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매춘(賣春)’을 권하는 사회

몸 팔기를 강요하는 한국의 대중문화


 몸 팔기를 강요하는 한국의 대중문화  






- 성적 욕망의 용광로가 된 한국사회


- 메르캉틸리즘 – 돈벌이 제일 주의가 낳은 괴물, 성적인 대중문화


- 19세기 파리에서 21세기의 한국까지


- 아이돌(Idole) 그리고, 거대한 분묘(墳墓), 자발적인 순장(殉葬)


- 몸 팔기를 권하는 문화


- 아이돌을 보호해야 한다


- 외설과 예술 인문학적 인식








성적 욕망의 용광로가 된 한국사회




1947년 아도르노와 호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20세기와 21세기가 맞이하게 될 문화산업의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지적했었다. 한국어판 역자였던 김유동 교수는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책중의 하나’라는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어 이 저작이 이야기하고 있는 심각성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기도 했다. 세월이 흘렀다. 60여 년이 흐른 지금. 불행히도 아도르노와 호크하이머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며, 더러는 그 어두운 예측보다도 더 어둡다. 


문화산업이 후기 자본주의와 만나 더 영악해 졌고, 세상은 더 빠르게 변하고 있으며, 그 극단에 한국사회와 그 문화 산업이 위치하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마페졸리는 “지난 세기 동안 서구가 환상적인 시험장이었다면, 이제 그 실험실은 동양으로 이동했다”라고 말하며 한국을 언급했다. 그런데 새로운 세기의 시험장으로 대두되고 있는 한국 사회와 그 문화는 과연 어떤 모습인가? 싸이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한국의 대중문화 과연 환상적인가? 이 글이 찾은 바는 그렇지 않다. 지금의 한국사회에서 자생하고 커가고 있는 대중문화는 아도르노와 호크하이머의 경고를 비웃는 성적 욕망의 용광로다.








메르캉틸리즘 – 돈벌이 제일 주의가 낳은 괴물, 성적인 대중문화




세계 경제 위기가 한창이던 지난 2008년, 프랑스 대통령 자문이었던 쟈크 아탈리는 당시의 사태에 대해 “금융시스템이 우리의 예상보다 더 너무 빨리 변화했다”라고 평가했다. 우리가 손쓸 틈도 없이 빠르게 진화 했다는 것이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서 생존을 위해 스스로 진화하던 공룡처럼 ‘금융시스템’ 또한 스스로 변화 하였다는 것이다. 자본에 대한 욕구는 그만큼 빠르게 체제를 변화 시켰다. 물이 조그만 차이에도 끊임없이 아래로 흐르듯 돈으로 집중된 자본에의 욕망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사회 체제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 가고 있었다. 그 욕망이라는 쇳물은 신자유주의라는 용광로에서 무한히 상품화되어 시장속으로 파고 들었다. 무한한 시장잠식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것이 돈이 되기 때문이었다. 한극의 대중문화는 그 심장을 그러한 성적인 용광로에 내어준 대표적인 영역이다. 지칠줄 모르는 성적인 욕망이 판을 치는 한국사회의 대중문화는 위험하게도 그 끝을 모르고 있다. 감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욕망이 주인을 잃었을 때 얼마나 주체 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르고 있다. 그리고 급기야 모두 무감각해져 버렸다. 현재 지구상에서 한국만큼 자극적인 나라는 흔치 않다. 서구는 차라리 벗었다. 그래서 덜 자극적이다. 한국 사회는 벗지 않았다. 그러나 안 벗은 한국의 대중문화가 더 자극적이다. 




세계 어느 주류 언론을 보아도 한국의 신문, 소위 정론이라고 하는 신문의 사이트들 처럼 화보 사진들이 즐비한 주류 언론 사이트는 없다. 세계 어느 모터쇼를 가 보아도 자동차보다 미니스커트의 아가씨가 더 많은 모터쇼는 없다.  세계 어느 야구장과 농구장, 각종 경기장을 가보아도 스트립쇼를 방불케 하는 치어리더들이 안무를 온 가족이 보는 나라는 없다. 유럽에서는 동유럽이나 가야 그런 스트립쇼를 볼 수 있다.미국의 미식축구의 치어리더는 대학의 자부심이었겠지만, 이제 한국 프로 구단의 치어리더들은 그들의 돈줄이다. 




