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a. 나르시시즘(Narcissism)
막상 이렇게 거창하게 제목을 정하고 보니 무슨 말부터 먼저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문득 떠오른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관한 이 상념(想念)을 어떻게든 정리해서 여기에라도 적어내야만 머릿속 다음 생각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어떤 생각들의 '체증'(滯症) 같은 것이 내 머릿속에 답답하게 막힌 채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때론 어떤 혼란스러운 단상(斷想), 그런 생각과 글도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마치 다음 숨을 들이쉬기 위해선 힘들더라도 이번 숨을 애써 내뱉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일'을 위해선 때론 처절(凄切)하게 힘겹더라도 '오늘'을 꼭 살아내야 하는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필자 자신에 관한 이야기지만 어쩌면 이 순간에도 사는 게 힘들거나 거듭된 어떤 실패와 좌절로 스스로 무기력(無氣力)에 빠진 누군가에게도 자신에 대한 관심과 자기애(自己愛)에 어떤 환기(喚起)가 될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품위를 지키고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이라는 그 자존감(自尊感)이 갑자기 현저히 떨어져 버린 탓인지 아니면 하던 일이 기대만큼 잘 안 풀려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심적 갈등과 번민을 해소할 방도를 마련하려 애쓰고 있다.
이런 화두(話頭)에 대한 타인들의 입장과 견해는 짐작하기 조차 어려울 정도로 지극히 사적인 영역일 수도 있겠지만 때때로 필자는 평소에 스스로를 얼마나 아끼고 존중하는 가라는 물음 앞에 자신(自信)이 없어지는 것 같다.
자신이 속한 가족과 사회, 소속 집단과 단체의 이해관계 속에서 '사회적 동물'로서 매일의 일상을 살아가는 '나'이지만 얼마나 "나"를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가, 아니, 오히려 얼마나 후순위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문득 들었다.(여기서 개인의 집단 공동체,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와는 차별되는 이익집단 사회, 게젤샤프트[Gesellschaft] 등에 관한 세세한 논의 등은 생략한다.)
'자기애'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자주 일컫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우리 사회 속에 주로 부정적 뉘앙스(nuance)와 의미로만 사용되는 편인 것 같다.
혹자에게는 이러한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는 태도나 의지'가 예를 들면, 마치 "자아도취(自我陶醉)에 빠져 있다", "자아도취 상태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는 둥의 (때론 오해 섞인) 핀잔과 비판의 대상으로 비칠 수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여기서 '자기애'가 강한 사람과 '자아도취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라는 두 부류는 분명 구분해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의 고착화에 대해선 더 살펴봐야겠지만, 그 의미의 지배적인 인식 기조(基調)에는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다 결국 물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Narcissos)"의 신화에 덧붙여 다른 한편으로는 평소 일상생활 중 "우리"라는 가족 공동체 내지는 집단 공동체를 중요시해 온 우리의 사회문화적 정서도 한몫해 온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르시시즘은 자기 자신을 욕망한다는 점에서 자기 중심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현대에 들어서 나르시시즘은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나르시시즘을 건강한 나르시시즘과 병적 나르시시즘으로 분류할 수도 있다. 이때 건강한 나르시시즘은 문제가 없지만, 병적 나르시시즘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출처 : Daum [다음백과])
어쨌든 긍정적 의미로도, 그러니까 "건강한 나르시시즘"이라는 말로도 사용된다고 하니 이 용어의 재해석과 새로운 관점의 적용은 새로이 고민하고 천착(穿鑿)해 보기로 하며 글을 좀 더 이어가 본다.
간단히 축약(縮約)하면, 조금이라도 더 자기 자신을 챙기자는 의미다. 뭐 하고 싶은 취미생활도 하고 건강한 몸을 만들고 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감정상태'와 기분에 주목하고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는 취지다.
차분히 잘 생각해 보면 분명 내가 즐겨 먹고 좋아하는 음식이 있듯 누구에게나 내가 좋아하는 생각과 대상, 사물과 장소 또한 그런 기쁘고 즐거웠던 소소한 경험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당연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런 유형들도 있듯이.
세상에는 '병적' 나르시시즘(Narcissism)도 있다고 하니 경계(警戒)해야겠지만 타인을,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려면 자신부터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진부한 표현을 다시 소환해서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말(!)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정말 뜨거운 사랑을 해 본 사람들은 '사랑'이 뭔지 알 것이다. 그 대상이 연인(戀人)이든 다른 무엇이든.
누구보다도 자신 스스로가 '자존감'을 높이려는 시도도 부단히 해야겠지만 연인을 사랑하고 배우자, 부모 자녀, 그 가족을 사랑하듯 나 자신을 좀 더 많이 사랑해야겠다는 다짐을 거듭해 본다.("진정으로"라는 수식어는 사랑 앞에 따로 덧붙일 필요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살다 보면 하던 일이 또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일이 뜻대로 잘 안된다든가, 아니면 복잡 미묘한 인간관계와 사회생활 속에서 상호 이해와 공감 부족 내지는 부재(不在)로 예기치 못하게 어떤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기도 한다.
