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띄우는 편지,
- 나의 스승, 나의 사장님,
최호근 論
나는 인생에서 지금까지 많은 스승들을 만났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분은 중학교 2학년 때 만난 동네 서점, 장미 서점 아저씨였고,
다른 한 분은 지금 이야기하려는 나의 사장님이다.
장미 서점 아저씨는 어린 내게
“춤추는 자는 사라지고 그 춤만 남게 하라”라는 문장이 담긴,
오쇼 라즈니쉬의 ‘마하무드라의 노래’라는 책을 선물로 주시며 말씀하셨었다.
“순수하니까,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난 그것이 행운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한동안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린 나에게 너무 큰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첫 번째 스승의 격려와 함께 시작된 나의 길에서,
내가 만난 두 번째 스승이 바로 대학로 사장님이었다.
그는 내게 처음으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었다.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
자연이 무엇인지, 꽃이 무엇인지, 아름다운 음악은 무엇인지,
그 아름다움을 가능케 하는 생명이란 무엇인지.
그 아름다움과 생명을 위한 다소 불편한 삶이란 무엇인지,
다른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던 것을 이야기해주고 또 보여주었다.
만남
“너 지금 뭐하니”
“바람을 맞는 중이야”
언덕 위에서 양팔을 벌린 채 몸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는 아이에게 누이가 던진 질문이었고,
아이의 답이었다고 한다.
사장님의 어린 시절이었다.
강원도 산골에서 자란 소년이
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바람을 느끼는 것을 보고,
사장님의 누이는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나’라고 고민했다 한다.
그렇게 자연과 생명에 예민했던 아이는
전공과는 상관없는 연극의 길을 걷고,
또 그 길을 떠나 인테리어를 하고,
사람들이 버려두던 한옥을 고치고 다듬어서,
작은 레스토랑을 인사동에 차렸다.
인사동이 자리를 잡아가자, 대학로에도 가게를 내게 되었는데,
나는 그때, 거기서 그를 만났다.
“요상하게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야.”
릴리와 볼가를 알게 해 준 박상병의 말이었다.
박상병은 내가 군대 병원에서 만난 선임이었다.
그는 무척 해박했다.
영화 ‘프렌치 키스’에서, 맥 라이언이 기차 안에서 치즈를 먹고 배탈이 나서,
“락토스가 미워”라고 소리치는 장면을 이야기하며,
유제품을 분해하는 효소 락토스를 이야기한 것이라고 설명해주는,
무엇을 물어도 모르는 것이 없는 상사였다.
오토바이로 전국 일주를 했던 그가,
지나가던 말로 해준 곳이 인사동의 산타페라는 카페였고,
아주 흥미로운 라틴과 샹송, 그리고 클래식이 흐르는 특별한 곳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해 겨울,
군을 제대한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산타페를 찾아갔다.
인사동 산타페, 그리고 볼가.
아는 사람이 아니면 못 찾을 곳이었다.
인사동 골목 안에서 또 골목을 들어가면
한옥을 마치 미국의 사막 산타페에 가져다 놓은 듯한 공간이 나왔다.
황토색 흙벽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하늘색 창틀은, 산타페의 색이었다.
대학에서 색채학을 공부한 사람은 절대 쓸 수 없는,
그런 색 분배였다.
그 벽을 지나 창틀을 안으로 각종 앤틱들이 가득한 공간이 보였다.
나중에 사장님은 다른 한 곳의 인테리어를 하시면서도 같은 패턴을 쓰셨다.
황토색 벽에 더 진한 톤의 갈색 창틀을 칠해서 인테리어가 망해가던 집을
벽을 산타페나 그리스 식으로 둥글게 돌리고,
창틀에 밝은 하늘색을 다시 써서
집 자체를 살려놓으신 적도 있었다.
2층 건물이었던 그곳은 하늘과 황토색 건물이 닿아있고,
황토색 벽에 다시 하늘색 창으로 하늘을 내어놓은 듯한 시원함을 주었다.
이런 사례는 많았다.
수원 시내 시가지의 한 로터리 2층 건물은
전면을 유리로 하고 그 테두리를 빨간색 틀로 둘러 버렸다.
나는 말했었다.
“우중충했던 로터리가 밝아져 버렸어요”
나만의 느낌이 아니었다.
전남에 만들어진 ‘판타지’를 공사할 때는,
엄마 손을 잡고 지나가던 작은 꼬마 아이가 말했다.
“엄마 하늘나라 같아요”
아이는 하늘나라를 본 적이 없었겠지만,
새하얀 벽면에, 자그마한 빨간 창이 있는 것을 보고,
마치 하늘 구름 위에 있는 집을 상상했던 거였다.
아메리카 사막 한편을 지난듯한
산타페의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갈색 톤의 한옥 내부에
흰 회벽이 칠해져 있고,
체코의 국민화가 무차의 포스터나 작은 엔틱과 콘솔들이 한편씩 자리 잡고 있으며,
콘솔 위엔 우아한 스탠드가 올라가 있었다.
입구 오른쪽엔 계산대라고 하기엔 조금 과한 큰 책상이 놓여있고,
마치 미국 마피아영화에나 나올듯한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아저씨가 앉아있는데,
그분의 모습은 , 재즈가 흐르고 있어 그렇게 느껴졌는지 모르지만,
루이 암스트롱과 무척 닮은 분이었고,
목소리는 루이 암스트롱 보다 더 허스키한 분이었다.
그분은 바로 산타페의 사장님이셨고, 나의 사장님의 형님이셨다.
마치 보스처럼 앉아 계셨고, 그 옆엔 아르바이트 학생이 서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자리를 권하는 아르바이트 생에게,
나는 일자리를 구한다고 말했고,
그 아르바이트 생은, 짐짓, 이곳에 일하는 자부심과 거드름이 조금 섞인 말투로
“지금은 일자리가 모두 차있습니다”
라고 정중히 답했다.
마피아 영화의 한 컷처럼, 산타페 사장님은 아무 말 없이 이 장면을 지켜보고 게셨고,
나는 아르바이트 생의 설명을 듣고,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돌아섰다.
아쉬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작은 안마당을 지나 나오던 찰나,
꼭 영화처럼,
“저기요 잠시만요.”라고 그 아르바이트 생이 나를 불러 돌려세웠다.
나는 부르는 소리에 이끌려 다시 가게로 들어갔고,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던, 루이 암스트롱을 닮은 사장님은
“저기 가게를 하나 냈는데,
거기 한번 가봐,”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루이 암스트롱 같은 허스키 보이스였다.
나중에 일을 하며 종종 전화 통화를 할땐 정말 더 루이 암스트롱 같으셨고,
산타페에서 매니저로 있던 H형은,
“담배 많이 피운 신 날은 더 허스키해지셔”라고 웃으며 귀띔을 해주기도 했다.
“볼가 어딘지 가르쳐 줘라”
사장님의 명령에 조금은 거드름기가 빠진 아르바이트 생은
가게를 나와 , 인사동길을 가리키며,
“저길로 내려가셔서 왼쪽으로 꺾어서 올라가시다가
다시 종로 갤러리 쪽으로 쭉 들어가세요,
그러면 거기에 ‘볼가’라고 작은 간판이 보이실 거예요”라고 일러 주었다.
아르바이트 생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일러준 데로 나는 인사동 길을 나와서 길을 꺾어 안국동 쪽으로 오르다가
종로 갤러리 간판을 보고 작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볼가(Volga)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지금의 인사동은 인산인해를 이루는 거리가 되어
모든 것이 변했겠지만,
그때는 잘 포장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외진 골목이었다.
골목이 끝나는 지점, 이런저런 식당들을 지나,
손바닥만 한 공터와 오른쪽에 3층 정도 되는 새 건물 앞에는
작은 한옥이 쓰러질 듯 앉아있어고,
작은 벽엔 담쟁이 가지들이 덮고 있었다.
겨울이 된 화단에는 하얀색 나뭇가지들이 촘촘히 꽂혀 있었고,
잔잔한 별 전구들이 눈이 내린 듯 빛나고 있었다.
바로 볼가였다.
그 작은 화단은 사계절이 아름다웠다.
봄과 여름엔 꽃으로 가을엔 낙엽으로
그리고 겨울엔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나중에 알았지만,
한 여름 낯 그 골목을 지나던 C 형은,
평일 낮에 햇살을 쬐며 화단에 앉아 양말을 꿰매던 중년 남자를 보았다고 한다.
그 옆엔 커피색 푸들이 꼬리를 흔들고 있었고,
하얀색 더 작은 푸들은 쏜살같이 지나다니며 무턱대고 짖어 대고 있었으리라..
물끄러미 바라보던 커피색 푸들은 제시,
옆에 앉아 같이 햇살을 쬐고 있었을 강아지는 미켈,
그리고 방정맞게 뛰어다니던 녀석은 로라였다..
로라는 어릴 때 머리를 조금 다친 후로 조금 행동이 이상했지만,
그래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아이였다.
평일 대낮에, 꽃 화단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십중팔구 실업자일 텐데,
그렇게 하릴없어 보이는 사람이 열심히 양말을 꿰매는 모습이.
어릴 적부터 치열하게 살아온 C형의 눈에는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나중에 저녁에 한번 들러요”
양말을 꿰매던 그 중년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의 사장님이 볼가의 사장님으로 지내시던 시절이었다.
사실, 사장님이 처음으로 인사동에 문을 연 가게는 볼가가 아니라
‘장마’였다고 한다.
‘왜 장마라고 지으셨어요?”
“비가 무척 많이 왔지..
그때가 그냥 장마철이었어”
정말 성의 없는 답변이셨다.
그런데, 사장님은 원래 그랬다.
“그때 그냥 비가 왔어, 그게 좋았지..”
이름을 잘 지어야 출세한다는 동양 속담처럼,
장마는 이름답게, 열자마자 망했다.
그런데 사장님의 말을 들어보면 그리 ‘낙담’했던 기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50대에 남자 주머니에 500만 원 밖에 없다는 게 말이 되니?
근데 난 뭐, 그냥 하나도 안 불안했어.”