미성년 아이돌(Idole)을 벗기는 것은 당연해 졌고, 영화제마다 누가 더 벗고 나오는지, 또 그래서 이번엔 누가 검색어의 1위를 차지하는가가 그 영화제의 수상작보다 더 주목을 받는다. 이렇게 벗겨놓고 사회적 책무까지 얹으려고 홍보대사에 위촉한다. 언제나 가장 역설적인 장면은 홍보대사에 뽑힌 소녀스타들의 한결 같은 짧은 치마를 입고, 그 단체의 주체는 양복에 꽃까지 꼽고 같이 사진 촬영에 임한다. 마치 사회지도층임을 자임하며 대중에게는 ‘금욕’을 요구하고, 그 문건을 룸 싸롱에서 정리하는 이들의 역설과 같다.




아이돌 스타들의 노출 제한과 같은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사회가 ‘예술’과 ‘외설’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데 제약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것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0여년 전 ‘까미유 끌로델’이라는 영화 속에서 로뎅의 모델이 나오는 장면을 보카시 처리(모자이크 처리) 하던 검열 수준은 아직도 그대로 이다. 불행히도 10년 전 영화’거짓말’때에 일어났던 논쟁을 두고 김규항이 이야기한 탄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 어느 시대든 검열자들이 내세우는 두 가지 핑계는 사회안전과 도덕이다. 우리의 경우 사회 안전은 주로 반공으로 표현되어 왔지만 이젠 그 반공이 얼마나 맹랑한 반공이었는가가 대체로 밝혀진 편이라 새삼 말하기가 쑥스럽다. 도덕은 주로 청소년 문제로 표현되고 있다. 나는 청소년들에게 추하고 부도덕한 현실을 보이는 일이 그들의 정서 함양에 해가 된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한다. 이 나라의 성인들은 그들에게 곱고 바른 것을 많이 보여줄 의무가 있다. 문제는 청소년에게 해를 주는 현실이 ‘예술작품 속의 현실’인가 ‘실제 현실’인가 하는 점이다. 청소년들이 24시간 숨쉬는 실재의 현실엔 어떤 도덕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판에, ‘청소년을 위해’ 소설 한 편, 영화 한편, 속의 도덕을 따지는 일이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것은 단지 어젯밤 술집에서 남의 딸을 희롱한 이 나라의 성인 남자가 오늘밤 제 딸이 같은 일을 당할까 노심초사하는 눈물겨운 부성에에 봉사하는 일일 뿐이다. » 


(김규항, 쪽의 거처, ‘아웃사이더를 위하여’ 중에서, 영화언어, 2000년, 51-52쪽)








19세기 파리에서 21세기의 한국까지




금융자본이 우리의 주머니를 비워 버린다면, ‘미디어’를 주무르는 대중 문화의 힘은 우리의 머리를 비워 버린다. 그저 관음증이나 훔쳐 보기 정도의 차원이었던 성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대중 문화는 이제 전면에 나섰다. 사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9세기 파리라는 도시에서 이미 보들레르는 다다를 수 없으나 끊임없이 욕망하게끔 하는 용광로와 같은 파리를 보았다. 그리고 이제 2세기가 지난 지금 한국은 19세기 파리의 파사쥬에나 존재했던 쇼우 윈도우와 매음굴이 대중문화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보들레르의 이야기는 벤야민에 의하여 폭넓게 연구되었고, 또 강신주에 의해 탁월하게 분석된다. ‘상처 받지 않을 권리’ 에서 그는 19세기의 파리의 풍경을 우리의 시대와 비교하며 예리하게 묘사한다.




