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학부모 회의 때 학생 1명과 함께 온 4명의 학부모 정체는?
독일 초등학교 학기 초 어느 날 저녁에 '엘테른아벤트 [Elternabend]'라고 불리는 학급 학부모(보호자) 회의가 있어서 퇴근하고 바로 필자 혼자 참석하게 되었다. 독일 학부모 회의는 같은 반 친구들의 학부모들을 만나 인사도 하고 담임선생님 및 주요 과목별 선생님으로부터 수업, 숙제, 시험 등과 관련된 내용, 학기별 예정된 행사 일정을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참석한 학부모들과 선생님의 Q & A, 토론을 통해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다.
특히 매 학년 학기 초에 처음 하는 학부모 회의는 이처럼 주요 정보와 전달 사항, 토론도 많지만 이 회의 마지막에는 으레 1년 동안 봉사할 학부모 대표 선출을 위한 선거과정이 있다. 제일 먼저 하는 순서는 해당 대표 선출 투표를 진행할 선거관리위원장, 즉 진행자 1명과 관리위원겸 개표 요원 2명을 뽑는 일이다. 이들은 대표 후보자로 입후보할 수 없으며, 별도로 앞에 마련된 책상과 좌석으로 나와서 투표와 개표, 결과 공표까지 전체 선거진행 과정을 관리한다. 필자는 독일 초등학교 봉사직 학부모 대표 선출 과정이 아주 민주적인 절차와 방법으로 진행되는 것뿐만 아니라 참석한 학부모들이 모두 일사불란하게 진행하는 것을 보면서 그 능숙함과 진지함에 감명을 받았다.
자발적 지원자가 스스로 후보로 나서기도 하고 주위 지인들이 몇몇 학부모를 후보로 서로 추천하기도 한다. 추천받은 사람이 수락하면 예를 들어, 몇 명이 후보로 선출되고 입후보자들의 간단한 인사와 포부 소개가 이어지고 투표 인명부(해당 학급 반 학생 명부)에 따른 투표 참가자수 확인과 투표용지 배포를 거쳐 무기명 비밀투표가 진행된다. 해당 학급에 반 학생이 20명이라면 학생 1명당 기준으로 참석한 학부모도 1개의 투표권만 주어진다. 칠판 표기와 함께 개표 및 결과 발표 후, 대표로 선출된 학부모는 소감을 말하고 선거관리를 맡았던 진행 요원들은 개표 숫자에 따른 투표결과를 기록 양식지에 바로 작성하고 확인 서명한 후 개표한 투표용지들을 밀봉하여 학교에 제출한다.
학부모 회의 중에 이루어지는 이 모든 투표과정 및 결과 기록서 작성은 전적으로 학부모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선생님은 교실에 입회는 할 수 있지만 정말이지 아무런 개입이나 역할이 없고 그 시간 동안만큼은 구경꾼이 된다. 그날 학부모 회의 전체 일정 모두는 약 3시간 가까이 소요되었다.
필자가 놀란 경험을 한 것은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후인 다음번 학부모 회의 때였다. 학교 행사일정과 학부모 회의 일정이 동시에 잡혀있어 자녀들과 함께 참석하는 회의였는데, 부모님 중 한 분만 같이 온 반 친구들도 있었고,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함께 온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데 내 아이와 함께 앉아 있던 책상에서 좀 떨어진 앞쪽 자리에는 M이라는 같은 반 남학생 1명과 4명의 어른들이 한 책상에 같이 둘러앉아 크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필자는 학교 행사도 있으니 그 남학생 M의 가족과 친척들이 다 함께 왔나 보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같은 반 학부모 지인으로부터 들어보니 원래 그 M이라는 학생을 낳은 친부모는 이혼을 했고 이혼한 친부모는 각자 남자친구와 여자친구가 새로 생겼는데 M을 위해서 그날 학교 행사와 학부모 회의에 함께 참석한 것이라고 했다.
