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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망국론(1/3)
영혼을 Msg로 물들이다...

풍요로운 창작의 시대와 예술 12

Msg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 유해성이 낮다 해도,

라면수프를 주기적으로 입안에 뿌려 넣지는 않는다.

넷플릭스까지 가세한 '관찰예능'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라면수프를 입안에 털어 넣는 느낌이 들었다.

인공 조마료로 영혼을, 마음을 물들이고 있는 상상이 들곤 한다.


그래서, 나는 예능을 보지 않는다.

나의 감각이 '인공'에 절여지는 기분이 들어서다.

한 시대의 문화가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면,

우리는 어쩌면, 강한 향신료의 맛에 길들여지듯,

인공 조미료가 가득 뿌려진 프로그램이 우리의 삶의 방식을 만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채널을 가득 채운 예능, 특히 '관음증'의 대명사, '관찰 예능'을 통해서 말이다.


처음부터 예능을 안 본 것은 아니다.

아주 오래전 이경규의 몰래카메라에서부터, 쌀집 아저씨의 나는 가수다,

알쓸신잡, 꽃보다 할배, 그리고 백종원이 맛집을 찾아가던 프로그램까지,

적지 않은 예능을 보며 살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보고싶지 않았다.

예능에 등장하는 출연자들이 '카메라'를 의식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예능이 인공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 뒤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원인에 대한 물음에 답이 된것은 아주 오래전 기억이다.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인 2001년

프랑스의 최초의 관찰 예능 프로그램이 전파를 탔다.

민영방송 M6가 제작했던 '로프트 스토리'.

남녀 동수의 젊은이들을 로프트에 가두어 놓고 24시간 관찰하는 초유의 포맷으로,

일주일에 한 명씩 탈락자를 선정하는 방식이었다.


대중의 관심이 쏠려 있던 첫 방송에서,

사고(?)에 가까운 러브라인 형성됐다.

그리고 '훔쳐보기'이라는 폭발력과 만나, 프랑스가 발칵 뒤집혔다.


생중계된 첫 방송에서 로프트, 수영장이 갖추어진 화려한 빌라에 입성한 젊은이들은 파티를 즐긴다.

그리고 수영장에 뛰어든 젊은이들 사이에서 키스장면이 카메라에 잡힌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날 시작됐다.

두 출연자는 다음날 방송 포맷에 따른 인터뷰에서,

자신들의 스킨십 장면이 모두 촬영되었고, 전국에 실시간으로 방송되었다는 사실을 전달받는다.

남자 출연자와 여성 출연자는 아연 실색했고,

그 이후 남자 출연자는 상대 여성 출연자를 의도적으로 멀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렇게 거리 두는 장면 역시 모조리 남김없이 촬영되어 전파를 탔다.




처음으로 카메라가 설치된 공간에 일반인들이 던져진 상황이었다.

첫날 스킨십을 나누고, 그 사실이 알려지자 여성 출연자를 차버린 듯한 스토리가 형성되며,

남성 출연자에게는 비난의 화살이 여성출연자에게는 동정의 응원이 쏟아진다.

스캔들의 두 주인공의 운명 역시 순식간에 극명하게 갈린다.

남성 출연자는 첫 주에 탈락했고, 여성출연자는 끝까지 살아남아 '우승'했다.


남자출연자는 프랑스 상류층이라는 소문까지 언론을 도배하며, 전형적인 나쁜 남자가 되고,

여성 출연자는 미혼모로 스트립걸의 경력이 있다는 소문까지 더해져서,

두 인물을 둘러싼 수만은 억측과 추론과 함께 이야기를 부풀려져 간다.


이 세대는 방송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의 존재와 방식을 '인지' 하지 못했던 새대의 출연진이었다.

처음 겪는 상황이기에,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어떻게 촬영되고 전달되는지 몰랐던 세대다.

그러나 이 첫 프로그램 이후, 감시카메라가 존재하는 모든 프로그램에선,

이젠 출연자들은 그 '카메라'의 존재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평범한 출연자는 그 카메라를 '조심'하고, 영악한 출연자는 그 카메라는 '이용'한다.


결과적으로, 아니 태생적으로 '관찰 예능'의 출연자들의 행동은 모두 '카메라'를 의식한,

'카메라가 의식된', '인공적 행동'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런 방식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모두,

'인공적인 상황'을 '자연적인 상황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공간,

조미료로 만들어진 공간, msg의 공간에 안착하는 것이다.


지금은 어떨까?

모두 카메라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다. 모른 척할 뿐, 쳐다보지 않을 뿐 의식할 것이다.

늘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나영석 사단의 프로그램들은 곰탕같이 늘 같은 패턴이다.

사람과 상황만 다를 뿐 '인공'의 상황을 연출한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수십 년째 변하지 않는 유재석의 존재나

나눠먹기식으로 짜이는 연말 시상식까지,

재작에서 유통 그리고 포상까지, 인공의 프로그램은 완성된 틀로 똑같이 움직인다.


보는 사람들은 만들어진 화면들에 익숙해지고,

만드는 사람들은 만들어낼 화면들에 익숙해진다.

정신적으로 보는이나 만드는 이나 모두 '인공적'인 웃음과 그 결과물에 길들여지고,

재각기 다른 모든 사람들이 모두 똑같아진다.

교육이 먼저 획일화로 밀어버린 독창성과 개별성이 결여된 토대 위에

다시 예능이 똑같은 씨앗을 심어준다.

그리고 자라서 광고가 추천해 주는 똑같은 메뉴를 먹고 자란다

매트릭스의 세계가 따로 필요 없다.

의식은 있으나 '생각'과 '판단'을 떠먹여 주는 시대,

예능망국론의 풍경이었다.

그리고 '악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다 같이 '훔쳐보고' 다 같이 '이야기한다.'






예능망국론 (2/3)

포르노 없는 포르노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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