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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창작 충만 시대의 예술

풍요로운 창작의 시대와 예술, 예술작품 그리고 예술가

창작 충만 시대의 예술

풍요로운 창작의 시대와 예술, 예술작품 그리고 예술가


“아 ~ , 그런데 생각난 게 하나 있다! 아까 철학자 김용옥 선생님이 예술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그것에 대해선 대답 못했지만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게 하나 생각났다. 즉, 앞으로 오는 인류사회에 있어서 아티스트의 역할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컴퓨터 문화가 점점 증대되면 인간이 할 일이 없어진다. 생산은 많아지는데 소비는 한정된다. 여태까지는 이런 생산의 잉여를 처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전쟁이었다. 그런데 이젠 전쟁도 쉽게 할 수가 없다. 그러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삶의 이기는 모두 쉽게 포화되어 버린다. 냉장고도 다 사버리고, 자동차도 다 사버리고, 이젠 이런 건 20년이면 끝난다. 피씨도 얼마 못 가서 다 팔아먹고 새로 팔아먹기가 어렵게 된다. 무슨 지랄을 해본들 인간의 소유는 한정이 있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예술이란 뭐냐? 폭력적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 소비를 조장시키는 이다.  전쟁이나 공해로 연결되지 않는 인간의 소비욕을 돋아주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예술가의 임무는 어떻게 필요 없는 소비를 창안하느냐하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여태까지 자본주의적 가치를 부정하는 방향에서, 즉 자본주의와 안티테티칼한 입장에서 자기들의 이상주의를 추구해왔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예술가는 신생 자본주의의 선봉장이 될 것이다. 공장에 쌓인 물건을 소비시켜주고, 필요한 돈의 회전을 만들어 주게 될 것이다. 이런 나의 생각에 대해 나는 도덕적 好惡(호오)를 알지는 못한다. 우리나라에는 너무 선비가 많아 입뻥끗하기가 어렵다. “                                                                      (김용옥, 석도화론, 253페이지, 백남준의 말)



1992년 8월, 그러니까 28년 전 백남준의 말이다. 과천 현대 미술관에서의 강연중 철학자 김용옥의 질문, "예술이란 대체 무엇 입니까? “란 질문을 받고 난 뒤, 답을 하지 못하고 한참 뒤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답이다.


백남준 선생의 예언처럼,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이 소비를 앞지른 것은 이미 오래전이고, 권택영이 탁월하게 정리한 ‘잉여 쾌락의 시대‘에서 말하듯이, 같은 물건이어도 더 예쁘고, 더 아름다운 물건, 즉 잉여가치를 찾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더 오래전 철학자이자 파리 국립 미대의 학장이었던 이브 미쇼가 선언했듯이, ‘미학의 금휘 환향‘이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미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선언의 저작은 ‘가스 상태의 예술‘이었다. 손에 잡히는 물건이 아닌 우리의 주변을 채우고 있는 공기 그리고 가스처럼‚ ‘미적인 것‘들이, ‘예술적인 것‘들이 우리 주변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 우리는 ‘코로나 19‘사태를 겪으며, 이동제한령으로 집 밖을 나가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루어낸 다양한 창작물들을 보게 됐었다. ‘이동‘이 ‘제한‘되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낸 결과물들이었다. 여기서, 앞서 언급한 백남준의 발언을 상기해 본다면? 만약 인류가 또는 개인이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온다면, 모두들 무수히 무료해질 것이며, 많은 창작품들이 쏟아지지 않을까?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창작‘에 시간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아도 행복한 결말이다. 마치 마르크스가 꿈꾸었듯이 오후에는 낚시를 하고 밤에는 비평을 하는 그런 세상 말이다. 그런데 이런 세상이 혹여라도 온다면, 아니 이미 왔다면, 실업자가 되는 직군이 하나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술가‘가 아닐까? 


어쩌면 백남준 선생은 예술가들이 자본주의의 선봉장이 될 거라고 하셨지만, 대중 전체가 창작의 선봉장이 된 마당이니 예술가들이 창작에 시간을 쓰게 된 인류보다 한걸음 아니 반걸음이라도 더  앞서가기란 그만큼 어려워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엔 어무나 아름다운 것들이 넘쳐나다 보니, 예술가들이 무엇을 만들지 않아도, 그들의 부재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닌가?


“웬만한 작품보다 낫습니다. “ 알루미늄 창문틀 상점의 쇼우 윈도를 한참을 바라보시던 H선생님께 내가 던진 말이었다. “그래 맞아, 맞아, 우리가 오늘 저녁에 한이야기가 그것이었지. “ 함께 저녁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H선생님은 그림컬랙터셨다. 그분 댁엔 이브클라인의 작품부터 샤갈의 그림까지 있었다.  머리가 복잡하실 때는, “저기다가 그냥 이우환이꺼 하나 걸자 “하셨더랬다.  그날 우리가 저녁식사 자리에서 나누었던 대화는 현대미술에 관한 이야기였다. 작품 가격이 너무 값이 올라서 차라리 직접 그림을 그리시는 게 낫겠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씀을 하셨고, 작업을 하는 입장의 나로선, 딱히 뾰족이 답이 나오지 않는 ‘현대미술‘처럼, 어렴풋한 말들밖에  할 말이 없던 저녁이었다. 그리고 식당을 나서고 거리의 상점을 유심히 보시던 선생님께 내가 던진 말 “웬만한 작품보다 낫습니다. “란 그 한 문장이 그날 저녁의 그 무기력하고 어렴풋한 대화를 마무리하는 뚜렷한 결론이었다. 정말이지, 요즘 만들어지는 제품들은,  공산품들은, 웬만한 현대미술 작품보다도 아름 다고 멋지다.


자동차나, 패션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사물들이 아름답다. 어딘가 아리송해야 ‚‘작품‘이 되는 우리 시대의 예술, 현대미술이 가장 추한 것일 때가 오히려 많다. 예술이 ‚미학의 경계를 지켜내지 못하고 소비산업에 안방을 내준 꼴이다. 그리고 풍요로운 창작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과연 예술은 어떤 의미일까? 자동차에서 시동을 걸기 위해 불꽃을 튀는 점화 플러그처럼, 그저 소비산업이라는 엔진을 돌리기 위한 불꽃 정도일까? 또 정말 그렇다면, 예술가들이란 또 어떤 존재들이며, 어떤 길을 가게 될까? 불꽃을 튀어 시동을 걸고 산화되는 그런 존재가 된 것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서 떠나보려고 한다. 풍요로운 창작의 시대의 예술, 예술작품 그리고 예술가... 에 대하여.


                                                                                                                                 -나는 파리의 우버 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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