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 제목은 [실연에 관하여]라고 써두었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첫 실연"에 관한 글을 한번 써보고 싶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사랑하던 사람과의 이별(離別)에 서툴고 또 그 후유증에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가슴 아프고 슬프다. 대개 집이나 학교에서도 '첫사랑'이 어떤 것인지 배운 적도 없었지만 '첫 이별'을 어떻게 대하라고는 더더욱 배우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요즘의 "n포 세대" 청춘(靑春)은 그 이별 앞에 더 두렵고 새로운 만남도 더 망설여지고 주저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누구는 지금도 실연의 아픔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해서 죽음에 관한 글을 쓸 수 없는 것이 아니듯 - 최근 들리는 안타깝고도 끔찍한 뉴스들을 들으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을 지극히 개인적인 단상임을 전제로 짧게나마 몇 줄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일방적인 고백을 하고 '거절'당한 후 상심하는 경우도 많겠지만, 여기서는 짝사랑이나 '외사랑'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좋아해서 사귀었고 얼마 동안 교제하다가 어느 한쪽이 헤어지자 [이별]통보하는 경우에만 국한시켜 살펴보고자 한다.
내가 헤어지자 통보하는 쪽이 아니라 통보받는 쪽, 즉 실연을 당하는 입장이 되면 난생처음 맞이하는 그 '첫 실연'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극복해 내야 하는지는 결코 쉬운 사안이 아니다. 남몰래 혼자 힘들어 할 수도 있고 진짜 친한 친구(찐친)에게만 (술기운에) 울면서 털어놓을 수도 있다. 어쨌든 혼자서든 아니면 친구에게 위로를 받든 결국에는 홀로 이겨내야 할 아픔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과제로만 남는 것 같다.
'첫사랑'은 아무것도 몰라도 그저 본능에 맡긴다고 한다면, 과연 '첫 실연'은 어디에 어떻게 "맡겨야" 하며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처해야 한단 말인가?
연인(戀人) 간의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안이다. 당사자가 아니면 속속들이 다는 모른다. 말 그대로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 두 사람만의 내밀한 감정들로 이루어진 지극히 사적인 일이다. 이별에 대해서도 (그 배경과 원인에 대해서도) 더더욱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양쪽의 말을 모두 다 들어봐야 한다.
하지만 때로는 당사자들도 복합적인 원인 이외에도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한꺼번에 표출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별의 '이유'를 뭐라고 한마디로 규정짓기 어려울 수도 있다. 어떤 결정적인 원인이 하나로 분명할 때도 있지만 참고 견디며 지나온 감정들이 누적되었다가 폭발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이별의 사유가 권태나 단순 변심이 아니라 부정행위('바람')라면 명백히 별도의 문제다. 기혼자인 경우엔 귀책사유와 증거확보, 재산분할, 위자료청구, 자녀 양육권(양육비 지급)을 포함한 이혼소송 등 법적 대응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된다고 배웠다. 하지만 저마다 내가 사적으로 애정(愛情)을 갖고 만나고 싶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분명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나 만나면 안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가슴 아픈 헤어짐을, 그 첫 실연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라면 -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과 사적인 취향의 영역이겠지만 - 지금부터라도 "다른 조건들" 보다는 제일 먼저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人生觀)에 잘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
여담이지만 "조건들"로 주로 따지는 외모, 경제력, 학벌, 집안 배경 등등 다 좋지만 가장 따져야 할 것은 성격이나 취향 이외에도 바로 인생사(人生事)를 보는 관점들 아닐까 싶다. 어쩌면 "내 인생의 최우선 순위", "삶의 의미", "죽음(이별)을 대하는 방식"등에 대한 견해와 관점에서도 우리는 각자 세상을 보는 눈과 인생을 관조하는 방식, 또한 그에 따른 저마다의 세계관의 차이도 볼 수 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맞이한 실연(失戀)을 대하는 방식을 써보려 하다가 여기까지 이르렀다. 아프면서 크는 것이 청춘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연(失戀)은 분명 누구에게나 큰 아픔이며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오래 남아 힘들게 한다.