무덤덤하게 말씀하셨지만,
장마가 문을 닫고 다시 준비하신 볼가를 보면,
코너에 몰릴 데로 몰려 계시던 사장님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회벽을 칠할 도구가 모자라서 숟가락을 회벽을 바른 곳은 거칠었고,
전등 살 돈이 없어서, 공장용 전등에 하늘색, 밤색을 칠하고 꽃을 그려 넣었다.
그런데,
그랬기에 볼가는 볼가만의 삶이 묻어 있었다.
지금도 생생한,
그러나 지금은 같은 모습이 아닐 그 골목을 들어 볼가 앞에 선 나는,
공중전화 옆을 지나,
작은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또 다른 더 젊은 사장님인 D형이 있었다.
간단히 인사를 하고
용무를 소개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엔 딱 한 문장뿐이었다.
“여기서 일하고 싶다”
정말 두터운 음악이 흐르는,
산타페보다 훨씬 작은 손바닥 만한 가게였다.
D형은 사장님과는 친형제 같은 사이였다.
볼가와 너무 잘 어울리는 풍채에
반짝반짝이는 하얀 피부에 건장한 D형은
지금 생각해도, ‘착한 말투’로
“음.. 산타페에서 이리로 가라고 했다고요?”라고 운을 뗀 뒤
“잠시만요”하며 수화기를 집어 들어 산타페로 전화했다.
“형이 보내셨어요? 아. 그래요? 근데 여긴 아니고, 음 알았어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간절해 보이도록,
안 그래도 작은 의자와 작은 바 앞에서 최대한 몸을 움츠린 채 앉아있었다.
‘재발 붙여주세요.’라는 외침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답은 ‘예’도 아니고’ 아니요’도 아니었다.
“아, 여기가 아니고요, 우리 형이 대학로에 가게를 하나 냈어요.
거기를 가봐야 하는데, 오늘은 늦었으니, 여기로 연락해서 가보도록 해요”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난 다시 ‘권한’이 없었던 작은 사장님인 D형에게
최대한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결국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결과가 아쉬워서
다시 한번 가게를 천천히 돌아보고 나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중에 술자리에서 D형은 말했다,
“키가 가게 천정에 닿을 정도로 큰 놈이 들어와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하고 나가더라, 허허허”
"난 그만큼 일을 하고 싶었던 거야"라고 항변하며,
“그래서 형은, 날 안 뽑으려고 그랬다며?”라고 늘 D형을 놀리곤 했다.
그러나 끝일 거라 생각했던 볼가와 인연은 그날이 시작일 뿐이었다.
난 릴리에 주로 있었지만, 늘 볼가 일손이 필요할 땐 내 몫이었고,
연말은 늘 볼가였다.
그렇게, 볼가는 내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
릴리 마를렌(Lili Marlene)
D형, 그러니까 볼가 사장님이 가르쳐준 릴리에 간 것은
1995년 12월 29일 ,
재대를 한 해에 겨울이었고, 새 해를 이틀 앞둔 날 아침 10시였다.
추운 겨울이었다.
혜화역에서 내려 대왕 분식을 끼고,
설명을 들은 대로 서울대학 담벼락을 따라 들어가니,
손바닥 만한 작은 화단에
또다시 하얀색 나뭇가지들이 촘촘히 서있고,
작은 전구들이 뿌려져 있었다.
하얀 벽에 초록지붕 그리고 빨간 창과 빨간 대문을 한 작은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릴리 마를렌’이었다.
릴리 마를렌은,
사장님이 좋아하셨던 마를렌 디트리히가 부른 노래 ‘릴리 마를렌’에서 따온 것이다.
세기를 풍미한 마를렌 디트리히를 그때 처음 알았다.
디트리히는 파리의 아브뉴 몽텐가에서 말년을 보냈다.
히틀러에게 청혼을 받았다고도 한다.
릴리 마를렌이라는 백포도주도 있다.
그 포도주 라벨은
사장님 인테리어에 자주 쓰시는 체코 작가 무하의 작품이었다.
릴리 마를렌 와인의 아름다운 라벨이 카페 릴리 마를렌의 간판이었다.
빨간 대문의 카페
작은 담장을 지나 여닫이가 아닌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까무잡잡한 피부에 키가 작고, 둥근 뿔테 안경을 쓴 중년의 남자가
황토색 골댄 바지에 빨간 양말을 신고,
같은 코르덴면의 남방 위에 갈색 엔틱 스타일의 조끼를 입은 체
가게를 청소하고 있었다.
박상병의 말해준 그대로였다.
“요상하게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야.”
1995년 12월 말, 군을 제대한 내가,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는 순간이었다.
“내 가게처럼 일해줬으면 좋겠어요.”
중앙의 원탁, 5번 테이블에 앉아서
사장님이 나에게 말씀하신 유일한 조건이었다.
커피를 국그릇만 한 큰 찻잔에 한강처럼 담아주셔서 놀랬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산타페도 볼가도 릴리도
늘 커피는 큰 잔에 가득 담아 주는 것이 관례 같았다.
맥주는 정확히 33cc가 담기는 와인잔처럼 생긴 멕시코산 맥주잔에 담아 나갔고,
생백주가 아닌 병맥주만 팔았으며 최소 가격은 3천 원이었다.
500cc 생맥주가 600원 1000 원하던 시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무척 비싼 가격이었다.
“생맥주 왜 안 하세요?”라고 여쭈어보자
사장님은 말하셨다
“어중이떠중이 다 오는 꼴 보기 싫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서비스 정신이지만,
사장님은 사람이 몰려들고 번잡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소박했지만, 지적이었고,
그 가치를 알아주는 손님을 원하고 계셨다.
파바로티의 카루소가 유명세를 타기 전에 먼저 틀어진 곳이 볼가였다
방송국 pd가 음반을 빌리기 위해 찾아오기도 했었다.
우리는 팝송은 틀지 않았다.
가요도 거의 틀지 않았다. 세월의 세례를 받은 몇몇 가요만 예외였다.
좋은 음악은 우리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무척 거만했다.
산타페에서 처음 보았던 그 아르바이트 청년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음악소리가 크다고 줄여달라고 하면,
우리는 소리를 더 키웠고,
볼가에서 대낮에 맥주를 마시며 사장님에게
“예! 음악소리 너무 크다 좀 줄여라!”라고 소리친 여자 손님은
사장님께서 바에 앉아 다듬으시던 콩나물 더미를 뒤집어쓰고 쫓겨나야 했다.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다며,
“볼가강이 어떤 의미인지 아십니까?”라며
사장님 앞에서 잘난 척을 하던 한 교수는
사장님의 반응이 불만족스럽자,
“당신 손바닥 만한 가게 하면서 너무 건방져!”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주방으로 들어가던 사장님은
“당신한텐 손바닥만 한 가게 일지 몰라도,
나에겐 우주보다 더 큰 가게예요!”라고 쏘아붙이시곤,
아르바이트 학생에게 ,
“손님 가신다. 잔 치워 드려라”라고 말하셨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리셨는지,
“진토닉 4000 받아라!”라고 덧붙이시자.
볼가강 타령을 하던 그 교수가 억울해하며 말하더란다.
“무슨 소리요! 저번엔 3500원이었소!”
그러자 사장님이 맞받아치기를,
“얘야 지난번에 500원 덜 받았다!
못 받은 것까지 같이 받아라!”
억울해하며 계산을 했을 그 교수의 얼굴도,
다듬던 콩나물 더미를 뒤집어썼을 그 여자 손님도 생각하면 안쓰럽지만
조용히 볼가와 릴리를 사랑하던 손님들에겐,
늘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만들어지곤 했다.
하루는,
아침에 가게문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차는 창가 자리에,
한 연인이 와서 두 손을 꼬옥 잡고 앉았더란다.
사장님은 노래를 하나 틀어주셨는데,
뜬금없이도,
그 노래는,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 거야’ 였다.
밀키스 데오토라키스, 아그네스 발챠, 돌체 폰테스. 세자리아 에보라.
로라 피기, 쥴리 런던, 페티 페이지,
기라성 같은 외국 음악들을 제치고.
그저 소소한 당신을 모르실 거야란 가사와 노래가,
햇살 아래서 서로를 마주 보던,
그 연인들에게 딱이었다는 이야기셨다.
나 같아도 참 사랑스러운 순간이었겠다.. 싶었다.
볼가와 릴리는 늘 꽃을 생화로 꼽았고,
화단도 정성껏 가꾸었다.
지금은 꽃과 화단이 인사동 일대나 대학로와 서울 곳곳에 흔하지만,
그 당시엔 그런 곳이 없었다.
원두커피를 그렇게 넉넉히 주는 곳도,
무엇보다 클래식과 칸소네 샹송들, 제3세계 음악들을 주로 들려주는 곳은 많지 않았다.
“여기 있는 건 좋은 음악들이야
그러니까 들어!”
갓 20대가 넘었을 아르바이트 하던 아이들에게 늘 사장님이 하셨던 말씀이었다.
나 역시도 그랬다.
프랑스로 유학을 와서 첫날밤 라디오를 켜니 에로스 라마조띠가 나왔다.
볼가와 릴리에서 닳도록 듣던 음악이었다.
늘 들었던 집시 킹은 텔레비전에 나오기도 했다.
쥴리에트 그레코, 에디트 피아프..
프랑스가 낯설지 않았다.
라디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들었던 나는
사장님께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사장님 여기는 큰 릴리나 볼가 같아요.
릴리와 볼가에서 듣던 음악이 똑같이 나와요."라고.
음악뿐이 아니었다. 인테리어도, 디자인도, 꽃도, 문화도,
1995년 만난 인사동과 대학로의 볼가와 릴리는 서울 안에 유럽이었다.
“어쩌면 저 아저씨는 서울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무슨 프로방스를 지나는 거 같니?”
가게에 자주 오시던 한 여자 손님이,
인사동에서 대학로로 자전거로 출퇴근하시던 사장님을 보고서 하신 말씀이었다.
이 이야기를 사장님께 전하며
“자전거 탈 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세요?”라고 물었다.
“여긴 프로방스다, 여긴 프로방스다 하면서 타지”라고 답하셨다.
그땐 자전거 도로 한복판에 가로수와 에어컨 환풍기가 가로막고 있던 시절이었다.
