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이 응원 열기가 그들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 주길
머글은 대학교 때 나를 부르는 가장 흔한 별명 중 하나였다. 흔히 덕후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처럼 누군가를 열렬하게 좋아하고 몰두하는 게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다. 딱히 내가 수긍하지도 않은 사실은 딱히 부정하지도 않았다는 이유로 공공연한 진실이 됐다. 어느 날의 학교 신문사 회식에서 "요즘은 여자 아이돌이 대세인 것 같아. 4세대 남자 아이돌 하면 아는 사람 없죠 언니?"라는 발언에 약간 알딸딸 취해있던 내가 수십 개의 남자 아이돌 그룹명을 말해 싸늘한 정적이 흘렀던 때가 있다. 왜... 왜 내가 이걸 알고 있단 사실에 너희들이 상처를 받는 거니? 알 수 없지만 앞에서 그 질문을 던졌던 친구는 갈비를 주섬주섬 먹으면서도 배신당한 얼굴을 했다. 그 이후로는 뭘 알아도 모른 척하게 되더라. 그렇게 내 머글이미지는 착실하게 지켜졌다.
술 마시러 나오란 말에 바쁘단 말로 일축한 어느 날의 밤에도 사실은 가요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나는 머글이 아니고 아이돌에 관심이 많은 것도 맞지만, 그중에서도 가요프로그램에 집착한다. 집착? 집중보단 몰두하고, 애정이라기엔 집요하게 추궁하는 면이 있으니 집착이 맞겠다. 심심하면 저녁마다 방송되는 가요프로를 틀고, 연말무대는 전부 스케쥴러에 표시했다가 볼 정도로 좋아한다. 그걸 시청할 때의 나는 거의 방구석 대중음악평론가다. 환호하거나 웃지도 않고 정말 가만히 앉아서 집중한다. 그런 무대는 무대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서인지 무대 전체를 놓치지 않고 본 다음 박수를 쳐주고 싶다. 정말 감명받은 무대 뒤에는 나도 맘껏 난리치고 친구들에게 불티나게 링크를 공유한다.
여하튼, 그 정도로 무대를 집중해서 보다 보면 이상하게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있다. 바로 요즘 대세라고 평가받는 여자 아이돌의 지나치게 노출된 의상이다. 이건 분명 정말 멋진 안무 같은데, 치마가 다리의 보폭을 제한해서 제대로 동작을 못하는 걸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탑이 내려갈까 봐, 높은 굽에 넘어질까 봐 조마조마하는 몸짓은 집중을 순식간에 깨트린다. 그게 너무 안타깝고 내가 다 불안해서 심지어는 여자 아이돌 무대는 못 보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다 아차차, 무대를 존중하기로 한 걸 깨닫고 다시 응원하기 일쑤였지만.
그런 아찔하고 모순적인 상황은 야구장 안에서도 벌어진다. 사방이 남자인 그 야구장 안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냐고? 마운드 위 말고, 외야 잔디도 아니고, 더그아웃을 넘어, 관중석에 오면 치어리더들이 거기에 있다. 치어리더는 응원석의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응원을 도와야 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가장 튀고 반짝거리는 의상을 입는다. 각 구단의 유니폼을 개조해서 이리저리 꾸민 응원복을 보면 그들이 구단을 얼마나 응원하는지가 느껴져서 감동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주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날엔 커다란 응원 동작을 할 때마다 내가 다 불안하다. 아주 추운 가을날에도 짧은 치마를 입고 온 치어리더를 보면 불안을 넘어 인간적인 괴로움을 느낀다. 진짜 추울 텐데, 저러고 계속 있으면 정말 동상에 걸릴지도 모르는데. 그들을 보는 내 심정은 겨울날 히터도 틀어주지 않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볼 때와 같다.
그걸 아주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순식간에 아찔해진다. 그때의 치어리더들은 높고 좁은 응원단상에서 마치 전시되는 것 같다. 시선의 차이, 머릿수의 차이를 인지할 때면 순간 아득해진다. 아, 이 야구라는 스포츠는 4대 스포츠 중 유일하게 여자 리그가 없는 스포츠였지. 그렇지. 그런 날의 경기를 관람하고 나올 때면 이기든 지든 입맛이 씁쓸해진다. (물론 진 날엔 진짜 열이 받아서 인생의 쓴 맛을 맛봤을 거다.)
어느 순간부터 난 치어리더를 애써 무시하려 했다. 또 한 번 아차차, 여자 아이돌의 무대를 힘껏 외면하려고 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들에게는 이 무대가 직업의 가장 소중한 순간일 테고, 밤낮을 고생하고 연습한 결과일 텐데. 그런 건 다 차치하더라도 치어리더의 임무가 모든 관객이 경기를 외면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응원하게 하는 것일 텐데. 그들을 응원하고 싶으면 그들을 따라 율동을 크게 하고 응원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쳐야 한다.
며칠 전, 아주 기쁜 소식을 들었다. *한 구단에서 구단 최초로 응원부단장을 여성으로 임명했다는 것이다. 보통 응원단장은 남성이 도맡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단장의 자리에 여성의 기회가 주어지다니. 심지어 치어리더로 일하다 응원부단장의 기회를 잡게 된 거라 더 의미가 컸다. 그래, 치어리더와 단장은 본질적으로 같은 역할인데 성별로 딱 구분 짓는 게 안 그래도 이상했다. 영상에서 본 그 응원부단장은 단장들이 입는 아주 멋진 단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응원의 한가운데서 응원의 열기를 뜨겁게 느끼고 있었다. 곁에 있는 치어리더들도 물론이다. 매 경기 응원의 열기를, 아주 뜨겁게 느끼고 있었을 거다. 그걸 깨닫고 난 후엔 치어리더의 응원 구호에 더 적극적으로 임할 수밖에. 그저 이 응원의 열기가 그들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 주길, 관객과 교감한 그날의 기억이 훗날 응원단장이 되겠다는 꿈을 지필 장작이 되길 바랄 뿐이다.
*롯데 자이언츠는 치어리더였던 양혜빈 씨를 구단 최초의 여성 응원부단장으로 임명했다. 힘차게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