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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Happy Letter Nov 04. 2023

변절(變節)에 관하여


지금 쓰고자 하는 이 글의 주제와도 좀 연관이 있기 때문에 필자의 앞서 발행한 졸고, [근데..., "첫인상"보다도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만,]에서 "마지막 모습" 관련 서술한 부분과 "마지막 모습이 중요한 이유 3가지"중에 포함된 부분을 여기에 먼저 인용해 둔다.


그 사람이 어느 날 멀리 떠나 이별을 해야 한다면 그와의 좋았던 일과 안 좋았던 수많은 일들 중에서도 우리는 그 사람이 "마지막에 남긴" 모습과 그때의 '마지막 인상'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주 멀리 다시 못 만날 곳으로 떠날 때도 (남아 있는 자들에게는) 자신의 바로 그 '마지막 모습'이 가장 오래 그리고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들의 '기억'에 남는다는 말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K라는 시인은 젊은 시절엔 열혈 투사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의 인생 후반기 말로(末路)에 대놓고 '변절'했다. 어떤 사람들은 '전향'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고 하는데, K작가가 어느 단어에 적합한지, 또는 보다 가치중립적인 말로 '전향'이 해석되는지 여부 등은 독자분들의 판단에 맡겨야겠지만 다음(Daum) [어학사전]을 찾아보니 아래와 같이 두 단어의 개념이 정의되어 있다.(필자가 이해하기로는 두 단어가 각각 다른 의미 차이를 갖고 있음.)

 

변절(變節): 1. 절개나 지조를 지키지 않고 배반함.

전향(轉向): 1. 신념이나 사상 따위를 다른 것으로 바꿈. 2.(기본의미) 어떤 일을 하던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림.


그의 변절(또는 전향)은 안타깝지만 고문 후유증이거나 혹시 치매라도 걸린 것은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시인이자 투사로서 그가 남긴 것은 주목할 만한 예술적 업적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사회참여활동과 영향력은 우리 정치 환경에도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데 일조했다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인생 후반기 말년에는 지금까지 주창해 온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을 표명하여 정치권이나 문화예술계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이들은 그가 원래 그런 성향이었는데 그동안 숨겨져 있어 잘 드러나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 그가 보여온 신념이 그냥 바뀐 '전향'일 뿐이라고 하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열혈투사로 싸우며 지내온 긴 세월을 보면 그는 말년(末年)에 '변절'한 것이 맞다고도 한다.




필자는 이 글에서 그 시인이 남긴 예술 작품을 (새로운 관점으로) 재평가하거나 정치적 성향을 왈가왈부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작가가 보여준 사례를 보면서 어쩌면 인생의 말년에 우리가 가진 지금의 모든 가치기준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 속에 "변절"에 대해 좀 더 폭넓게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생각은 단지 젊을 때는 진보적이다가도 노년이 되면 대개 (보수적으로 된다는) 보수화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그런 변절은 (또는 전향은) 보수적 성향을 보이던 인사들에서도 나타나며, 나이가 들어가면서 진보적 진영으로 갈아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무엇이 그 사람의 참된 실제 본모습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의 살아생전 작품과 언행을 평가해야 할 것인지 우리 모두를 혼돈 속에 빠트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는 어디까지 우리의 본모습을 나타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곧 다가올 죽음 앞에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마무리하며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 달라질 수도 있을까? 죽기 전에 스스로 생각하기에 과오(過誤)였다고 여기는 부분을 바로 잡고 싶어질 수도 있을까? 아니면 혹자가 말하듯, 젊은 시절 뜨거운 열정과 모험적 실험 정신, 진취적인 도전의식과 시도들도, 그리고 우리 인생의 총체적 가치관과 세계관마저도 말년이 되어서야 (안정과 조화, 화합을 지향하며) 제대로 완숙되고 완성되는 것일 뿐일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 사람의 진정한 참된 본모습은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이 아니라 우리를 떠나기 전에 (죽기 전에) 보이는 그 "마지막 모습"일까? 예를 들면, 실제 어떤 과학자들은 학문적 신념이나 믿음의 영역 등을 인생 말로 마지막 시기에 비망록 등으로, 또는 임종(臨終)의 병상에서 번복(飜覆)하기도 한다고 한다. 생존하고 있는 예술가들(특히 화가들의 회화 그림)의 작품은 사후(死後)에 작품 가격이 더 올라간다는 말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떤 연유로든 변절하는 자(전향하는 자)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다 떠나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하다. 위에 언급한 사례와 그런 시선들로 보면, 지금 우리가 거의 "우상"처럼 믿고 따르는 여러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오피니언 리더나 사회 문화계 인사들, 정치적 지도자들도 어쩌면 나중에는 (말년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과는 다른 모습을 보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疑懼心) 마저 갖게 된다.


우린 매스컴을 통해 오랜 세월 화목하게 함께 살아온 노부부들의 '황혼이혼'에 대한 이야기도 심심찮게 듣곤 한다. 말년에 부부의 정이나 관계 설정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일까? 다른 한편으로는, "긴 병 앞에 효자 없다"라는 말도 종종 듣게 된다. 노년층이 된 자식들이 (스스로도 노년이 되어가면서) 날로 힘없고 병약해져만가는 늙은 부모를 병상에 두고 계속 같은 마음으로 대할 수 있을 까라는 물음을 보고 심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평생 그의 뜻과 의지대로 살아간 그 K시인이 말년에 변절한 것일까, 아니면 오랜 세월 그를 지켜봐 온 우리가 먼저 (그를 부분적으로만 바라본 시각과 관점 차원에서) "변절"한 것일까? 우리는 평생 동안 얼마나 지조(志操)를 지키며, 소신(所信)을 굽히지 않고 그리고 일관성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고 살아갈 수 있을까? 살아가면서 적당히 그때그때 마다 새로운 환경, 또 그런 여건과 분위기에 따라 그저 타협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한 개인의 "변절"(또는 전향) 또한 완숙과 성숙의 과정에 속하는 것인가?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계속 '변화'해 나가는 것일까?




어쨌든 그 작가는 지난해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삶(전체)에 대한 해석과 평가, 그리고 변절이든 전향이든, 그 "변화"의 수용여부는 전적으로 남은 자들의 몫이 되고 말았다.









지조(志操) : 원칙과 신념을 지켜 끝까지 굽히지 않는 꿋꿋한 의지나 기개.

소신(所信) : 굳게 믿거나 생각하는 바.

(출처 : 다음[어학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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