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스윙으로
상상해 보자. 이어달리기 단체전에 당신이 후보 선수로 참가했다. 우리 팀은 계속해서 간당간당하게 2등으로 뛰고 있고, 1등 팀을 넘을 듯 넘지 못한다. 마지막 역전의 찬스는 딱 한 바퀴 남았는데, 갑자기 감독님이 나에게 와 말한다. "마지막 바퀴는 네가 뛰자!" 갑자기? 지금? 몸도 안 풀었는데? 당신은 급하게나마 제자리 뜀을 하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한 뒤 트랙에 선다. 당신의 팀은 물론, 상대팀, 거기에 모인 모든 관중은 당신을 집중한다. "너 따위 후보선수에 절대 안져." 하는 경계심과 "쟤가 누군데? 비밀병기인가 봐." 하는 의구심과 기대를 동시에 받는다. 그 압박감 속에 갑자기 전속력을 달려야 한다. 뒤쳐지긴커녕 앞서야 한다.
아니면 이런 상황은 어떤가. 어느 토론대회에 방청객으로 참가했다. 당신이 앉은 찬성 측은 조금씩 반대 측에 기세가 꺾인다. 한참 동안 자유토론이 이어지다가 마지막 병의 마무리 발언만이 남았다. 그때 찬성 측 병은 방청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눈이 마주친 당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대신해주세요." 여태까지 박수 정도치고 말은 한마디도 안 했는데 갑자기 가장 중요한 발언권을 얻어버렸다. 찬성 측의 모든 운명은 당신에게 달려있는 느낌. 심지어 찬성 측의 앞선 모든 발언보다 더 논리적이고 파격적인 말을 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은 상상만 해도... 어지럽다. 갑자기 나에게 모든 부담과 책임을 떠넘기고 결과까지 내라니! 나라면 죽어도 못합니다! 하고 밖으로 튀쳐나갈 것 같다. 게다가 내가 경기에 나가지 않고 뒤에 앉아만 있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텐데...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 나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서 몸도 잔뜩 굳어있는데 말이다. 그건 완전히 도박 같다. 절대 이뤄질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안 해볼 수는 없는. 그럼 경기 중간에 나간 나는 경기 중의 어떤 짜릿함도 느끼지 못하고 패배의 주역이 되어 패배감을 곱씹어야 한다. 윽. 너무 잔인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패배감 따위 개나 주고 팀에게 승리를 선사하는 영웅도 있다. 지난 한국시리즈는 그야말로 '대타시리즈'였다. 1차전부터 캐스터의 "이런 경기가 있습니다!"라는 말을 끌어내게 했던 역전을 알리는 9회 초 역전 투런, 우승팀을 결정짓는 5차전의 한국시리즈 사상 첫 대타 끝내기 쓰리런은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그들의 한 방에 팀의 운명은 갑자기 기울었다. 희망으로, 혹은 절망으로. 아주 오랫동안 벤치에 앉아있다가 단 한 번의 스윙으로 팀의 미래까지 이리저리 주물러버렸다.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있었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투수의 공은 당연히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고, 볼 수 있는 건 그냥 전광판에 찍히는 구속이나 종이에 써져 있는 데이터 정도였다. 팀의 운명이 걸려있는 순간이고 팬들의 기대감도 의심도 다 느껴졌을 거다. 그 순간에 그 모든 걸 뚫고 가서 이긴다. 승리한다. 그 순간에 그 선수는 경기에서만 승리한 것은 아니다. 승리는 겨루어 이긴다는 뜻인데, 그 순간에 그가 겨룬 것은 상대 팀만이 아닌, 날 의심하는 관중, 불안해하는 감독, 팀 동료, 나와 교체되어 더그아웃에 나와있는 타자까지다.
대타가 들어서면 전광판에 있던 표식은 PH로 바뀐다. PINCH HITTER. 그걸 알게 된 날부터 그 말에 대해 되게 오랫동안 생각했다. 거기에 이름이 붙여져 있다는 게 좋았다. 팀이 가장 위험한 순간에 나가는 타자가 존재한다는 게. 어쩌다 다 위험한 상황은 찾아오고 각자 그걸 해결하기도 하지만, 아주 위험하고 중요한 상황에만 제 몫을 찾는 사람이 있다는 게. 우리 팀 핀치 히터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는 게!
그 사람을 생각하면 나도... 돌도 씹어먹을 수 있을 것 같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