척박한 문화를 극도록 혐오했던 사장님은
그렇게 서울 안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놓고,
가게와 가게 사이를 오가며, 당신의 마음의 고향일 유럽과 아름다움 속에 살고 있는 거였다.
첫 번째 가르침, 다소 불편함
“왜 자꾸 그쪽으로 지나다니니?
그러면 꽃이 떨어지지 않니?”
가게 중앙에 놓여있던 5번 테이블과 그릇장 사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일을 하다 보면, 조금이라도 편한 쪽을 택하게 마련이다.
조금이라도 더 앉고,
조금이라도 덜 돌아가려고 몸이 요구하는 것, 다시 말해
더 편해지려는 마음이다.
릴리는 안쪽에는 계산대와 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왼쪽으론, 사장님 전용 테이블 격인 1번 테이블이 벽난로 옆에 있었다.
그 앞에 제일 많은 인원이 앉을 수 있는 6인용 2번 테이블이 있다.
2번 테이블은,
C형과 내가 가게를 끝나고 열띤 토론을 밤마다 주고받았던 자리였다.
우리는 늘 말로 싸웠고,
무형의 답을 찾아가는 지적 쾌감을 만끽하고, 훈련하던 시절이었다.
사장님과 동석한 술자리엔 늘 사장님이 당시 읽던 책이나, 주제로,
우리는 사장님께 듣고 다시 되묻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C형과의 2차는 그 대화들을 복기하거나 우리만의 주제를 두고 토론하던 자리였다.
그 어느 때보다 짜릿했던 순간들은, 새로운 인물들이 동석한 경우였다.
대게는 중구난방으로 말들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C형과 나는 주제의 줄기를 놓치지 않고 진행하고 있었고, 늘 둘만의 결론에 이르렀었다.
다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때는,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눈만 마주치며 건배를 했었다.
장난기 가득한 만족감에 눈꼬리와 입꼬리가 한없이 올라갔던 C형의 미소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큰 테이블이 2번 옆엔 4인용 3번 테이블과
다시 그 옆엔 빨간 창가 자리, 릴리에서 가장 예쁜 자리였던 4번 테이블이 있었다.
4번 테이블은 창가 자리인 데다가
꽃들이 만발한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어서 늘 원하는 손님이 많았다.
외국에서 살다온 한 여자 손님은,
중요한 날이라며 케이크를 들고 온날,
4번 테이블에 손님이 있는 것을 보자,
중앙 5번에서 그 손님이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앉기도 했다.
그렇게 바로 중앙에 둥근 원형의 5인용 테이블이 5번이다.
그리고 안쪽 공간과의 사이에 다시 4인용 6번이 있고,
가장 앙증맞은 2인용 원형 돌 테이블인 7번과,
안쪽 공간엔 8번 9번 10번 11번, 이렇게 네 개의 테이블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중앙 공간에 자리한 원형 5번 테이블을 사장님은 늘 한편으로 붙여 놓으셨고
그 옆엔 장식장과 바닥에 스피커와 스피커 위에 화병에 꽃이 있었다.
화병엔 늘 카라(Calla) 같은 길게 늘어지는 꽃에서부터, 장미, 국화들이 매주마다 생화로 꼽혔었다.
그런데 바쁘게 일하는 우리들은 안쪽 공간으로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5번 테이블과 장식장 사이를 살짝 띄워 놓고 그 사이로 날렵하게 지나다녔다.
쟁반에 음료나 식사를 받쳐 들고 다닐 수는 없는 폭이 었지만,
주문을 하러 갈 때나 또는 서빙을 끝내고 빈 쟁반을 든 채로는
지나다닐 수 있는 작은 길을 터놓은 것이었다.
꽃들이 떨어졌다.
몸에 닿고. 팔에 걸리다 보니. 꽃들이 매번 얻어맞은 것이다.
그때마다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얘들아, 저쪽으로 좀 지나 돌아서 가렴.
이러면 꽃들이 다 떨어지지 않니?
다소 불편함을 좀 감수해야 된다.
아름다움은 그래야 지켜지는 거야”
난 이 잔소리가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머릿속에 남았었다.
다소 불편함이라..
어떻게든 편해야 하고 더 편해지려 하는데 다소 불편함이라...
“요즘은 기차들을 다 창을 열 수 없게 해 놨잖니?
그러니 바람도 맞을 수 없고…”
늘 기차를 원통 유리로 막아놓은 것을 못내 아쉬워하셨던 사장님은
지방 여행만 다녀오시면 그런 이야기를 하시곤 하셨었다.
자연과 인간이 점점 더 그 사이가 갈라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두 번째 가르침, 생명. “워커에 꽃은 꽂아 보았어도, 그 꽃을 꺾어보진 않았어.”
사장님을 꽃을 무척 좋아하셨고, 무척 잘 가꾸셨었다.
대학로에 일한 지 며칠 되지 않았던 날 저녁,
조금 한가한 가게에서 꽃을 다듬으시던 사장님은,
“얘, 내가 여기 바닥을 온돌로 한 것은 너무 잘하지 않았니?”
나는 초창기여서, 말씀의 내용보다,
‘-니?’로 끝나는 여성스러운 표현에 더 깜짝 놀라던 시절이었다.
물론 나중엔 나도 아이들에게 “이게 뭐니?”라고 사장님 말투를 따라 하게 되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가게에 모든 일하는 아이들이 밖에 나가면
사장님 말투를 따라 하게 된다며 고충을 털어놓게도 했었다.
“형 죽겠어요. 자꾸 뭐했니? 뭐했니? 해서 친구에서 엄마까지 이상하게 봐요,”
사장님은 그렇게 우리들에게 영향력이 강한 존재셨다.
왜였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있던 그만의 삶이 있었고,
우리들에게 늘 무언가를 ‘진심으로’ 건네주려 하고 싶었던 그 ‘마음’이 보였기에..
가게에서 일하던 아이들에게도 또 누구보다 나에겐,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고, 또한 인생의 선배이며, 스승이었던 것이다.
사장님이 바닥을 온돌로 해서 난방을 해결하신 것을 자랑하신 이유는,
난방을 그렇게 해결해서 가스난로를 틀지 않아도 되어서 공기가 좋아졌고,
그래서 꽃들에게 더 좋은 환경이 되었기 때문에 무척 흡족하셨던 거였다.
그걸 자랑하고 싶으신 것이었다.
아름다움에, 당신의 공간에 흠뻑 빠진 모습은,
역시나 멋이 있었다.
나는 사장님의 그 당시 1996년의 모습, 50대의 카페 주인의 모습은
사장님이 계획한 모습이 아니었으므로,
지금의 사장님의 모습을 따라가선 절대 그 모습에 이를 수 없으니,
경계해야 한다고, 사장님에게 매료된 아이들에게 정색을 하며 ‘충고’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실상은 내가 가장 ‘매료’돼 있었고, 내가 제일 ‘광신도’였다.
그래서 늘 캐물었다.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오시게 되었으며,
어째서, 왜 이런 스타일의 인테리어를 하시며, 어떻게 이런 스타일을 획득하게 되셨는지..
산타페에서 볼가를 거쳐 릴리까지
나중에 나도 참여했던 수원의 산타페나.
사장님과 소원해져 연락 않고 지내선 신촌의 스타찌오네
그리고 남원의 판타지, 그리고 아쉽게도 일찍 마감된 대학로의 담징
그리고 가장 역작이었을 가회동의 자택까지,
실내 건축가 최호근의 궤적은
한옥을 개조하고 회벽을 되살린 뒤 서까래와 내부를 그대로 두고
애자와 전기 배선을 전통적으로 살리고 창틀과 문틀에 컬러로 포인트를 주고
공간을 분할하고, 격자창과 콘솔로 벽면을 처리하고,
앤틱과 전등, 수재 퀼트, 도자기 접시와 포스터로 장식하는 패턴이었다.
물론 앞서도 언급한 꽃들은 주기적으로 교체해주며,
작은 앤틱들은 옮겨지기도 하고 추가되기도 한다
체코 화가 무하의 포스터와 어울리는,
프랑스의 벨 에포크 시대의 아르누보 스타일의 장식이 주를 이루는
‘여성스러움’이 한껏 강조된 인테리어였다.
나는 늘 그 지점이 궁금했다. 어떻게 해서 이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그것을 늘 알아내고 싶은 마음에 어떻게든 사장님과의 술자리를 만들려고 했고,
만들어지기만 하면 귀를 바짝 추켜세우고 붙어 앉아있었다.
그런 사람이 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장님의 어떤 지인은 몰래 사장님이 말하는 것을 녹음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한번 듣고 흘리기엔 ‘곱씹어봐야 하는 대목’이 수시로 여럿 등장했었다.
그렇게 사장님의 과거와 과정을 꼬치꼬치 캐묻던 내게
어느 날, 소주에 약간은 취하신 듯한 사장님은,
안경 너머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며 이야기하셨다.
“그런데 있잖니,
내가 처음부터 이런 인테리어 했을 거 같아?
아니야,
나도 네 나이 때는, 벽을 싹 다 미제 박스로 붙이기도 하고,
그거 붙이려면 얼마나 힘든 줄 아니? 종일 붙들고 있어야 돼,
핼맷 깨서 전등 넣고, 워커에 꽃 꼽고 그랬어.”
그리곤 한마디 덧붙이셨다.
“근데 있잖아, 정민아,
난 워커에 꽃은 꽂아 봤어도,
그 꽃을 꺾어보진 않았어.”
꺾어보진 않았어,,
나는 그 대목을 듣고 순간 멍한 느낌이 들었었다.
머리를 망치로 한대 세게 맞은 것 같았던 순간이었다.
워커에 꽃은 꽃아 보았지만,
그 꽃은 꺾어보지 않았다…
바보같이 되물었던 기억도 난다
“어떻게요?”
아무렇지 않게 사장님이 말해주셨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워커 안에 물컵 넣고 꽃아 주었지.”
1996년의 일이었다.