다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든,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사람이든,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지든 '헤어지자'는 말은 이미 그 말 한마디로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왜 다시 만나지 못하는지를 일일이 묻지 않아도, 또 굳이 답하지 않아도.
모든 '이별통보'는 듣는 이에게는 갑작스러워 보여도 애당초 갑작스러운 이별통보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동안 어떤 감정 또는 감정선의 변화를 그저 말 못 했거나 또는 말 안 하고 쌓아온 것일 뿐. 이별통보를 당하는 자신은 ("나는 변한 것도 없고 잘못한 것도 없으니") 단지 억울하다고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왜냐고 묻는 것이 너무 때늦은 물음일 경우도 있다.
'이별통보'를 들었다고 해서 세상 무너지는 아픔과 슬픔에 괴롭다고 해서 그 이별을 통보한 사람을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괴롭혀서도 안되고 괴롭힌다고 해서 그 사람이 되돌아오지도 않지만 되돌아온다고 해서 예전처럼 (모든 것을 잊은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똑같이 교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별을 통보한 사람이 마음을 돌리거나 '화해'(?)하고 다시 교제를 재개하든 말든 그것 또한 그의 자유이며 어떤 결정이든 그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
성숙하지 못한 사회는 성숙하지 못한 사회 구성원들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데이트 폭력"이나 이별통보에 대한 "보복폭행"은 심각한 사회적 병리 현상(病理現象)이다. 내 슬픔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위해(危害)를 가할 어떤 당위성도 없다. 분명하고도 적극적인 거부와 거절의사에도 불구하고 스토킹(stalking)이나 폭언, 폭력, 협박 등을 하는 행위는 그냥 범죄행위일 뿐이고 형사처벌 대상이다.
이미 단호하게 "우리 그만 헤어져!"라고 말한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살아가는 내내 잊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내 가슴에 아프게 남은 생채기로 보듬고 살아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실연의 아픔과 슬픔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아물어 가며 치유되어 가리라 믿자.
대개 사람들은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진 후 그 실연의 아픔을 이겨내려면 다른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길이 최선이다고들 한다. 물론 사랑하던 사람과의 이별이라는 슬픔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정녕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방법 밖에 없을까라는 물음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연인 간의 사랑에도 옛사랑 위에 새 사랑의 "겹쳐 덮어쓰기"(overwriting)가 가능하다면, 그 사람과 함께한 기억과 흔적이 그냥 다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 슬픈 추억들을 끝내 지우지 못한 채 간직하고 있다면 지우려고 노력하기보단 다른 새로운 기억으로 덮어 채우는 것도 방법일 지도 모른다.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어쩌면 지금은 정말 이 방법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무더운 한여름 장맛비라도 내리면 용기 내어 그 내리는 빗 속에 뜨거운 눈물도 그냥 같이 흘려보내 버리자. 그 울음소리도 빗소리에 같이 묻히게 한번 엉엉 소리 내어 크게 울어버리자. 그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이유를 계속 묻고 더 알려고 하기 전에 그는 "세상에서 나만을 끝까지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렸음을 알고 그가 서서히 잊힐 수 있게 내 마음을 다독이자. 정말 미안하지만 떠난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이 떠나가도 밥은 먹어야 한다.
실연(失戀) : 연애에 실패함.
이별(離別) : 사귐이나 맺은 관계를 끊고 따로 갈라섬.
병리 현상(病理現象) : 사회, 정치, 문화, 경제 따위에서 발생하는 각종 문제점을 질병에 빗대어 이르는 말.
스토킹(stalking) : 상대방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고의적으로 쫓아다니면서 집요하게 정신적, 신체적으로 괴롭히는 행위.(Daum [어학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