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Happy Letter May 30. 2024

내 인생 첫 ‘독자’(讀者)

브런치 글쓰기(31)


도서관에서 저녁 늦게까지 시험공부하다 보니 머리가 아프다. 이럴 때면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시험과는 무관한 ‘다른 책’을 꺼내 들어 읽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책에 빠져 잠시는 말뿐이고 한동안 손에서 놓지 못한다.


기억에 덧씌우기를 하듯 내 머릿속엔 온통 도서관을 나설 때까지 읽었던 그 책이 가장 선명하게 남는다. 나만 아는 어떤 “세상 비밀”을 적어 간직하겠다는 듯 나는 허름한 노트에 나름 그 책에서 발견한 소름 돋게 인상 깊은 문장들을 필사(筆寫)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문장 밑에는 바로 떠오르는 내 생각과 고민과 의문점을 적어 내려간다.


그 책 저자와 대면하고는 절대 용기 내서 하지 못할 질문을 적어 내려간다. 그리고 가끔씩 다시 읽어보면 마치 그 책 저자와 소통하고 있는 것만 같아 괜히 흐뭇해한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나의 메모 글들이 어느새 노트 한 권이 다 되어간다.




어느 날 그 노트가 사라졌다.


나의 독서노트 내지는 독서일기 같은 그 노트를 잃어버린 것이다. 나의 젊은 시절 내 뜨거운 가슴속 정열(情熱)을 담아 한 자 한 자 손으로 꼭꼭 눌러쓴 그 노트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시험기간 중에 평소 자주 오가는 이동 구간이라고 해봤자 도서관과 집뿐이었다. 출출해서 잠깐 들른 분식점이나 포장마차 정도다. 그곳에서도 가방을 열거나 노트를 꺼낸 기억은 없었다. 늘 들고 다니던 가방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니 그곳 또한 분실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어디서 잃어버렸을까? 돈 될 만한 것도 다시 되팔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누가 일부러 훔쳐 갔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필자는 그 당시 혹시 모를 분실을 대비해서 그 허름한 노트 첫 장에도 분명히 적어두었다. 이름이며 연락처와 그 당시에 자주 쓰던 문구 하나도 함께 말이다.


저에게는 소중한 노트입니다.
습득하신 분은 연락 주시면 사례하겠습니다.


하지만 며칠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전화도 우편도 없었다. 그 도서관에서 더 이상 시험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 생각은 온통 잃어버린 그 노트로 가득 차 있어 한동안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필자에겐 틈틈이 손수 쓴 그 노트 한 권이 어떤 다른 값비싼 물건을 잃어버린 것보다 더 가슴 아팠다. 지금처럼 노트북에, 아니 인터넷 클라우드(cloud)를 이용해 저장해 두었으면 좋으련만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없던 그 당시 그 시절 유일하게 기록하고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은 직접 쓰고 적는 수밖에 없었다.


뭔가 말할 수 없는 허전함과 허탈감에 속상한 나날들이 이어졌고 오랫동안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그 노트의 행방을 알 수가 없어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내 또래 중 누군가가 도서관이나 그 근처에서 우연히 주웠다면 연락처도 분명히 적혀 있으니 나중에라도 되돌려 주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계속 맴돌았다. 그렇게 속 쓰린 마음만 가득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그 분실한 노트에 대한 상실감이 얼마나 컸으면 지금 아직도 어렴풋이 그 학창 시절 그 일이 다시 생각날까 싶다. 그 당시 그 아픔을 잊을 요량으로 내 생각을 고쳐 먹었던 것 같다. 누가 내 노트를 우연히 습득(拾得)하고 너무 괜찮아(?) 보여 (그 “세상 비밀” 포함) 끝까지 전부 다 읽고 싶어 져 그만 집에 가져가 버리고 말았을 것이라는 둥 터무니없는 상상도 한 것 같다. 이런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당시 필자는 그런 그에게 작은 선물을 했다 치자라고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잃어버린 나의 '청춘노트'는 나를 떠나갔지만 지나던 바람에 흩날려 떠돌다 어디 땅에 사뿐히 내려앉아 새꽃을 피우는 씨앗처럼 누군가의 가슴에 내 청춘의 뜨거운 열정(熱情)이 고스란히 전해졌을 것이라 생각하기로 하고 말았다.


그때 나의 노트를 본의 아니게 우연히 훔쳐간(?) 그 사람을 내 인생의 첫 ‘독자’(讀者)로 여기고 존중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그도 밤늦게까지 내가 손으로 눌러쓴 글을 한 줄 한 줄 읽으며 - 세상 비밀만큼이나 세상 고민을 함께 고뇌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 나와 같은 감흥(感興)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적어도 그 시절 그 당시엔 그런 상상을 할 만큼 때로는 무모할 정도로 나름 뜨거운 자부심(自負心)이 있었다.



그 기억 속 그런 심정으로 여기에 나의 두 번째 "청춘노트"를 쓰고 싶었다…ㅠ












정열(情熱) :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열렬한 감정.

열정(熱情) :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

자부심(自負心) :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히 여기는 마음.(다음 [어학사전])


매거진의 이전글 잠 못 드는 그대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