92년도 대학에 들어가고,
포스트 모던의 광풍을 보았던 나는
예술을 위해 그 어떤 짓거리도 마다하지 않던 풍경을
대학과 기존 화단에서 지겹도록 보아왔던 나는,
미술이라는 것이 ‘독창성’을 위해 그 무엇도 죽일 수 있었던 세계를 보아왔던 나는,
워커에 꽃을 꽃아 보았지만, 그 꽃을 꺾어 보진 않았다는 사장님이 이야기가 충격이었다.
그러나,
사장님의 이야기를 들은것 만으로 내가 완전히 꺠달은 것은 아니었다.
재대 후 일을 시작하고,
복학을 한 뒤에도 난 가게에 자주 나갔고,
하루는 사장님께서, 4번 테이블 쪽 화단,
창틀 위쪽과 기와지붕 사이에,
덩굴들이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동으로 장식할 수 있는 구조물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셨다.
난 학교에 용접기와 재료가 있으므로,
학교에서 작업을 해서 가져가겠다고 말씀드리고는,
가로 1미터 20 정도 그리고 20센티정도 폭으로
꽃가지 덩굴들이 감고 지나갈 수 있는,
아르누보 형식의 조형물을 만들어서 가져갔다.
따로 운반 차량을 부를 정도는 아니었기에,
지하철로 가져갔는데, 크기가 크기인지라 무척 신경을 쓰며 옮겨야 했고,
가게에 도착해선 작은 의자와 화단에 설치된 어른 허리 높이 정도의 전등 기둥에 의지해서
창틀 위에 조형물을 설치하기로 했다.
그런데, 꽃가지들이 이미 많이 자란 터여서, 드릴로 벽에 구멍을 내고
나사를 박아 설치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구멍을 뚫고 조형물을 들어 올려 이리저리 맞추는 찰나,
어느 센가, 아래에서 내가 하는 일을 불안하게 지켜보시던 사장님은
다급하게 내 옆으로 올라오셔서는
꽃가지들을 손으로 걷어내시며 말씀하셨다.
“너는 이거 설치하게 더 급하구나,
나는 이 꽃들 다치는 게 더 급한데…”
나는 또 한 번 머리를 ‘텅~’하고 얻어맞은 듯했다.
술자리 그 대목이 다시 떠올랐다.
“워커에 꽃은 꽃았어도, 그 꽃을 꺾어보진 않았어…”라고 말씀하셨던..
단순한 멋진 말이 아니셨던 거였다…
난 사장님에게 혼난 적이 없었다.
이쁨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꾸지람을 하시는 분이 아니셨다.
술 마시고 못 일어나서 토요일에 가게문을 오후 16시에 열었던 날에도, 난 혼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 순간,
“넌 이거 설치하는 게 더 급하구나, 난 이 꽃들 죽는 게 더 급한데,”라고 하셨던 말씀은,
내가 가장 크게 혼난 순간이었다.
난 너무나 부끄러웠다.
생명이 사장님의 두 번째 키워드라며 그렇게 떠들어 대기만 했던,
머릿속으로만 이해했던 모습이 부끄러웠다.
사장님에게 꽃들은 그런 존재였고,
생명은 잘난척하기 위한 가치가 아니라, 삶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생명은 꽃만 이뻐하신 것이 아니었다.
“옆집에서 자꾸 따라 하고, 쓰레기를 우리 쪽으로 버려요”
나는 투덜데며, 사장님에게 옆 가게를 욕했다.
일을 막 시작한 초창기였고, 우리 가게 옆에는 우리보다 더 오래된
작은 재즈 카페가 있었다.
릴리가 들어서고 화단이 가꾸어지자,
옆집에서도 작은 창가에 화분 두서너 개를 놓으며, 소심하게 따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것이 얄미웠고,
더군다나 쓰레기를 릴리와의 경계선에 놓는 모습을 보고 미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사장님은 말씀하셨다.
“얘야! 그러면 안돼,”
“왜요?”
“같이 살아야 되는 거야?”
“?”
이해하지 못하는 내게 말씀하셨다.
“옆집을 죽이면 안 되는 거야,
같이 잘돼서, 거리가 살아야 되는 거야.
꽃 더 심으라고 해! 화분 더 갖다 놓으라고 해야 되는 거야.”
사장님은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다.
더 부지런히 가꾸고, 더 부지런히 일하라고, 아들뻘 되던 옆집 사장에게 이야기하셨다.
옆집 가게는 나중에 얼음을 빌리러 오기도 하고,
양주를 빌리러 오기도 할 정도로 친해졌으며,
작은 창가 화단엔 더 많은 화분들이 놓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골목에 식당들도 꽃을 놓기 시작했다.
칼국수집까지 가게 문 옆으로 기다란 화분을 놓았다.
예쁘지는 않았는데, 모두 일단 놓고 보았다.
대학로 대왕 분식 골목은 으슥한 골목이었지만,
점점 더 풍성해지고 있었다.
릴리 만이 아니었다.
골목 안쪽에 위치하기론 더 안쪽이었던 인사동 볼가를 가는 길도,
꽃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호박넝쿨이 있기도 하고 주먹만 한 장미나무를 심은 집들은
사장님의 독설을 피해 갈 수 없었지만,
“이게 이게 뭐니? 촌스럽게 ”
독설을 날리시던 사장님도 웃고 계셨다.
꽃들이 많아지고 모두 같이 가꾸는 것은 그냥 좋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드라마 이태원 클래스에서 죽은 골목을 살리는 장면을 보았었다.
주인공 박새로이가 단밤을 살리기 위해 골목의 다른 집들을 도와주는 장면이었다.
난 그 장면을 보며, 릴리가 떠올랐다.
백종원이 골목식당으로 골목을 살리던 모습,
20년 전 볼가가 있던, 릴리가 있던 골목의 모습이 그랬다.
카뮈는 “예술 없이는 살 수 없지만, 예술을 삶 위에 두지는 않았다”라고 말했었다.
아름다움을 위해 그 무슨 짓이던 하던 사람들은
결국 아름다움을 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아름다움이 숨을 쉴 수 있을 ‘생명’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미술 교육에선 ‘아름다움’을 말하지도 않았었다.
촌스러운 주제 취급했다.
소위 ‘모더니즘’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가던,
‘인문학의 세례’가 내려지던 그 시기에도,
‘아름다움은’을 말하는 것은, 구태의연한 ‘헛소리’였다.
그런데 거기에 ‘생명’이라는 이야기는, 더 ‘먼’ 이야기였다.
그래서 대학 4년 동안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한,
기존 교육과 소위 ‘예술계’의 껍질에 굳어져 있던 나를 부순 첫 문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왜 사장님이 디자인하고 가꾸던 공간들을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 첫 단추였다.
강물은 바다로 가게 마련이고,
내가 배운 것이 내속에 녹아 있게 되면 다시 나와서 다른 곳으로 전해지게 마련이다.
1999년 유학을 왔던 첫해,
나는 동기가 유학했던 체코에 가서 한 달을 머물렀었다.
미대 학생들끼리 한 공간에 나누어 살던 곳이었다.
개방된 서유럽은 모더니즘을 넘어 이미 후기 모더니즘으로 넘어가고 있었고,
공산권에서 갓 풀려나 자본주의를 맛보던 체코는 뒤늦게 모더니즘의 물결을 쫓아가고 있었다.
그 젊은 미대생들이 합숙하는 공간에서,
난 무언가 속이 비어있는 것을 느꼈다.
전위적인 예술들을 하고 앉아 있었지만,
다 엉터리로 보였다.
아이들이 순수한데, 오히려 다 거대 사조에 ‘획일화 ‘되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 교육이 얼마나 엉망인 줄 아니?
너네들, 전부 다 다른 너희들을 학교에 데려다 놓고,
다 똑같은 애들로 만들잖니?”
20대를 갓 지난 대학을 다니던 아르바이트 생들에게 사장님이
푸념 반, 절망 반으로 하셨던 말씀이었다.
더 심한 독설도 많았다.
“너네들은 성공 못할 거야
착하니까,
비비는 거(정말로 손바닥을 비비는 시늉을 하시며)
비비는 거 아부하는 거 못하니까?”
착한 조카들에게 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시며
소주잔을 털어 넣으셨었다.
그렇게 세상을 무척이나 한스러워하셨다.
한국사회에 계셨지만, 가게 밖의 한국사회를 감당하지 못하시기도 했다.
한 달여 채코의 젊은 예술가들의 합숙소에 지내던 나는
떠나오기 전, 작은 작업을 하나 남기고 왔다.
공동으로 쓰던 화장실,
하얀색 사각의 공간 안에
변기 주변으로 바닥과 벽이 맞닿는 곳에 잔디를 그리고 꽃을 그려 넣었다.
작은 일이던, 큰일이던 화장실에 볼일을 보러 앉은 순간
마치 들판에 꽃밭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들도록 말이다.
그렇게라도 전해주고 싶었다.
“순진한 체코 아이들아,
부자 나라라고 부러워하며 서유럽 쫓아가지 말아라,
너희들이 더 아름답다.
너희들 속의 생명을 죽이지 말아라.
예술이 별거니, 즐겁고 행복하면 되지… 아름답게 말이다.”
체코의 동기집에 잔디와 꽃을 그려 넣은 것은,
초록색 예쁜 문에 꽃이 그려져 있던 릴리의 화장실의 영향이 없다 말할 수 없다.
나중에 동기가 전해 주었다.
새로운 친구들이 와서 화장실에 갈 때마다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모두들 그렇게 좋아했다고..
세 번째, 그리고 전부의 가르침 – 아름다움
“예, 이거 너무 예쁘지 않니?”
50대가 넘은 중년의 남자 입에서
가장 자주 나오던 말이 이 말이었다.
‘아름답지 않니?”
멋있는 주제와 철학적 주제, 거창한 주제를 꿈꾸고 그리고 작업을 하던 나에게
아름다움이란 그 소박하고도 어려운 주제를 심어준 것이 그였다.
“아름다움? 그건 쉬운 문제가 아니야,
대단히 말하기 어려운 거야.”
파리에서 만난, 현대미술 컬렉터 H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이브 클라인에서 샤갈, 이우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명작들을 소유하고,
미대생인 나보다 현대미술과 회화에 더 해박했던 함선생님은
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작가를 찾고, 새로운 작품을 수집하며
아름다움을 찾았던 분이 함선생님이었다면,
대학로 사장님은 삶에서 끊임없이 아름다운을 발견하고 옳겨심는 사람이었다.
