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몸으로 뛰어드는 도루가 가장 멋있는 것은
미디어데이는 각 팀 감독과 대표선수들이 나와 출사표를 던지는 자리다. 시즌을 앞두고 자신없어할 구단은 없기 때문에(없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비슷하다. 비시즌 동안 얼마나 노력했고 성장했는지, 컨디션이 어떻고 목표는 무엇인지. 10개 구단 모두 가을야구를 바라보고 희망찬 미래를 말한다. 아주 뻔하고 지루하고 현실성없는 이야기지만 동시에 모든 팬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복사 붙여넣기 한 듯한 질문과 답변들이 한참 동안 계속되면 드디어 팬들의 질문 시간이다. 난 이 시간을 기다렸는데, 팬이 하는 질문이 진또배기이기 때문이다. 선수들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정교하고 위트있는 질문들을 한다. 그래서 내용이 무궁무진하고 재미있다. 또, 윗분들의 눈치 따위 볼 필요없기 때문에 아주 솔직하다. 그래서인지 팬의 질문이 나오기 전에 기자들과 mc는 꽤 긴장하는 눈치다. *한 팬은 아주 느린 선수들만 모아 그들의 달리기 실력을 물었다. 중계에는 화면에 질문이 띄워지지마자 웃는 현장 팬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전달됐다. 그 '느린 선수들'에 포함되어있던 선수가 직접 순위를 정해줬다. "제가 1등이고요." 숨도 안쉬고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예상된 결과다. 이게 진짜인지 헷갈리는 것이, 제작년 그 선수의 도루 성공률은 무려 100%다. 시도가 1번이라 그렇지.
하여간 이 질문은 그렇게 끝나지 않고 가장 빠른 선수들에게도 넘어갔는데, 빠른 선수들이 그들의 달리기 실력을 평가할 수록 느린사람 중에 1등인 선수(줄여서 1등선수라 하겠다)는 얼굴이 점점 빨개지는 것 같았다. “느리다고 생각은 안해봤고요. 그냥... 열심히 뛰는데 다리가 잘 안나가는 거 같아요….” 어느 빠른 선수의 위로 아닌 위로에는 모욕을 느끼는 것 같았다. 말이 좀 잔인하긴 했어도 그정도인가? 그 1등 선수는 달리기가 느린 대신 홈런을 무지하게 때린단말이다. 무려 홈런타자가 왜 달리기 속도에 집착을 할까.
야구의 꽃은 홈런이다. 아무리 **세이버 스탯이 클래식 스탯보다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고 해도 홈런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는다. 공이 넘어가는 순간에 느낄 수 있는 짜릿함과 경이로움은 숫자로 어떻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볼넷이나 안타는 가능성을 늘리는 쪽이지만 홈런은 스스로 결정을 내리니 주인공이 아닐 수 없다. 스포트라이트도 많이 받고 당연히 기사도 많이 난다. 그런 의미에서 홈런 타자는 필연적으로 스타가 된다. 그래서 타자들은 3할을 치다가도 타율을 2할 5푼 대로 줄이더라도 홈런을 늘리겠다는 목표를 세우기도 한다. 암, 스타는 다들 되고 싶으니까.
근데 그런 홈런 타자가 왜 달리기 못한다는 말에 모욕을 느낄까. 물론 타자가 수행해야 하는 모든 요소인 공수주(공격, 수비, 주루)를 완벽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장타가 없는 선수에게 홈런이 없다는 말보다, 다리가 느린 선수에게 달리기가 느리다는 말이 더 모욕적으로 다가온다. 저 일등 선수가 달리기로 놀림받는 경우는 흔히 보지만, 우리팀 도루왕에게 장타가 없다고 놀리는 경우는 많이 없다. 물론, 있긴 있지만 그건 놀림감이라기보다는 진지한 비판같다.
그건 아무래도 달리기가 아주 평범하고 기초적인 운동이라 그런 것 같다. 아주 어릴 적 걸음마를 떼고 난 이후에 자연스럽게 배우는 첫번째 운동이고, 기초 체력 테스트나 체육 수행평가에도 빠지지 않는 그야말로 국민 운동이다. 그래서 그런지 운동선수가 달리기를 못한다는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리기는 한다. '평범한 일반인도 할 수 있는 걸 운동선수이기까지 한 당신은 왜 못하나요?' 일등 선수는 달리기에 대한 모든 질문이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그에 반해 홈런 타자는 아주 타고난 천재같은 느낌이다. 홈런은 치는 사람만 칠 수 있다는 느낌. 오늘 컨디션이 아무리 좋아도 평소에 홈런 타자가 아니라면 그에게 홈런을 기대하지 않는다. 반대로 아무리 낮은 타율을 기록하고 있더라도 4번 타자가 나오면 팬들은 힘차게 응원한다. 그는 ‘홈런 타자’니까.
뭐가 더 좋고 멋있다고 할 수 없지만, 운동장을 몇 바퀴나 돌고 온 날엔 그 일등 선수의 마음에 더 공감한다. 몇 발자국만 움직여도 바로 헥헥대는 체력을 갖고 잠시 쉴 때면 끝없이 이어지는 트랙을 바라본다. 아주 단순하고 반복적인 노동의 숭고함에 대해 생각한다. 둥근 원 모양의 이 트랙은 결코 끝나지 않고, 다리와 팔을 움직이는 동안에는 나는 앞으로 전진하고, 그 행위를 멈출 수 있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나의 의지만이 그걸 멈출 수 있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온갖 기술과 도구가 필요한 야구라는 스포츠에서, 맨 몸으로 뛰어드는 도루가 가장 멋있는 것은.
*23년 3월 30일에 진행된 2023 KBO 미디어데이 중 나온 질문이다. 이것말고도 '소 못 먹기vs우승하기', '우승공약으로 결혼식 사회를 봐주실 수 있을까요?' 같은 재미있는 팬들의 질문이 많이 있었다.
https://m.sports.naver.com/video/1058284
**세이버스탯에는 WAR(승리기여도), OPS(출루율+장타율) 등이 있다. 클래식 스탯에는 타율, 홈런 개수, 타점 등이 있다. 세이버 스탯은 클래식 스탯보다 더 객관적으로 타자의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지표다. 아주 단순한 예시로, 클래식 스탯은 '타자가 안타를 쳤는지'를 보고, 세이버 스탯은 '그 안타의 질이 얼마나 좋은지'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