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은 포기를 예쁘게 발음한 이름

그 모든 일이 벌어지고 난 이후에

by 일구삼

요즘 들어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좋아하는 책의 한 부분을 필사하는 거다. 필사라고 하면 좋아하는 몇 문장을 손으로 예쁘게 옮겨 적는 걸 떠올릴 텐데 내가 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책 한 단락을 전부 타이핑 쳐서 노트북으로 옮기는 것이다. 메모장이나 워드를 열어 적지만 따로 다시 보거나 배포하는 건 당연히 아니고 그냥 아무 의미 없이 말을 옮긴다. 타자를 치다 보면 생각이 없어지고, 다시 한번 책을 읽는 것 같아서 좋다.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두고 책의 문장들을 타닥타닥 노트북에 옮겨 적는 일은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다. 가장 최근에 적었던 것은 이슬아 작가의 인터뷰집 <새 마음으로>에 나오는 수선집 사장 이영애 씨의 인터뷰였다. 인터뷰엔 그런 문장이 나온다. "남편은 아예 다른 여자랑 살림을 차리고 살았어. 잘생겼고 키도 컸는데 성격이 안정치가 않은 사람이었어. 나 몰라라 하면서 바람피우고 다녔지. 그 사람이랑 어떻게 하다 보니까 애를 셋 낳았네."


'어떻게 하다'보면 다들 애를 셋씩이나 낳는 것인지. 파격적인 무던함이다. 그야말로 파도에 몸을 맡기는 인생. 하지만 영애 씨는 자신이 일을 아주 야무지고 꼼꼼히 한다고 자부한다. 시간을 오래 두고 실망하지 않도록 작업한다고. 그런 사람의 인생에도 어쩔 줄 모르고 흘러가는 불가항적인 부분이 존재하는 법이구나. 여기서 나는 태도를 배운다. 아니, 배워야만 한다. 내 인생 한구석도 알지도 못하게 저만치 흘러가버릴 수도 있다. (어쩌면 그래야만 한다.) 그걸 미리 알고,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 그렇게 다짐한 뒤로 새로운 도전에 더 많이 노출되겠다고 다짐했다. 작심삼일이 아니길 바란다.


야구를 보다 보면 '어떻게 하다 보니' 이기거나 지는 경기가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뭐가 어떻게 켜켜이 쌓여 겨우 한 점을 내서 이기거나, 야금야금 점수를 줘서 정신 차려보니 지고 있는. 이기는 경기엔 이기면 장땡이다 하고 지나쳐도, 진 경기에는 별 경우의 수를 다 생각하게 된다. 이때 투수를 바꿨으면? 그때 번트를 댔으면? 감독은, 코치진은 뭘 하고 그 기회를 다 지나쳐 여기에 왔을까? 하지만 야구에 '만약'은 없고, 졌으면 그냥 진 거다. 그걸 받아들이긴 어렵지만 난 일정 부분의 불가항력을 인정한 지 삼 일도 안 됐기 때문에 인정해야 한다. 어쩌다 보니 우리 팀은 지고 있고, 난 그럼 중계방송을 끄게 되고, 노트북을 펼쳐 마저 하던 필사나 하면 된다.


인생의 기쁨은 성취감에서 오지만, 일정 부분을 포기하면서 얻게 되는 해방감도 분명히 있다.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크면 클수록 열의가 생기지만, 지나친 열의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타이핑을 하다 좋은 문장을 하나 더 발견하게 되는 행운처럼, 가끔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행운 때문에 쉬어갈 수 있다. 행운은 포기를 예쁘게 발음한 이름 중 하나같다.


이어지는 인터뷰에서 영애 씨는 지금이 가장 좋은 시기라고 말했다. 또, 아무도 밉지 않다고 말했다. 아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 오랜 시간을 다 겪어온 후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체념과 행복은 놀랍도록 닮았다. 그러나 체념은 그 언제든 생길 수 있지만, 후회 없음이란 뭐든 나를 지나쳐 간 이후에 생긴다. 만약은 없는, 그 모든 일이 벌어지고 난 이후에, 그제야 난 포기든 행운이든 체념이든 행복이든 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이야기는 흔적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