“도면이 어떻게 나오니!
거기 가야 생각이 나는데!”
정색을 하며 화를 내시는 모습이 억울함을 넘어서 있었다.
공사는 진척이 안되는데, 정확한 지침을 내려주지 않는다는 현장의 불만을
볼가의 D형이 에둘러 전하자,
그나마 사장님껜 편한 사람인 D형에게 모조리 퍼부어 대신 것이다.
실제로 사장님 공사엔 도면이 없었다.
현장에서 천장을 드러나거나 벽을 허물거나
그 상황을 보시고 이렇게 이렇게 어디를 정리하는 정도만 주셨고,
그다음에 정리가 된 다음 가서 말씀하셨다.
칼 라거펠트는 자신이 만든 옷을 모두 꿈에서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일어나서 책상에서 ‘크로키’를 남긴다.
그 크로키를 받아 들고 현실의 옷으로 가능하게 바꾸어 준 사람이 바로 버지니 비아르,
현 샤넬의 수장이었다.
천하의 라거펠트도 최소한의 도면일 크로키를 주었는데,
사장님은 도면도 크로키도 없었다.
한 번은 사장님이 맡으신 공사에 참여한 나도 같은 상황을 겪었다.
“그냥 나무 느낌으로”
유일한 지침이었다.
수원 산타페 공사를 하던 당시,
테이블 사이의 파티션을 나누는데,
철사보다는 두껍고, 철근이 아닌 얇은 철봉의 재질을 이용해서
파티션을 나누라고 일거리를 주신 것이다.
아르바이트 돈벌이로 주신 셈이셨지만,
내겐 학교 과제보다 힘들었다.
친한 몇몇을 시다(보조 작업자)로 쓰며 나는 골머리를 앓았다.
나무 느낌이라.
나무면 나무지 나무 느낌은 또 뭔가
나는 전화해서 여쭈었다.
“나무처럼, 나뭇가지처럼 잎도 달고 그렇게 나무처럼 만들까요?”
“그럼 그냥 나무를 갖다 놓으면 되지, 왜 만드니?”
답을 찾는 제자에게 스승은 이렇게 쏘아붙이셨다.
그리곤 다시 똑같이 덧붙이셨다.
“나무 느낌으로.”
뚜뚜뚜….
끊어진 전화음 너머로 아득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고민이 될 때 답은 하나다.
‘애라 모르겠다.’
될 데로 되라는 아니었다.
원형 철봉을 군데군데 가열해서 굴곡을 주도록 지시하고,
나무 느낌으로 이리저리 붙여 올린 후에,
현장에 가져가서
나무 느낌으로 철봉들을 겹치기도 하고 마주 서게도 하며,
지정하신 부분에 설치했다.
어떻게 공사를 마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얼마 후 대학로를 들렀을 때 주방 아주머니는 웃으며 말하셨다.
“만들어 놓은 거 칭찬이 자자하시던데.”
난 그 칭찬의 말씀을 상상해 보았다.
“걔는 어쩌면 그렇게 기가 막히게 잘해놨니?”
그러나,
그 당시의 나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잘했는지 알지 못했다.
2년 뒤인 1999년
프랑스로 유학을 와서 지방 생테티엔에서 어학을 시작하고,
체류증을 위한 신체검사를 위해 이웃 대도시인 리용,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큰 부자 도시 리용에 갔을 때,
신체검사를 끝내고 리용을 구경하고,
시내 백화점을 들어갔다.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백화점 1층
화장 품 매장들 사이와 사이는.
내가 그때 수원 판타지 공사에 했던 작업처럼
‘나무 느낌’으로 공간 분할이 되어있었다.
그때 알았다.
아.. 저거였구나…
나무랑 똑같이 만들면 그냥 나무를 가져다 놓으면 되지,
그런데 그런 나무랑 똑같은 게 아니라. 나무인 듯 아닌 듯..
직선도 아니고 곡선도 아닌 ,
규칙적인 문양도 아니면서, 나무 같은 느낌…
생테티엔으로 돌아와 사장님께 편지를 썼다.
“사장님 2년 전에 말씀하신 게,
여기에 있어요.
그리고 저는 이제야 어렴풋이 이해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렴풋이 이해했고, 여전히 찾고 있다.
나의 작업 위대한 일상은 사람을 주로 그린다.
늘 주로 얼굴이 된다
슬픈 순간, 기쁜 순간, 대개는 슬픈 순간이 많은데,
그림을 배껴 그리지만, 한 번도 똑같이 그려보려 하진 않았다.
똑같이 그려야 하면, 그냥 복사하거나 사진 찍으면 그만이다.
내가 그리고픈 순간은 똑같아 보이지만 똑같지 않으면서 그 상태를 보여주는 그 순간.
그 순간을 잡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마다 늘 사장님의 말이 귓전을 맴돈다
“나무 느낌으로,
똑같을 거면 그냥 나무를 가져다 놓으면 되지 왜 만드니?”
나의 스승, 나의 사장님...
나는 살아오며
많은 집단을 거쳤고
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모든 집단이 사랑스러웠고,
또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웠다.
그 모든 집단과 사람들을
한없이 사랑했고 또 머리 터지게 싸우기도 했으며
모두가 하나뿐인 관계였다.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살다가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할 것 같아서
모두 떠나서 살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아름다운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떠나서 별이 되고 있다.
잡을 수 없고, 잡히지 않으며
언젠가 내가 별이 되어 그들을 만나지 않는 이상,
다시 볼 수 없겠지만
그 모든 집단과 사람들의 기억과 추억들은
내 안에 늘 살아 숨 쉬고 나를 만들고 나와 함께 늙어가고 있다.
내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
그는 가장 아름다움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하늘에 별이 되셨다는 것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 것은,
여전히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사장님의 작업들을 챙겨두지 못한 것이
말할수 없이 후회스럽다.
그리운 마음에,
이러한 사연을 알고 있을,
몇몇과 나누거나
지나가며 보고 갈 이들과도
나누려고 남겨둔다.
그는 떠났을지 모르만,
내 일상과 위대한 일상과 늘 함께 살아있다...
에필로그 1 .
진정한 배움의 자리 - 술자리
늘 잊을 수 없는 것은 술자리였다.
사장님과의 술자리는 노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내겐 이야기를 듣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했다.
아부가 섞인 질문을 많이도 던졌다.
C형은 그럴 때면 늘 탐탁지 않은 눈치를 주곤 했지만,
2차에 있을 우리끼리의 토론을 기다리며 참아주었었다.
하지만, 주제가 흥미롭다고 느껴지면 어김없이 대화에 참전했다.
C형은 유일하게 사장님을 타박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우리 중 제일 해박해서 사장님도 아끼셨다.
C형이 유일하게 사장님께 타박과 핀잔을 장난 삼아 던졌다면,
사장님 역시도 유일하게 C형에게만큼은 ‘짓궂은’ 장난을 거시곤 하셨다.
한 번은 릴리 전화벨이 울리자 사장님이 전화를 받으시고는,
목소리를 아주 내리 낮추시며,
여기에 옮길 수 없는 말로 전화를 받으셨다.
그러다가 갑자기 당황하시며
“아! 아! 미안, 미안, 난 또 내가 아는 동생인 줄 알고`”
나는 사장님이 그렇게 당황하시는 모습을 그 이후로도 본 적이 없었다.
사연인즉,
전화를 받고 C형인 줄 아시고 낮은 목소리로 장난을 거신 것인데,
C형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술자리는 늘 12시 이후에나 이루어졌다.
인사동과 대학로 두 곳의 가게를 마치고 정리하고 마감하고 모여야 하니,
12시에 시작하면 빠른 셈이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코로나도 없던 시절임에도 영업시간은 12시까지였다.
그러나 인사동 옆 낙원동엔 12시 이후엔 커튼을 쳐놓고 영업을 하던 고깃집이 있었다.
12시 넘어 가보면, 인사동에 내로라하는 카페와 레스토랑 사장님들을 모두 볼 수 있었다.
낮엔 장사를 하고, 밤엔 야식을 겸해 술 한잔을 기울이러 오는 것이다.
우리는 늘 삼겹살을 먹었다.
사장님은 늘
“너네 먹고 싶은 거 시켜”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 모두 사장님께선 삼겹살과 소주만 드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사장님께서 충분히 드신 후에야 우리는 돼지갈비 같은 것을 추가로 주문했다.
고기는 늘 D형이 도맡아 구웠고, 사장님이 드시기 좋게 잘 챙겨 드렸으며,
“형, 나 밥”이라고 하면, 내 밥도 챙겨 주었었다. 엄마 같았다.
그렇게 성산 가든의 시대가 늘 유지되던 즈음
가게로 복귀한 C형은 우리가 성산으로 향하자,
“성산엘가? 거길 왜가?”라고 우리 모두,
심지어 사장님까지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핀잔을 준 뒤
“따라와”라고 말하며 앞장을 섰다.
우리는 모두 말없이 앞서 가는 C형을 따라갔다.
그렇게 간 곳이 고창집 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주차장같이 보이는 공간에 드럼통으로 만든 테이블이 예사롭지 않았다.
냉동삼겹살을 은박 지위에 구워주고 식빵으로 기름을 걷어내던 성산과는 차원이 달랐다.
숯불이 나오고,
굵은소금이 뿌려진 생삼겹이 나왔다.
갓 담은듯한 김치가 접시에 포기째 나오는 것을 보고 우리는 경악했다.
돼지껍질은 서비스요, 껍질을 찍어먹을 콩가루까지 나오자,
우린 그 뒤론 성산에 가지 않았고,
C형이 권해주는 곳은 어디든 따라나섰다
술자리에서 난 늘 작업이나 미술에 대한 질문을 했고,
사장님은 뭐든 당신의 스타일로 답을 주셨다.
“엊그제 누가,
‘어머, 사장님 너무 감각 있으세요~’라고 칭찬하는데,
기분 나쁘더라”
내가 물었다
“왜요?”
