 사회가 겪고 있던 성장과 부작용,
그 변화의 '세기'와 '범위'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당시의 중국은 파리 정도 크기의 도시가 한 달에 하나씩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한 사진작가의 판다 사진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마약에 중독된 판다가 스스로 팔뚝을 고무줄로 묶고 주사를 놓고 있었다.
'생각의 차원' 이 다른 것인데,
이런 '창작'의 컨택스트는 '현실'이 주는 '스파크'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중국 출신 작가들의 작품이 더욱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동국권 국가들의 전시장을 돌아본 뒤 더 강해졌다.
당시 체코 폴란드 등 동구권의 국가들은 '미니멀 회화'들을 걸어놓으며,
서유럽의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던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따라가고 있었다.
소위 '셔유럽의 늙은 모더니즘의 황혼'이었던 것이다
.
그렇게 1999년 첫 비엔날레 관람 이후 내가 얻은 결론은,
그 사회가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가에 따라,
그 사회와 그 시대를 살아가를 작가들의 작품에
적잖이 영향을 받는다는 머무나 뻔한 사실이었다.
최근 오징어 게임의 전 세계적인 주목 역시
역량 있는 작가와 제작진, 배우들의 공이 크다.
그러나 그보다 한 발 앞서, 오징어 게임이 그려내고 있는 현실이,
다소 '과장'이 있다고 해도, 엄연히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현실'이라는 점,
적어도 '한국 사회'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겪고있는 경험의 '편린'이라는 점,
그래서 오징어 게임의 대성공 울 보며 가슴 한편이 허전했다.
그리고 역시나,
'생존'을 위해 서로를 죽이는, 극 중에 등장한 '놀이'들에 열광하는 세계인들을 보며,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1999년 비엔날레에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국 작가 '이불'의 작업이었다.
화려한 장신구로 장식된 날 생선들이 비닐에 담겨 설치된 작품이었다.
족히 몇 미터는 될 거대한 벽면을 가득 채운 '화려한' 생선들이 썩어가고 있었다.
썩어가는 그 냄새가, 악취가 진동하는 그 현장이,
겉모양만 번지르르하고 그 속은 썩어가던 당시 한 사회의 모습은 아닐지,
어쩌면 썩어있는 내 속은 아닐지, '많은 생각'을 들게 한 '설치작업'이었다.
작가 이불 의 '독한' 외침이 썩은 생선 냄새를 타고 울려 퍼졌다.
역시나 그 '독한 외침'의 뒤에는 '작가'가 겪어내야 했던,
'독한 한국 사회'의 억압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불- 시작, 사진 출처 ; https://brunch.co.kr/@imsense/60 ,이불 작업에 대한 좋은 글을 만날수 있다.)
좋은 작품을 만나기 위해 이렇게 '독한 현실'의 고난을 '늘' 통과해야 하는 걸까..
영광의 그늘, 위대한 작품의 영광의 그늘은 참 잔인하다.
하여,
창작자들에게, 예술가들에게 경의를...
Will it change the #re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