“인간의 허영심을 부추기는 것은 산업자본에서는 사활을 건 문제입니다. 사람들의 허영심을 자극해 상품에 대한 욕망을 증폭시키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 것도 분명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벤야민이 지적했듯이 19세기나 20세기 초에 아케이드나 백화점은 허영의 각축장이자 욕망의 해방구 노릇을 톡톡히 수행 했습니다. 198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 그런 역할을 수행한 곳은 다름 아닌 강남 압구정동이었지요, 유하가 “압구정동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이라고 노래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19세기 파리에서 20세기의 압구정동을 거쳐 그 찌든 욕망들은 이제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 ‘이미지’와 함께 ‘미디어’를 통해서 말이다. 19세기에 파리의 아케이드(arcade) 는 그런 풍경이 모여있던 곳이었다. 세월이 지나고 기술이 발달했다. 이제 19세기의 파란 하늘이 보이던 거대한 유리 천정과 화려한 상품 진열장들로 가득 찼던 아케이드처럼, 우리 머리 위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새로운 풍경은 바로 ‘미디어’이다. ‘미디어’를 둘러싼 이야기와 ‘이미지’까지 많은 학자들에게 연구되었다. 멕루한은 ‘미디어는 마사지’라고 이야기했고, 레지스 드브레는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이미지’가 가진 힘과 왜 인간이 ‘이미지’에 집착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지한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이미지와 미디어는 꿈틀거리는 욕망과 함께 빠르게 진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력의 가장 극단적인 상황까지 예견 했던 이는 바로 기 드보르 였다. 그는 이미 60년대에 이러한 미래 사회를 ‘스팩터클’이라 규정짓고 일찌감치 적나라하게 분석하며, 그 자신 또한 그 그물에 걸려들지 않으려 철저히 칩거하였다. 그러나 이 명석한 자본에의 욕망은 이러한 연구들마저, 카멜레온의 보호색처럼 자신을 위장하는 피부로 바꾸어 버렸다. 예리하고 탁월한 분석들이 난해한 사회학이라는 표피를 싸고 대중에게 소비되는 동안, 설명되는 동안, ‘이미지’라는 범인은 이미 사라져 버린다. 알리바이는 남겼지만 잡을 수는 없다. ‘미디어’라는 심증은 확고한데, 물증 또한 확고한데, 실체는 없다. 급기야 스펙터클사회를 실랄하게 분석하며 그 자신이 그 꾀에 빠지지 않으려 철저히 칩거했던 기 드보르 마저도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전집이 DVD로 발매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의 전작이 고스란히 스펙터클 사회에 편입되는 것을 막지 못한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못하게 된 셈이다. 스펙터클의 그물에 꼼짝없이 집어 삼켜진 것이다.




복제 기술이 발달하자 이미지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수 백장의 사진이 한 순간에 가능해지고, 2시간의 영화 한편이 세계를 휩쓴다. 스크린 쿼터 당시 이미지를 잃으면 세계를 잃는다는 구호와 함께 제국주의에 대항했던 구호는 이제 고쳐져야 한다. 상대는 이미지를 가진 제국이 아니라 그 제국과 이미지를 함께 주무르는 ‘욕망의 메커니즘’, ‘욕망의 체제’이다. 이미지와 욕망을 이용해먹는 이들이다. 금융자본이 국경을 초월하여 움직이는 것처럼 이미지를 주무르는 세력 또한 국경을(그리고 국적에) 의지하지 않는다. 미디어 세상을 두고 “21세기는 이미지를 빼앗기면 세계를 빼앗기게 된다.”고 말한 김정란의 열변 이 이제 식상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우리의 관리를 떠나 이미지는 이제 스스로를 생산하며 춤춘다. 그리고 그러한 이미지와 미디어는 ‘돈벌이 제일주의’를 만나 기하급수적으로 증식된다.








아이돌(Idole) 과 거대한 분묘(墳墓) 그리고 자발적인 순장(殉葬)




아이돌(Idole)이 있다. 아이돌(Idole)은 이러한 스팩터클들의 주인공이다. 합법적인 제물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eidôlon , 그 뜻은 ‘죽은 자의 유령’이다. 정확하다. 허상인 것이다. 대중들이, 소녀들이 만나는 훈남, 꽃 미남은 철저히 이미지에 둘러 싸여있는 가상의 존재이다. 즉 죽은 허상이 된다. 그들도 화장실을 갈 것이고 입 냄세 나는 아침을 맞이할 테지만 그것들은 철저히 가려져 있다. 더러움이나 악함은 전혀 없는 순진 무결한 결정체로 소녀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그들이 울면 소녀들은 같이 울고 웃으면 같이 웃는다. 꽃다운 미녀들 또한 마찬가지다 허벅지를 다 내놓은 섹시한 그들에게서는 어떤 추한 모습도 연상되지 못한다. 아름답거나 섹시한 부분 이외의 다른 부분도 철저히 감추어져 버린다. 철저히 미적인 루브르의 비너스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팔 없는 비너스가 아닌 총천연색의 여신이 되어 몸을 드러낸다.