“얘. 내 나이에 50에, 감각 있다는 소리를 들어야겠니?
지금은 툭툭 쳐내고, 퉁퉁, 한방에 끝내야지,
반짝반짝 감각 있을 나이는 아니지 않니?”
늘 그렇듯 반은 이해가 되고,
또 절만은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었다.
그럴 땐 다시 묻는 게 답이다.
“그러면, 그래서 그렇게 릴리 대문을 빨간색으로 칠하신 거예요?”
“글쎄다..
그건 모르겠다.
그런데 나중에 보스코형이 그러더라고,
겁도 없이, 어떻게 그렇게 빨간색으로 다 바를 생각을 했냐고..
처음엔 나도 겁이 덜컥 났지,
아.. 무당집 같다.. 생각도 들고.”
보스코 형님은 신사동 레스토랑 보스코 사장님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사장님과는 전혀 정 반대의 모던하고 심플한 인테리어를 하시던 분이다.
“그런데 어떻게 칠하셨어요?”
“그냥, 빨간색이어야 되겠다. 싶었지.”
도면이 없으셨던 것처럼,
거기엔 그냥 빨간색이었단다.
사장님은 색체에 대해선 원색을 좋아하셨고,
색채학을 경멸하셨다.
“난 색채학은 엉터리라고 생각해”
마치 백남준이, 한의학을 공부한다고 자신을 소개한 김용옥에게
당신의 친구가 돌파리 한의학 의사여서 한의학이 엉터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처럼
사장님도 당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색채학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하셨다.
그 경험이란,
“네가 배우는 색채학에선, 파란색이 차가운 색 아니니?
그런데, 아주 추운 겨울에
내 친구가 코발트블루 코트를 입고 나온 거야.
그런데, 난 그 색이 너무 따뜻해 보였거든,
그럼 색채학이 잘못된 거 아니니?”
난 할 말이 없었다.
아마도, 학교 교재였던 요하네스 잇탠의 색채학 수업 교재를 가게에 가져 간 날
그 책을 보셨다가 나중에 술자리에서 말씀하신 것 같았다.
늘 학교를 다니는 나와 학교 바깥의 사장님과의 논쟁이기도 했다.
3학점짜리 색채학을 열심히 외던 나에게
사장님과의 논쟁은 색채학이란 학문에 대한 깊은 회의를 주기에 충분했다.
지금 생각해도,
나조차도, 색을 차가운 색 따뜻한 색으로 구분하여 도식화하고,
칸딘스키가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서 라며 점선면에 대하여 규정짓고
도식화하는 것은 너무나 간 ‘오만’이거나’ 칸딘스키의 ‘순진한 바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어떻게 미적인 감정의 문제를 그렇게 획일화시킨다는 말인가?
그렇게 획일화될 수 있다면, AI도 빅데이터도 필요 없을 것이다.
미에 대한 판단의 문제도 그랬다.
칸트가 미적 판단의 가능성을 물은 것
그리고 미적 판단에 대해 정의 내린 것은 일견 의미 있는 구석이 있지만,
피에르 부르디외가 잘 지적했듯이 칸트의 미적 판단의 문제에선 사회학적인 조건이 베제 되어있다.
사장님은 학교와 기존 교육의 바깥에 위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유로웠고, 막힘이 없었다.
“대학에 들어있는 인포메이션은 전부 왜곡된 거거든,
어떻게 그 속에서 창조가 나올 수 있어?
대학을 때려치워보지 않은 사람 치구 인류의 역사를 움직인 않은 사람은 없다구.
우리는 학문을 하면 안돼. 살아있는 진실을 찾아내야지!”
백남준의 말이다.
사장님도 같은 생각 이셨다.
로뎅과 세잔느가 파리 보자르(국립 미술학교)에서 떨어지고 재도권 밖에서
자신들만의 길을 간 것처럼,
사장님도 제도권 밖에 있었고
그래서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
“시인이 시를 쓴다고 생각하고 시를 쓰면 그게 시겠니?"
언젠가 던지신 이 말씀은
여전히 내게 숙제로 남아있다.
에필로그 2.
추억 - 인사동 싸움닭,
사장님은 한때 인사동 싸움닭이셨다.
한 번은 볕이 좋은 날 볼가 화단에 앉아 쉬시다가
골목을 빠져나가며 턴을 하던 차가
앞집 식당 화분을 치고 지나가는 것은 보셨다고 한다.
사장님은 쏜살같이 달려가
양팔을 벌려 차 앞을 막아 서시곤,
“야! 너! 내려”
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셨다고 한다.
“넌 사람을 치고도 그냥 지나갈 거니!”라고 혼을 내셨고,
그 사람은 결국 내려서 화분을 제대로 세워 두고서야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싸움은 집 앞에서만 일어나지 않으셨다.
사장님의 유일한 즐거움은 쇼핑이셨고
백화점에 자주 가시는 단골 고객이었으며,
남성이셨지만 주로 찾으시는 층은,
주방 용품이나 퀼트 같은 인테리어 소품들이 즐비한 가정관인 경우가 많았다.
그날도 사장님은 이것저것 물건을 많이 사셨다고 한다.
몇 가지 더 필요하셔서 산 것을 잠깐 맡기려고 직원에게
“저기요, 미안한데 여기에 잠깐 맡겨줄 수 있을까요?”
늘 시작은 친절하고 상냥하게 부탁하신다.
그런데 그 직원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하 물품보관소에 맡기세요””라고 차갑게 말했단다.
그다음은 같은 레퍼토리다.
“뭣이 어쩌고 어째,
아니 이거 잠깐 맡다 주는 게 안되니?
야 이거 다 풀러! 안 사!”
그리고 마지막은 늘 “매니저 나오라고 해!”였다.
사장님은 당신 물건이 아닌 것에도 기꺼이 참전하셨었다.
볼가 D형이 백화점에서 구두를 샀는데
와서 보니 구두 앞쪽이 칼로 메인 듯이 찢어져 있더란다.
그래서 사장님과 함께 백화점을 찾았고
착한 D형이 직원에게 설명하자
직원은 대뜸
“돌부리에 부딪히셨나 보죠 뭐!”라고 쏘아붙이더란다.
뒤에서 듣고 계시던 사장님,
이번에도 불쑥! 박차고 앞으로 나서시며 한마디
“야! 돌부리가 면도날이니!”
그다음은 같은 레퍼토리로 고래고래
그리고 마지막은
“매니저 나오라고 해! “였다.
한 번은 사장님의 지인으로, 릴리에 자주 오시던 L형이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는데 어디선가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리더란다.
돌아보니 고래고래 직원을 혼내시는 중이셨단다.
L형은 사장님이 아는 척하실까 봐 얼른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사장님의 싸움닭의 전력이 계속되지는 않는 때가 왔다.
때는 볼가 형이 S백화점에서 커피 머신을 샀던 해였다.
가게에 가져와 전원을 연결하고 작동을 했는데,
‘펑”소리를 내고 연기가 나며 전원이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신 사장님은 다시 한 면 D형을 앞세우고 백화점으로 향하셨다.
때마침 술을 마시고 발을 헛디뎌 이마를 다친 D형의 상처를 이야기하시며,
커피 기계 때문에 생긴 부상이라고 말하고,
병원비에 왕복 택시비까지 받아 내시겠다며,
기세 당당하시게도 백화점으로 향하셨다.
백화점에 도착한 사장님은 늘 그렇듯 친절하고, 상냥하게,
직원에게 방문한 이유를 설명하셨다.
“저기요, 엊그제, 이 기계를 여기서 샀는데, 켜자마자 '펑'하고 고장이 났네요.”
그러자 직원의 대답은 사장님은 상상을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는데, 그것은
“어머나! 얼마나 놀래셨어요!”
사장님은 처음으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셨다.
원래는 직원이 싸가지 없이 말을 하고,
고래고래 혼을 내시고,
“매니저 나와!” 로 끝나는 시나리오였는데,
직원의 예상치 못한 친절한 반응,
그리고 즉시 새물건으로 교환해주는 통에
사장님은 한마디도 못하시고 돌아오신 것이었다.
그날 저녁,
고창 집에 모여 앉은 우리에게
사장님은 여쭙지도 않았는데 말씀하셨다.
“그렇게 이야기 듣자마자 두 손을 모으고서
“어머나 얼마나 놀래셨어요!”라고 말하는데,
내가 거기다 대고 뭐라고 그러니? 할 말이 없지.”
그랬던 거였다.
상대방이 어느 정도만 예의를 갖춰주면, 사장님은 싸움닭이 아니셨다.
난 그 여직원의 마음이 예뻤고,
한국사회가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럽을 처음 여행하시고 돌아오신 사장님은 말씀하셨었다.
프로방스는 당신이 상상한 그대로더라고.
그리고 시골버스가, 부랑자가 타려고 해도 출발하지 않고 기다려주더라고
사장님은 배려하는 삶을 원하셨고,
느리게 가는 유럽 같은 삶을 늘 꿈꾸셨었다.
유럽 생활 유럽 사회하면 속물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냥 사장님이 원한 건 서로 존중하는 그 무엇이었다.
90년대에 문을 열었던 볼가는 점심과 저녁 시간 사이에 잠시 문을 닫기도 했었다.
유럽의 식당들처럼 주방 휴식 시간을 두었던 것이다.
나중엔 차를 마시는 손님들을 마다할 수 없어서 그 시간을 없앴지만.
음악과 차, 그리고 서로를 향한 배려와 꽃과 생명이 충만한 공간.
그것이 사장님이 원하던 공간의 모습이었다.
“바닷물이 시럽 같더라..”
통영을 여행하시고서 오셔서 하신 말씀이었다.
배들이 물살을 가르고 지나던 그 모습과
출렁이던 그 바닷 물결이 시럽 같아 보이셨다는 그 말에,
나중에, 정말 나중에 우연히 통영에 정착한 부모님을 뵈러 가서
내 눈으로 직접 보았을 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읽었던 토지의 한 문장이 눈에 참 오래도록 남았었다.
‘작은 통통배가 지나가는데, 자기도 배라고 작은 여울이 인다..”
너무 예쁜 문장이었다.
