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3일, 소연에게 현지가
내 친구이자 동료. 소연아 안녕!
오늘은 신세한탄과 장난, 혹은 뜬구름 잡는 우리의 단골 대화들에서 벗어나 조금은 일상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노트북을 켰어.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아 서로에게 심리적으로 꽤 많이 의지했던 우리의 스물 네다섯살, 너도 아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겠지? 같은 꿈을 향해서 거의 매일을 함께 했던 우리는 나중에 집 두 채가 문만 열면 이어지는 '땅콩집'에서 할머니가 될 때까지 함께 살자는 참 깜찍한 장래희망을 공유했었지. 그만큼 우리는 서로가 편했고, 오랜 시간 함께 하면서 감정 상한 일조차 딱히 없었지. 아마 그래서 우린 감정을 잘 배려해주고 이해해주는 안정적인 상대였던 서로와 평생 갈등할 일 없이 살아가고 싶었던 것 같아. 우리는 서로 익히 알고 있듯이 참 상처도 잘 받고 걱정도 늘 사서 하는 인간들이니까. 이렇게 쓰면서도 혹시 내가 널 나랑 비슷한 사람이라고 함부로 속단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되는 난 진짜 소심쟁이 인간이야.
그랬던 우리가 이제 각자 소중한 사람이 생기고, 그렇게 각자의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네. 각각 결혼 1년차, 동거 1년차 병아리들이 되어서 말이야. 세상은 이렇게 결혼과 동거를 나눠서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열심히 얘기하고 생각해본 바로는 사실 별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더라, 그렇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도 무궁무진해. 우리 둘 다 주변 친구들에게 '어떻게 그런 결정을 하게 됐어?'라는 질문도 참 많이 받잖아. 앞으로 우리의 대화가 그 답이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나는 오늘 내 배우자와 다투고 말았어. 어제부터 묘하게 기분이 오락가락 하는 배우자가 계속 거슬렸거든. 나도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이지만 갈등하는 게 싫어서 꾹꾹 눌러 참을 때가 많았는데, 상대는 그렇게 해주지 않는 것에 기분이 상하고 말았어. 몇 번을 참다가 둘이 함께 커피를 사러 나선 점심시간에, 갑자기 입을 꾹 다물더니 내가 묻는 말에 단답형으로 대답만 하는 게 빈정이 확 상했거든. 몇 시간을 냉랭하게 지낸 뒤, 갈등을 해결해보려고 대화를 시도했는데 그만 내가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했어. 오히려 나의 어떤 어떤 말과 행동이 거슬렸다는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 '고작 그게? 난 더한 것들도 참았는데?'라는 치사한 생각으로 번졌거든. 응, 내가 생각해도 난 오늘 참 구린 사람이었다. 결국 상대방은 본인을 그만 괴롭히라고 이야기했고, 며칠동안 신경쓰이고 힘들었던 개인적인 사정에 대해 이야기하더라고. 이 타이밍에 이 얘기를 한다고? 나만 이렇게 나쁜 사람을 만든다고? 아니 나를 이렇게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제일 사랑하는 이 사람이? 미리 나한테 기대줬으면 좋았을 걸, 그러면 '내가 뭘 잘못했나'하고 눈치 보지 않고 그냥 가만히 기다려줄 수 있었을텐데, 그런 생각이 잠깐 들더니 그냥 그런 생각들 전부 내려놓고 더 힘들게 하지만 말자는 생각이 들더라고.
나와 전혀 다른 감정의 파동을 가진 사람과 24시간을 붙어서 그 감정을 고스란히 공유해야 한다는 게 참 쉽지가 않은 일이더라. 나는 독립적이지도 쿨하지도 못한 사람이라 상대방이 기분이 나빠보이면 계속 눈치를 보게 되고, 그다지 유한 사람도 아니라 그렇게 눈치를 몇 번 보다가(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게 쌓이면 '내가 왜 눈치를 봐야돼!'하고 화가 나 버리거든. 이럴 때는 '그러려니'하고 넘겨주고 기다리는 스킬도 필요한데, 난 그 스킬을 세 번 이상 쓰고 나면 폭발하게 되더라. 아직 갈 길이 참 멀어. 그리고 모든 생활을 함께 하고, 내밀한 감정을 다 나누다보니 '난 이만큼 하는데 왜 넌 그렇게 해주지 않아?', '내가 너처럼 행동했으면 너도 안 참았을 거잖아!' 이런 치사한 생각을 자주 하게 돼.
결혼생활은 평생을 수련하는 일이라고 많이들 그러잖아. 계속해서 내려놓는 과정이라고. 난 그 말이 신세한탄이나 자조로 느껴져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살아보니 정말 그렇더라고. 내려놔서 불행하다는 게 아니라 응당 내려놨어야 하는 환상이고, 내려 놓고 나면 나도 그도 편해진다고 해야하나.
소연이 너는 연인과 동거하면서 가장 내려놔야겠다고 느낀 게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해.
난 '공평'에 대한 집착이라고 느끼고 있어. 그러니까 '내가 이만큼 했으니까 너도 이만큼' 혹은 '나도 이만큼은 참아주니까 너도 이만큼은' 이렇게 생각하는 거 말이야. 물론 아무리 연인 사이라고 해도 관계가 너무 일방적으로 흐르면 안되는 거지만, 어떤 관계든 공평에 대해 집착하게 되면 망가진다는 생각이 요새 자주 들더라고. 내가 참아주고 배려해주는 부분이 있듯이 상대방이 내게 베푸는 부분이 분명 있는데, 그걸 생각하지 않고 매번 불공평하다고 도끼눈을 뜨게 되면 결국 하나의 공동체를 유지해나가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아. 인생은 아무래도 이래저래 굴곡이 많을 수밖에 없으니 언제든 서로 돕고 의지해야하는 순간이 올텐데, 매번 공평함에 집착한다면 그 어느 것도 함께 이겨내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어쩌면 이건 자기반성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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