과거의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이란 모두 무덤을 장식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예술 작품’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에는 말이다. 모두 죽은 자의 영생을 위하여 무덤을 꾸미고, 그를 위해 제사와 제례를 벌인다. 바로 원시 사회의 분묘(殉葬)와 제사(祭祀), 바로 원시사회의 스펙터클이다. 마치 오늘도 같지 않은가? 죽은 자와 같은 속이 텅 빈 아이돌(Idole)을 세워두고 온갖 치장과 잔치를 벌인다. 과거의 흑백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이장님의 집으로 모여야 했지만 이젠 이런 풍경은 온 세상에 퍼져 있다. 집집마다, 방방마다, 지하철에서도, 거리에서도 직장에서도 컴퓨터 화면이 아니면 작은 휴대폰으로 아이패드로 우리는 그 속에서 활보한다. 우리의 정신줄을 그 속에 놓아버린다. 매트릭스의 워쇼스키 형제의 진단은 너무도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이제 디카프리오가 해매던 ‘인셉션’에서처럼 현실에서 도피하여 미디어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모두 잠을 청한다. 




세상은 거대한 분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그 거대한 분묘로 걸어 들어간다. 자발적인 순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랬다. 순장(殉葬)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죽은 자를 위해 산 자를 같이 묻었다던 그 고대의 ‘순장’이 이제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안은 현실보다 화려하고 고통 또한 없으며, 오히려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줄 만큼 자극적이다. 그 분묘로 입장할 수 있는 인터넷과 같은 미디어기기만 있으면 된다. 그런 기기가 없거나 그 체제가 파괴된 사회에 있는 이들, 그리고 아주 극소수의, 거대한 미디어라는 분묘를 지각하고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분묘 속을 방황한다. 현실의 파괴로 그 가상의 공간이 깨어지지 않는 이상 우리는 그 속을 나오지 못한다.




한국사회는 가장 자극적이고도 성적인 분묘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허술하기까지 하다. 성찰 없는 법망은 자신의 사이트에 신체를 드러내는 행위에는 처벌을 가하고 법망을 피해 행해지는 나체 연극에는 말이 없다. 극장은 입장객의 카메라 단속에만 바쁠 뿐이다. 분묘안에서 미디어의 시선 역시 제한이 없다. 영야 유괴에 민감한 서구 사회에선 부모가 아닌 성인이 아이들의 사진을 찍는 것 조차도 상식차원에서 엄격히 제제한다. ‘아이들’을 향한 시선이 철저히 관리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유아’라는 뜻의 ‘베이비’와 섹시한 ‘글래머’가 합성어를 이루어도 웃고 떠든다. 누구 하나 어색해 하지 않는 이 표현은 서구의 입장에서 보면 거의 ‘페도필(pédophil : 소아성애, 소아성애 도착자,)’에 가깝다. 신체의 일부를 ‘꿀’과 합성하고도 당사자는 행복해한다. 행정구역상 ‘도’를 책임지고, 대선에 나가는 인물의 입에서 신체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이 튀어나오고, 한 사람이 입법기관이라는 국회위원은 ‘몸 팔기를 권하는 사회와 그 문화’의 극단적인 상황을 대학생에게 ‘친절히’설명해주다 덜미가 잡힌다. 올림픽의 매달만큼 리포터의 의상과 몸매에 관한 기사로 도배가 되는 한국사회의 관음증은 끝없이 진화한다.








몸 팔기를 권하는 문화




몸을 팔기를 권하고 있다. 미디어 안에서 가상의 세계에서 몸을 팔게 하고, 몸을 팔도록 각본이짜여지며, 또 모두 팔고 있는 몸을 보도록 한다. 욕망의 체계는 우리를 끊임없이 미디어속의 세계에서 배회하게 만든다, 참지 못하고 돌출하여 현실로 튀어나오면 피범벅으로 그 실체를 드러낸다.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지만, 사회는 들썩이지만, 그러나 미디어는 아랑곳 하지 않으며 새로운 이미지로 그 피범벅을 덧칠하고 미디어의 드라마는 비슷한 내용을 재미있게 복제하며 우리를 무뎌지게 만드는 AS(애프터 서비스)도 잊지 않는다.