이 문장은 이렇게 아직 여기 남아있는데,
사장님이 여기 안 계시다는 생각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에필로그 3.
죽음, 떠남, 두고 떠나기..
“네가 그냥 이해해.
집은 그냥, 세트 같은 거야,
아버지 어머니 새대에 잠깐 쓰는 세트 같은 거.”
시골에 집을 지으시겠다는 아버지께서,
정사각의 촌스러운 도면을 들고 오셨다고,
사장님께 하소연을 드리자 하신 말씀이었다.
“그냥 세트 같은 거야 , 잠깐 살다가 가는 거야,
영원한 게 어디 있니?”
그래서 였을까…
사장님은 늘 공사를 해주고 나선 사이가 틀어지면 그냥 가지 않으셨다.
더구나 사이가 틀어진 것과는 무관하게 그 집이 장사가 잘되어도 또 안되어도 찾지 않으셨다.
만들 때는 신나 하셨지만, 그것이 끝나고 나면 잊어버리신 듯했다.
“그냥 공연이 끝나고 나면, 다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지휘자 정명훈이 프랑스 텔레비전에 나와서 했던 말이었다.
사장님도 같은 기분이셨을까…
무언가를 만들면 애착이 생길 텐데라고 생각했지만
사장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그냥 , 그렇게 가는 거야.
지금은 아마 인천 어디쯤 갔겠구나…”
사장님의 지인으로 네덜란드 분임에도 한국에서 떠나신 한 어르신이
당신이 떠난 후 한강에 뿌려달라 하셨다는 이야기를 하시며.
다음날 이렇게 덤덤히 말씀하셨었다.
그냥 그렇게 가는 거다..라고.
에필로그 4.
그의 음악
사장님은 늘 우리에게 음악을 들으라고 권하셨었다.
늘 좋은 음식 좋은 물건을 찾으면서 왜 음악은 좋은 음악을 듣지 않냐고 답답해하셨다.
러시아의 비가
사장님이 좋아하셨던 음악을 다시 정리해보니 의외로 러시아 음악이 많았다..
아.. 그러고 보면, 볼가도, 러시아의 강이었다...
늘 이 앨범의 마지막 흘러간 청춘이 끝나면,
얘야 cd 바꾸렴. 흘러간 청춘이 끝났구나.. 하셨더랬다…
프랑코 시모네는 정말 로맨틱한 음성이었다.
이 음악을 좋아하던 한 여자 손님은,
사장님을 두고서,
'새벽 같은 남자'라고 정의했었다.
마음이 있었나 보다 했고,
충분이 이해가 되었다.
나에게 노래 한곡을 꼽으라면 이곡이다. 난 이곡을 릴리에서 만났다.
봄을 기다리며…
파도
26 이방인의 연가 https://www.youtube.com/watch?v=QnZvd1yr6pM
페드로 알모도바의 그녀에게 수록곡.
결번선정
가장 아음다운 나폴리 음악
늘 빠지지 않는 트리오 로스 판초스..
사장님은 쥴리 런던 Julie london을 좋아하셨다.
크라이 미 어 리버 cry me a river를 즐겨 올리셨고,
다른 많은 부드러운 음악들을 좋아하셨다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의 파도도 좋아하셨다.
사장님은 노래를 부르지 않으셨다.
고창집 에서 2차 종로 노래방으로 가는 우리들에게
늘
“또 노랫방 가니?”라고 말씀하셨었다.
꼭 노래방을 '노랫방'이라고 발음하셨다.
“왜 노래 안 하셔요?”라고 물으니,
노래를 못한다고 답하시며,
젊은 시절 연극계 동료들과 노래하는 자리에서
수줍게 노래를 못한다며 무대를 내려오자,
사장님을 질투하는 한 동료가
“너는 어쩌면 노래를 거절하는 것도 그렇게 지적으로 보이냐?”며 핀잔을 주더란다.
듣고 보니 사장님의 당신 자랑이셨다.
사장님의 이야기는 당신 자랑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린 그것을 ‘환타먹는다’라고 표현하곤 했다.
‘판타지’의 줄임말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사장님이 종종 유일하게 따라 부르시던 소절이 있었는데,
그것은 쥬디 갈렌이 부른
‘섬웨어 오버 더 레인보우'의 한 소절,
'섬웨어 오버 더 레인보우'였다.
지금도,
릴리 중앙 5번 원탁을 닦으시며,
그 소설을 어설프게 따라 부르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딘가를, 무지개 저편을 그리는 듯 어렴풋이 느껴졌었는데...
이제, 그렇게 무지개 저편으로 가셨다.
언젠가 기회 닿는다면,
사장님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이 음악을 듣고,
이야기 나누며, 사장님이 좋아할 실 곳을 가보는 것,
그것이 어쩌면 내 꿈인지도 모르겠다.
에필로그 5
덧붙이기보다 어려운, 덜어내기, 그리고 두고 떠나기
“그렇다니까.. 그렇게 된다니까..”
사장님께서 맞장구를 치셨다.
내용인즉, 릴리를 떠나 조형 공장에서 일하던 나는,
기존의 노래방이나 나이트클럽, 레스토랑의 공사현장을 보며 느낀 것을 말씀드렸다.
모두들 시작할 땐 예상 밖으로 괜찮은데,
공사가 점점 진행되며 망가진다고..
사장님은 말씀하셨다.
“그래서,
가져다가 붙이고 만드는 건 쉬워,
늘 어디를 덜어내고,
어디서 끝을 내는 것을 아는 것,
그게 더 어렵지.”
그것은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붙이고 입히는 것은 쉬지만,
덜어내고 멈추는 것,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사장님의 작업에 대한 ‘비판’의 지점도 될 수 있었다.
릴리나 볼가처럼 20년을 넘긴 가게들은, 물건이 쌓일 수밖에 없었고,
다행히, 전체적인 분위기를 망치는 물건이 ‘개입’되지는 않았기에,
그 전체적인 부위기가 망가지진 않았지만,
아슬아슬하게 찰랑찰랑 차올라 있었다.
넘치기 직전이라고 나는 느꼈다.
그런데, 안타깝게 나는 가보지 못했지만, 릴리 이후에 작업한 ‘담징’의 경우,
모던하고 심플한 분위기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작업한 가회동 자택은
훨씬 더 ‘간결한’ 모습이었다.
마치 ‘가게는 영업하는 곳이니 장식을 하지만,
나도 간결한 게 더 좋단다.’라고 이야기하시는 것 같았다.
일본식 적산가옥과 한옥을 그대로 살린 것도 인상적이었다.
예술가, 작가의 작업은 삶의 범위를 넘어서서 존재할 수 없다.
"외국어의 범위가 모국어의 범위를 넘어설 수 없다"라고
언젠가 c형이 이야기한 것이 생각나기도 했다.
일본식 적산가옥과 한옥은 사장님의 유년시절의 풍경이다.
그것을 그대로 살려내신 것뿐이었다.
아다지에토로 유명한 말러 교향곡 5번의 시작은 뜬금없이 트럼펫으로 시작한다.
왜냐면, 말러의 유년시절,
아침마다 집 근처 군부대에서 들려오는 나팔소리를 들었던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괴해 보일 우주선 같은 양철을 뒤집어쓴 듯한 빌바오 구겐하임을 설계한 프랑크 게리의 작업은,
외할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철물점에서 유년을 보낸 게리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금방 와닿는다.
사르트르가 말했던 것처럼,
“화가들이 화폭에 얹는 것은, 자신들의 삶의 나날들이며, 지나거나 지나지 않은 시간들.”이다.
사장님의 작업도, 어린 시절의 추억들과 한옥 속에서 자라고
한옥을 온몸으로 사랑했던 당신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던 것이었다.
“모든 게, 다 비례거든,
근데, 한옥은 집집마다 다 달라, 서까래며 기둥이며, 비례가 다 달라.”
C교수와 인터뷰한 대화에서 하신 말씀이었다.
‘도면이 나올 수 없다’라는 단언하셨던 대목이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며,
그러한 이유 때문에, 너무나 비상업적인 부분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프랜차이즈가 대세인 시대에,
당신의 스타일로 프랜차이즈를 하셨더라면 돈방석에 앉으셨겠지만,
사장님은 돈엔 관심이 없으셨다. 사기를 당하지 않으시면 그나마 다행인 지경이었다.
릴리를 공사할 당시에 대한 C형의 증언도 그랬다.
오픈이 내일모레인데, 하루 종일 나가서 시장과 백화점을 모두 둘러보시고 오시던 손에는
안쪽 창에 커튼으로 쓰신다며 달랑 퀼트 두서장을 사 오셨더란다.
지금 뭐하시는 거냐고 주변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자
“눈에 띄는 게 없는 그럼 어떡하니!”라고 오히려 역정을 내셨단다.
상업 감각은 제로 셨던 것이다.
인테리어 공사 이후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건축보수적인 측면이야 전문가들이 해결하면 되는 문제였지만,
사장님 인테리어의 가장 큰 난제는,
사장님이 만든 공간에서 살게 되는 사람이,
사장과 같은 관점의 미적 감각을 갖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창집의 논쟁에서 이 부분을 파고들 땐,
사장님은 아무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럴 땐 늘 조용히 고기만 굽던 D형마저도 이때는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니까, 형이 좀 가서 가게도 봐주고,
꽃도 바꿔주고 해야지, 그렇게 그냥 두면 어떡해요??”
하지만 이런 잔 손리가 길어져도,
싫으면 하지 않으셨고, 맘에 들지 않으면 가지 않으셨으며,
잊으셨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어딘가, 아주 미세하게, 쓸쓸함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사장님과 결이 가장 비슷했을 C형이
“언젠가는 영감이 그러더라,
밤에 가게 탁자를 닦는데 눈물이 쏟아졌다고,
그 눈물의 의미를 넌 알겠니?”
난 몰랐지만, 형은 아는 듯했다.
그렇게 정확히 맞는 어떤 것을, 아름다운 어떤 것을 찾으셨던 것이었을까?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아름다움의 극치는 정확함에 있다..”라고 말했었는데,
어쩌면, 사장님의 작업도 그 ‘정확한 순간’ '정확한 형태’
'정확한 공간’을 찾아가는 것은 아니었는지…
"세상에 어쩌면 곡선을,
줄에 추를 달아서 늘어 뜨린다음에,
그걸 그대로 뒤집어서 위로 올려서 아치를 만드는거야. 기가막히지 않니?"