또 다른 혹자는 내가 속한(또는 속해진) 불우(不遇)한 가정형편과 병마(病魔)에 시달릴 때, 또는 불공정하거나 정의롭지 못한 사회 속에서는 '자기애'(自己愛)를 제대로 실현하거나 일상화하기 쉽지 않다고 피력(披瀝)할 수도 있다.
다양한 배경과 성장과정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저마다 (애초부터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에게 주어진 가정형편과 그 환경하에서 자라왔고 지금 이 순간도 이 계급[계층] 사회 속 한 명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혹시 일견 '계층'이라는 표현은 용인(容認) 해도 '계급'이라는 말에는 거부감이 든다는 분들도 있겠지만,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속 어떤 "경제적" 계급사회를 살고 있음도 부인하기는 어렵다.
어떤 이들은 숫제 "종노릇"을 하더라도 "대감집 종"이 차라리 낫다는 말을 공공연히 거론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실제 지금 "종살이"을 하고 있는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우리는 인정하기 싫더라도) 그런 말을 하는 심리적 기저(基底)에는 좀 다른 형태지만 - 양반(兩班)과 상민(常民)으로 구분되는 '반상'(班常) 같은 - "신분 사회"에 아직도 살고 있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일상에서도 "신분상승", "계층이동"이라는 말이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자기애'가 어려운 이유는 이와 같은 타고난 불우한 가정환경과 열악한 경제적 여건뿐만이 아니다. 거듭되는 실패로 인한 좌절감, 또 자신이 속한 가족과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때 등 더 다양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견해와 주장에도 우리는 (비록 일시적이라 하더라도) "금융치료"는 없어도 "심리치료"는 있다. 우리는 저마다 "행복의 열쇠"를 이미 쥐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처한 상황이 어떠하든 - 나 자신과 가족과 이웃, 우리 사회 공동체를 사랑하며 살기 위해 - 우리 모두의 만트라(mantra)가 되어 늘 기도하듯 반복해야 할 말, "남과 절대 비교하지 마라, 불행해지지 않으려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늘 좀 부족하다. 돌아서면 이 말을 잊어버리고 다시 비교하기 시작한다. 또는 비교하지는 않더라도 내 이웃은 나와는 '다르다'는 사실(fact)은 부인할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단지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심리적으로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래서 다른 처방을 찾고 있다. 우리 삶이란 (아직 잘 모르지만) 무릇 49의 불행과 그런 불운한 일들에 맞부딪혀 힘들어해도 51의 기쁜 일과 즐거운 일들, 그런 행복과 만족감으로 "살아내는" 일의 연속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필자는 내 행복의 비율이 설령 50 이하라 해도 긍정의 힘으로 그 "살아내는" 일의 연속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비록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이 사회와 환경이 늘 우리가 바라는대로만 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우리 모두는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것도 (선의의) 경쟁은 하되 이웃과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함께 공존공생하기를 원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가족과 사회, 그리고 다양한 이익집단이라는 이름하에 또한 그 속에서 저마다의 역할과 "기능"으로 살아가야 하다 보니 그로 인해 우리 자신은 지쳐가고 소외될 때도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혈혈단신 혼자 사는, '혼삶'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다 근심 걱정 없이 자유롭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지치고 소외된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 그 애착을 갖고 존중해야 하는,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하고자 하는) 감정을 다시 불러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자책(自責)하지 말자. 어떤 잘못은 우리의 의지를 벗어나는 일일수도 있다. 어떤 '방어 기제'(防禦機制)나 어설픈 '자기 합리화' 차원이 아니다.
지금 가진 것도 별로 없다고 매번 의기소침(意氣銷沈)에 빠지지 말고, 절대로 절망하거나 스스로 자신을 내버리고 돌보지 않는 자포자기(自暴自棄)에 빠지지도 말자. 어떤 난관에도 기운 내어 다시 활기차게 시작하자. 그래야 정말이지 우리는 우리 가족도 이웃도 우리 사회 공동체도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이든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이라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가끔 사 먹는 것도 자기애에 속한다. 잘 챙겨 먹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프지 말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도. 그리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 가족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자.
끝으로, 여담이지만 호수 위를 여유롭게 노닐고 있는 오리들도 하루에 몇 번이고 호숫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그 물에 빠져 죽을 생각은 안 한다.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아서? 아니, 오히려 바로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르시시즘(Narcissism) : 자기애(自己愛)를 뜻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다 결국 물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Narcissos)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을 인격장애의 하나로 판단했으며 정신분석학적 개념으로 확립했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을 일차적 나르시시즘과 이차적 나르시시즘으로 분류했다. 일차적 나르시시즘은 나와 남을 구별하지 못하는 유아기에 리비도(욕망)가 자기 자신에게만 쏠려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차적 나르시시즘은 유아기가 지나면서 리비도의 대상이 나 아닌 남에게로 향하지만, 어떤 문제에 부딪혀 남을 사랑할 수 없게 되어 다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상태로 돌아오는 상태를 일컫는다. (출처 : Daum [다음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