사회전체가 이 물결에 휩쓸리고 있다. 예쁘지 않으면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 “아름답지 않은 것은 용서되지 않는다.”는 잔인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고 분묘를 벗어난 현실에서 생계를 위해 실제로 몸을 파는 이들의 인권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인권은 철저히 무시하고 돌을 던지며 분묘 안에선, 미디어 안에선 합법적인 매춘을 키우고 있다. 도시한복판에 백화점이 들어서자 생계를 잃게 된 집창촌의 여성들이 살기 위해 나서도 사회는 외면한다. 사회는 암암리에 매춘을 권하며 성 매매 종사자들에게는 현실의 돌을 던진다. 이제 사회 전체가 유곽이 되어있는데도 말이다 차라리 법으로 관리될 유곽을 허용하는 것이 사회전체가 보이지 않는 유곽이 되는 길을 막는 길처럼 보인다.








아이돌(Idole)을 보호해야 한다.




먼저, 아이돌(Idole)을 보호해야 한다 아이돌(Idole)을 보호해야 아이들이 보호된다. 무협지에서 독침을 맞은 주인공을 치료하는 의원은 독초의 ‘십보(十步)’이내에 해약이 있다고 말한다. 맞다. 이 상황의 해결책 또한 그 분묘 안에 그 ‘상상계’ 안에 그 미디어 안에 존재한다. 매트릭스의 네오가 다시 매트릭스 안으로 들어가 ‘최후의 결전’을 벌이듯이 그 안에서 부수어야 한다. 




아이돌(Idole)의 보호가 문제 해결의 한 시작이다. 아이돌(idole)의 껍질을 벗겨내고 그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을 잠깐이나마 깨울 수 있다.. 19금의 허상 속에서 발음하기조차 낯선 청소년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아이들의 겹겹으로 싸여진 허상을 깨는 방법 역시 그 안의 텔레비전 안의 미디어 세상에 있다. 그 한 예가 ‘예능’이다. ‘예능’은 언젠가부터 미디어 속의 허상들에겐 ‘통과의례’처럼 되어왔다. ‘예능’역시 ‘짜맞춘 각본’에 의해 움직일 테지만 때때로 예기치 못한 “상상계”와 “상징계” 의 틈바구니를 현실을 살짝 드러낸다. 예능 프로에 나오는 아이들은 미니스커트와 요염하게 치장되어 있지만 한결같은 순박한 고등학생들이다. 미쓰 에이의 수지는 뮤직비디오에선 요염한 여성이지만 예능에서 입을 열면 순진한 소녀다. ‘힘들었다.’며 우는 모습은 영락없이 어린애다. 그렇게 그 존재의, 실제의 모습이 살짝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이 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능이 그 틈새를 알아 체고 다시 ‘각본’으로 돌아가면 그들의 실체는 다시 사라진다. 




따라서 연출가들 피디들의 역할이 중요해 진다. 지각 있고 양심 있는 이들의 연출이 관건이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력은 크다. ‘나는 가수다’로 ‘공정한 게임’을 갈망하는 대중의 요구를 드러내 보인 ‘쌀집 아저씨’ 김영희는 자신이 ‘피디(PD)’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사회를 바꾸고 싶어서였다.”고 말했다. 맞다, 그들은 사회를 바꿀 수 있다. 그 효과는 크고 빠르며 재밌다. 오래전 ‘이경규가 간다’는 사회적 양심을 부채질 했었다. 인문학 도서 100만권을 무상배포 하느니 강호동이나 유제석을 교육시키는 편이 빠르다. 윤동주에 얽힌 비화를 문성근의 입을 통해 ‘무릎팍’에서 듣는 것은 현대사에 관심 없는 대중에게 가장 탁월한 교육이었으며, 한비야의 입을 통해 100원의 가치와 세계의 참상-정확히 ‘분묘’ 바깥의 실제 세상을 이야기 하는 것은 보기 드문 경우였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안철수를 만든 것도 ‘무릎팍’이며, 지난 대선구도를 정리하는데 일익을 담당한 것도 ‘힐링켐프’였다. 이들의 영향력은 더 막강해 질것이고, 따라서 그러한 이유로 메르캉틸리즘의 마수가 곧 덮치거나 이미 스며들고 있을 것이다. 이미 거의 종속되어버린 이탈리아처럼 되지 않으려면 경제적으로 독립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새 삼켜져 버릴 것이다.




문화산업의 고삐를 죌 수 없는 것은 이미 사회의 고삐가 풀려 버렸기 때문이다. 그 사회가 그 문화를 낳는다. 우리의 사회가 이미 매음굴이 되어버린 이상, 가장 화려한 홍등가는 영악한 후기 자본주의를 포주로 두고 있는 미디어를 위시한 문화 산업인 셈이다. 따라서 이 매음굴이 단속이 필요하다면 미디어를 잡을 일이 아니라 그 사회를 먼저 보아야 한다. 