정말,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셨더랬다.
서울에서 열린 '가우디'전시를 보시고 오셔서 하신 말씀이셨다.
늘 공사를 하며,
가장 이상적인 아치와 곡선을 꿈꾸시던 사장님은,
가우디가 중력을 이용해 곡선을 찾아낸 것을 보시고선 감탄하신 것이다.
그리곤 혼잣말처럼 말씀하셨다.
"그것보렴, 답은 모두 자연에 있단다."
나는 언젠가 뜬금없이, 연극을 하시던 시절,
어떤 작업을 하셨는지 여쭈어 본 적이 있었다.
“천칭 있잖니,
양쪽의 균형을 맞추는 ,
그 천칭이 왔다 갔다 반응하듯이
그렇게 배우들이 서로 주고받는 것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작업이었지 아마…”
“그래서 어떻게 되셨어요?”
나는 결과를 물었다.
“배우들이 못 견디더라고...”
사장님의 짧은 답이었다.
사장님 원하는 것은 어쩌면,
배우들과 함께 하는 단체 작업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었다.
혼자만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것을 표현하기엔,
연극보다는 인테리어가 더 맞는 것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 공간 안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과의 ‘교류’는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물론 당신과 맞는 사람은 빼고 말이다.
“한 번은,
공사를 하는 동안,
짐을 모두 컨테이너에 넣고.
가족이 모두 떠나 있겠다면서 하는 말이,
벽에 맷돌을 박아 보셨어요?라고 그래”
“맷돌을?”
인터뷰어였던 C교수가 물었다.
“응, 맷돌.”
“맷돌을 왜?”
“그러니까, 그 주인은, 벽에다가 맷돌을 박아 넣어보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뭐라고 그랬어요?”
“뭘 뭐라고 그래,
맷돌을 벽에다 왜 박아요,
그냥 뒤뜰에 두고 콩국수 먹을 때 쓰세요 하고 나왔지..”
인터뷰를 하던 C교수의 웃음 뒤로, 사장님은 한마디 덧 붙이신다.
“그런 사람 집은..
해주기 싫어..”
한편 이해가 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하지만,
그냥 사장님 같은 분에겐
하얀 도화지 같은 백지 같은 공간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공간이
마지막까지 머무셨다는 깊은산속 옹달샘이 아니었을까.. 싶다.
에필로그 6.
깊은산속, 옹달샘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내가 모르고 있었던 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사장님이 만든 공간에서 감동을 받고 행복해했다는 사실이
내게는, 참 크고도, 쓸쓸한 위안이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그 산골짜기의 공간들을
인터넷의 사진으로만 보았지만,
한 장만 보고서도 사장님이 만드신 것인지 알 수 있었고,
그야말로 서울을 떠나 시골로 가셔서는
서울의 복잡한 일상과 아픈 추억에서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모두 걷어내고
알갱이만 , 당신의 본질만 남기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방에서 파리로 올라왔던 2000년
파리 오르세 미술관 에선 몬드리안의 회고전이 있었다.
당시 문화부 장관으로 화집의 첫머리에 축사를 썼던 카트린 토스카는
“우리는 이번 전시를 통해 몬드리안의 ‘정당한 변화’를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파란색 빨간색 그리고 흰색의 사각형의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추상화로 몬드리안이 오기까지,
인물과 자연을 그리고 또 그 인물과 자연들이 단순화되어서
기하학적으로 변해가는 그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몬드리안의 마지막 작업들이 왜 정당한 변화였는지,
그가 그러한 단순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왔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깊은 산속 옹달샘의 건물과 공간들도 그랬다.
볼가에서 시작하고 산타페와 릴리, 스타찌오네. 판타지. 담징과 가회동 자택을 거쳐,
시골에 만들어진 그 공간들은,
바닷물을 끌어들여 햇빛과 바람을 지나고 소금이라는 결정으로 남는 과정처럼,
서울에서 삶과 시간들을 걷어내고
당신의 삶에서 만나고 만들며 그렸던 아름다움의 결정들만을 남겨 놓은 듯했다.
사장님의 작업엔, 자연이 있었고, 생명을 소중히 했으며 늘 아름다움을 찾으셨었다.
나의 작업이 사장님처럼 아름다움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면 난 그의 곁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예술이 무엇인지가 더 궁금했다.
아름다움은 예술의 일부로만 보였고,
나를 감동시킨 작품들이 왜 감동을 주는지 알고 싶었고,
정말 예술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러곤 사장님 곁을 떠났다.
세월이 흘렀다.
20년이 흘러서 ,
내가 얻은 것은 예술이라는 답이 아니라,
거대담론이 사라진 지금은 예술의 정당성을 역사적으론 찾을 수 없고,
작가 개인의 개별적인 과정에서만이 찾아질 것이라는,
예술 근처의 주변에 대한 이야기만, 답이 아니라 ‘주석’처럼 얻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돌아보니,
늘 예술이 무엇인지 찾아다닌 나는,
예술은 커녕 아름다움조차 얻지 못했고,
늘 아름다움과 함께 계셨던 사장님은,
이미 예술 안에 있었다.
에필로그 7.
사장님의 전생
“그게 어떻게 보이세요?”
“그냥, 보이지..
이 컵을 보면,
이게 멕시코 산이거든,
컵이 아주 두껍지, 탁자에서 떨어져도 카펫 위면 안 깨져,
그 사회가 소비성향이 안 발달했다는 뜻이야.
일본 잔들은 아주 얇고 잘 깨지거든,”
“그런데 컵 말고 인테리어요,
한 번도 안 가보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만드셨냐고요?”
“그냥,
글라스나 접시를 보면,
아.. 어떤 탁자에 놓였겠구나. 싶고
또 그 탁자를 보면, 어떤 카펫이겠구나 싶고,
그러면 벽은 어떻겠다..
이렇게 그냥 그려지는 거지 뭐 별거 있니?”
볼가와 릴리 식구 모두 사장님을 보면 전생이 있다고 믿었다.
릴리에 오는 네덜란드인에게
“정말 너네 나라 가면 저 헐게 장식해 놓니?”라고 내가 몰래 물었을 때 그녀는,
“응 똑같아”라고 말했었다.
흥미로운 것은
사장님은 해외여행을 거의 가신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있을 땐 D형과 딱 한번 가셨다.
유럽이었고,
당신이 상상한 게 그냥 그대로 있었다.라고 말씀하셨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프랑스 시골 풍경을 동경하고 좋아했다.
그래서 프랑스 시골에 가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과 똑같다.
사장님도 유럽을 동경하셨다.
꽃을 가꾸고 접시를 벽에 걸고
낡은 나무 자체가 최고의 인테리어가 되는 것,
볼가나 릴리가 이곳, 유럽과 똑같은 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사장님의 전생엔 유럽에서 살았을 거하고 이야기했었다.
에필로그 8
... 마지막 질문.
아포스트로프 (Apostrophes, 1975)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문학 프로그램이다.
모든 책을 일고 나오기로 유명했던,
진행자 베르나르 피보는 늘 작가들과의 만남을 끝낼 때 이 질문을 던졌다.
"신이 만약 존재한다면,
하늘나라에 도착했을 때 어떤 말을 듣고 싶은가?"
많은 작가들이 때론 흥미롭고. 때론 먹먹하며, 또 때론 기막힌 답들을 내놓았었다.
최고의 문학 프로그램 진행자였던 베르나르 피보는
자신이 영어를 못하는 것이 너무 한이 맺혔었는지,
자신이 천국에 당도했을 때 하느님에게 듣고 싶은 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너에게 영원한 시간이 있으니,
너에게 최고의 영어 선생님을 소개해주겠네,
가서 윌리엄 경을 불러오너라,
물론, 셰익스피어일세!"
겁쟁이에, 죽음이 늘 두려웠던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을 상상했고,
"모차르트가 자네를 기다리고 있네."라는 대답을 듣는 상상을 하며,
죽음에서 공포의 그림자를 걷어내곤 했다.
이제는 답을 고쳐 적는다.
모차르트와 함께, 사장님도 아버지도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지구에서 띄운 편지.라는 표현은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의 첫 번째 앨범 제목인
'지구에서 온 편지'에서 빌려온 표현이다.
김광민은 미국 버클리에서 유학을 했는데,
유학시절, 그렇게 많이 울었다고 한다.
김광민은 세션들의 사관학교라고 일컬어지는
조용필의 위대한 탄생에서 활동하다 유학을 떠났었다.
난 나의 유학 시절, 울 때마다 김광민을 떠올렸었다.
김광민은 안타깝게도 일찍 요절한 가수 유재하의 친구였다.
유재하 때문에 유학시절 그렇게 울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구에서 온 편지, 라는 앨범의 제목은,
하늘나라에 유재하에게 보낸다는 의미라고 한다.
난 이 제목이,
지구에서 하늘나라로 편지를 띄운다는 이 표현이,
기발하고 독특한 발상이라는 생각보다,
그의 슬픔과 그리움의 깊이가 더 먼저 느껴졌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표현이기에,
함부로 아무 말 없이 가져다 쓸 표현이 아닌 듯하여,
여기에 밝혀둔다.)
볼가 시절, 가게 엽서. 지금은 폐업되었다. 차라리 잘되었다. 사장님이나 D형이 없는 볼가는 볼가가 아니다.
빨간 창이 들어서기 전 볼가의 창은 더 작은 원래 창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때의 사진은 없다.
담쟁이덩굴이 참 무성하게도 덮었었다...
별전구로 장식된 릴리의 겨울
사장님이 만드는 공간은 늘 이야기가 있었고, 살아 있었다. 전등과 소품들이 대화를 했었다.
볼가 창가의 작은 인형.
가회동 자택은 야트막한 담벼락
안뜰
빨간 창 빨간 창문
늘 점잖았던 미켈. 가게에 가면, 푸치니의 오페라에 맞추어 노래를 했었다.
그해 겨울, 나의 스승, 나의 사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