싱글맘인 M의 이혼한 어머니는 새로 동거하는 남자친구사이에 딸아이가 생겼고, 그날 필자는 자세히 못 봤지만 그 딸아이도 데리고 같이 왔었다고 한다. 결혼은 하지 않고 동거하면서 딸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그 딸아이까지 데리고 자신의 아들인 M의 보호자로서 학부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남자친구와 같이 온 것이다. 또 다른 한 명의 보호자인 전남편과 미리 연락해서 함께 왔으며, 이때 이혼한 전남편도 동거하는 자신의 여자 친구를 동반하고 그날 학보모 회의에 다 함께 참석한 것이다. M이라는 학생 1명의 학교 학부모 회의에, 그러니까 총 6명이 참석한 것이다.(남학생 M 1명 + 이혼한 M 친부모 2명 + 친부모의 각자 동거 중인 이성 친구들 2명 + M의 어머니의 딸아이 1명)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프랑스는 벌써 오래전부터 정부가 인정하는 동거 제도인 '팍스[PACS]', 즉 결혼하지 않고 함께 사는 동거 커플을 법적으로 보장하는 제도가 있다. 우리나라는 새로운 가족의 한 형태인 이런 동거를 위한 법적 제도(사실혼 관계의 법제화)나 보호 장치가 준비되어 있지 않지만 독일도 프랑스와 유사하게 여러 분야에서 '동반자' 등록과 요건 충족에 따라 법적 보호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프랑스나 독일뿐만 아니라 다수 유럽 국가들의 - 높은 이혼율도 한몫을 하겠지만 - 결혼 전 동거하는 문화는 유럽 내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사회 분위기이고 '동거라는 가족 형태'로도 세금, 사회 보장 등 여러 측면에서 법적으로 보호가 되니 굳이 전통적 방식인 '결혼'이라는 "복잡한 제도"(필요시 나중에 '이혼'이라는 원하지 않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할지도 모르는)를 택하지 않고도 자신의 가치관과 선택에 따라 가족의 형태나 삶의 방식을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우리는 시대 환경이 바뀌고 젊은 세대들의 사회 속 문화나 가치관, 의식이 바뀌어도 기성세대의 기존 제도나 관습에 얽매여 그 당면한 변화와 개선의 노력을 더디고 또 힘들게 하고 있다. 동거라는 새로운 가족 형태를 포함한 자율적 삶의 방식이나 선택의 다양성을 실현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노력은 더욱이 한참 더 뒤처진다. 그런 사회 속에서 '강제'되어 - 달리 말하자면 - 그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억압'받으며 살아야 하는 한국 사회의 젊은 세대들은 그들만의 새로운 가치 판단에 대한 도덕의식이나 개인적 이해관계 여부를 따지지 않더라도 현재 사회와 일정 부분 괴리감을 갖고 사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사회는 그저 '결혼해라, 자녀를 많이 낳아라'고만한다. 하지만 여기서 일일이 다 열거하지 않더라도 재학생들, 졸업한 취준생들, 사회 초년생들이 부담해야 하는(어쩌면 혼자 스스로는 아예 감당하지도 못할) 엄청난 주거비용, 학자금, 월/전세금 대출금 상환, 치솟는 물가, 어렵고 좁은 취업문의 구직 환경, 출신 학교에 따른 차별과 저임금, 살인적인 교육비, 육아 비용 부담 등으로 우리 사회 젊은 세대는 이미 엄청나게 고통받고 있다. 이런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젊은 세대에게 무조건 결혼하라, 아이를 낳아라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고도 이율배반적이지 않는가?
2023년 현재 연일 매스컴에서는 한국 출산율이 0.78명으로 OECD 국가 중 최하위라고 한다. 여기서 필자가 국가적 사회적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출산율 증가 방안을 상세히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2030 젊은 층들이 결혼과 출산을 꺼리는 데는 아주 명확한 이유와 배경이 있으며, 그 기저에는 취약한 경제적 여건에 따른 불안정과 불확실성 이유 이외에도 자율적 삶의 방식과 선택의 다양성을 실현하려는 욕구가 있음을, 그리고 그에 대한 그들만의 가치와 의미 부여가 분명하게 있음을 우리 모두는 제대로 모르거나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들어 취업이나 결혼, 주거 자금 마련이 더욱 어렵고 힘들어지면서 미혼 남녀 모두 혼인연령이 예전에 비해 계속 늦어지는 추세이며, 아예 그냥 혼자 살겠다는 비혼 선언이나 젊은 층 미혼 1인 가구 비율의 증가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본다. 그런데 그저 아이를 "많이 낳아라"?
우리 사회는 결혼을 하라고만 말하고 요구하기 이전에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전통적인 형태의 삶의 방식이나 가족 구성의 형태로써 결혼이라는 "법적 구속적 제도"를 더 이상 선호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그와 함께 갖고 있는 "결혼하기 싫다."라는 자율적 선택과 그러한 명백한 의지를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에 걸맞게 우리 사회 내 법과 제도의 재정비와 개선, 개혁은 몹시 시급하지만 현재 대응하는 움직임의 속도는 늦어도 너무 늦은 편이다.
위에서 극히 단적인 예로 든 독일 초등학교 학부모 회의 때 경험한 '4명의 학부모' 참석 이야기는 아직 폐쇄적인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본다. 결혼하기 전 동거는 - 최소한 현재의 부모세대는 - '발칙한' 반항으로 치부하거나 어쩌면 문란해질지도 모른다는 색안경을 끼고 다분히 부정적으로 보면서도 결혼은 가급적 모두 다, 그것도 가능하면 적기(?)에 해야 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이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우리 사회는 또 그 '강제된' 결혼으로 인해 이혼을 하는 것은 아직도 매우 부정적으로 본다. 요즘은 이혼율이 높아지고 황혼 이혼까지 증가하면서 이른바 '돌싱'(돌아온 싱글)을 예전보다는 '관대'하게 보는 편이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돌아서면 들리는 건 주로 험담이며 어떤 불가피한 연유에서의 이혼이든 아직까지 이혼 그 자체에 대한 사회적 평판이나 시선이 그리 좋지만은 않은 것 같다.
불합리한 사회가 법과 제도로 또는 관습과 분위기로 개인의 삶의 자율적 선택에 대한 자유와 권리를 제한한다면 그로 인해 초래되는 부정적 결과들은 그 원인을 제공한 그 사회에 오롯이 다시 그대로 되돌아가 더욱 심한 악영향을 끼치게 되고 만다. 우리는 언제 스스로 '우린 지금 동거 중이다.'라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언제 동거 중에 낳은 아이도 아주 기쁜 마음으로 가족, 친지 모두에게 자랑스럽게 알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