외설과 예술, 그리고 인문학적 인식




한국사회는 예술과 외설의 구분에서 조차 20여년 전의 영화 검열 수준의 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발전된 의식이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보자, 탑 모델인 케이트 모스는 세계 최고의 사진가들과 작업한 사진집을 출간했다. 그 사진집의 앞부분에는 케이트 모스의 전라 사진이 등장한다. 아예 성기를 벌리고 당당하게 서있다. 아마도 그 사진집은 한국의 문화적 잣대로는 심각한 외설일 것이다. 출간 조차 힘들지 모른다. 그런데 어떤 사회에선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녀의 사진집 도입부의 그러한 도발적인 포우즈와 사진들은 우리가 그녀의 몸을, 또 그 몸을 찍은 사진들을 직시하도록 이끈다 우리는 그녀의 몸을 숨어서 보지도 않으며, 가리워진 욕망을 찾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의 작업은 우리가 그 여성의 몸을 통하여 온전히 그 몸을 보게끔 이끈다. 그 자체로 받아들였을 때 우리는 숨어서 볼 필요가 없다. 보여주기 위한 몸과 팔기 위해 내 보여진 몸은 다르다. 




유럽 가요계의 스타인 밀렌 파머의 경우 데뷔 초기에 만들어진 뮤직비디오에 전라로 등장하며, 음모까지 노출된다. 그것은 노이즈 마케팅이 아니었다. 파머의 초창기 뮤직 비디오는 영화수준의 작품성을 인정 받을 만큼 탄탄한 스토리를 갖고 있었다. 프랑스 지성계의 스타인 앙리 레비의 부인이자 오페라 가수인 아리엘 동발의 경우도, 세자르 영화제의 사회를 맡을 정도의 국민 배우인 발레리 르메르시에도 이미 영화에 전라로 나왔다. 그러나 그들의 전라 사진이 인터넷을 떠돌지도 않으며 누구도 그들의 작업을, 그 선택을 외설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돈을 목적으로 벗지 않았다이러한 외설과 예술의 정확한 구분을 갖게 하는 용기 있는 표현들과 그것을 올바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자리잡혔을 때  사회의 노출에 대한 시각과 여성의 몸에 대한 그릇된 시각은 교정된다. 프랑스에서는 몇 년전 유방암 캠페인을 위하여 10명의 여성 스타가 상의를 벗었다. 물론 한국에서도 유방암 캠패인을 위해 여배우들이 흰 티셔츠를 입고 캠페인을 열기도 했다. 아마도 그 정도도 용기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프랑스의 그 캠페인에 참여한 스타들은 모두 가슴을 노출했다. 그런데 그녀들은 한물간 스타들이 아니었다. 노이즈 마케팅이나 불러 일으키려고 상의를 탈의한 것이 아니었다. 방송 경력 30여년의 간판 앵커 우먼에서 프랑스의 국민배우 제라르 드 빠르디유의 딸인 쥴리 드빠르디유 그리고 탑 모델인 엘자 질버스타인과 에스텔, 세자르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라시다 브라크니, 스페인 출신의 개성파 배우 로시 드 팔마 등 기라성 같은 톱스타들이었다.




이러한 인문학적인 사회의식이 가져오는 것은 단순히 노출에 대한, 여성의 몸에 대한 인식의 변화만이 아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중이 익명의 미디어 세계에서 의식을 갖을수 있는 토대를 제공 한다. 사회 안에서 노출과 관음증적인 시각이 교정되어있지 않은 경우, 인터넷을 비롯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는 더더욱 통제가 되지 않는다. 주당 성교육 10시간을 15시간으로 늘린다고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규제를 늘린다고 바뀌는 것도 없을 것이다. 희망을 가져볼 수 있는 것은 인문학적 인식이며 의식이다. 몇 해 전 프랑스의 스포츠 계의 대형스타의 사생활을 담은 사진이 노출되었다.-누군지는 밝히지 않겠다. 올림픽의 매달을 연이어 수상한 스포츠계의 별이었다.- 그녀의 사생활은 담은 사진은 노출되었지만 회자되지 않았다. 아마도 한국 사회였다면, 그 스타이야기로 도배가 되었겠지만, 구글에서도 찾아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인터넷 언론 매채도 황색 언론에도 회자 되지 않았다. 그 선수는 은퇴했고 아이를 가졌다. 그러나 그녀의 사진이 노출된 사건은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노출사진이 유출되면 그 주인공이 아예 시장으로 나와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출을 원하지 않는 당사자들의 사생활을 보호해 줄줄 아는 사회적 의식이다.


. .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포르노의 경계를 설정하는 일이다. 한국의 대중문화 속에서는 포르노는 존재하지 않는다. 엄연히 미디어와 인터넷 상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 자체가 가리워져 있다. 이것은 위험하다. 이미 방송과 언론, 국회에서 마저도 ‘야동’이라는 단어가 분명히 유통되고 있음에도 ‘포르노’의 존재는 애써 무시된다. 포르노의 경우 범위와 경계가 비교적 뚜렷하며, 서구의 경우 어느정도 제제-헐리우드에서의 콘돔사용이라든가 일본 AV에서의 모자이크 처리등-가 가능하다면, 야동은 그러한 제제나 설정이 불가능하다. 철저히 익명성과 법적 제도권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포르노의 문제에 대하여 권택영교수의 지적을 들어보자.




“잉여쾌락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느냐에 따라 도착증과 같은 강박적인 반복과 판타지를 가로지르는 느린 반복이 나타난다. 우리는 포르노를 보면서 혐오감을 느끼지만 시간이 흘러 그 장면을 상상 속에서 재현할 땐 성적 욕망을 느낀다. 베일을 버긴 혐오스러운 ‘그것’을 주체가 상상 속에서 재현할 때 그것은 다시 판타지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포르노를 암묵적으로 허락했고, 가족을 중시하는 빅토리아 사회에서도 매춘을 암묵적으로 허가했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파국을 피하고 정상적인 가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권택영교수는 위와 같은 분석과 함께 “포르노를 보면서 관객이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바라보는 대상이 혐오스러워서라기 보다 스스로가 대상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라고 진단하며, 다음과 같이 재언한다.


“그렇다면 포르노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가? 왜 문명과 이성은 매춘과 포르노를 치우지 못하고 암묵적으로 그것을 인정하는가. 인간의 상상력은 그것을 잉여 쾌락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되돌아보았을 때, 다시 말하면 주체로 되돌아와 상상 속에서 돌이켜 보았을 때 포르노는 잉여 쾌락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포르노가 부재하고 그 자리에 익명의 ‘야동’의 존재는 것은 먼저 그것을 보는 주체에게 ‘정확한 혐오감’을 안기지 않는 상황을 초래한다. ‘암묵적인 유행’정도로 치부된다. 그리고 정체된 매체로서의 ‘포르노;가 아닌 유동적인 ‘야동’은 다시 주체가 상상속에서 돌아갈 자리마저 뺴앗고 그저 상흔으로 남는다. 주체는 계속 그 ‘상상계’적인 ‘야동’과 ‘엄격한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포르노와 비포르노의 경계가 이처럼 애매한 경우 그 사회는 다음 단게를 준비하지 못한다. 다시말해서 포르노의 사회적인 정당한 진입이다. 매춘의 합법화와도 같은 문제이다. 최근 개막된 깐느 영화제에서 프랑스의 감독 프랑스와 오종은, ‘자발적인 매춘’을 주제로 한 영화를 들고 나왔다. 이러한 사회적 담론이 한국에선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미 한국 사회에선 자발적인 매춘이 공공연하며, 문화산업도 그에 발 맞추어 ‘몸 팔기’가 관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는 ‘예술가는 창녀’라고 말했다. 고객에게 성적 만족을 주는 창녀처럼 예술가 역시 대중을 기쁘게 해주는 존재였다는 뜻에서였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렇기도 하다 모두 광대인 셈이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광대’를 통한 즐거움이지 돈을 위해 몸 팔기를 강요하는 사회는 아니다. 왜냐하면 대개의 경우의 ‘매춘’은 선택이 아닌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 주체 또한 보호되는 것이 아닌 은폐되기 때문이다. 

(2013. 5. 20)



                                                                                                                                 -6년전의 글을 올린다. 

                                                                                                                  시간이 흘렀지만 변한것이 없다.

                                                                                                             셜리, 그리고 구하라의 명복을 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에펠탑 직원용 벤치를 보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