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되지만, 그것 역시 현실의 기록으로 남았다.
유달리 남의 이야기가 궁금해질 때가 있다. 평소에는 드라마도, 영화도, 예능도 잘 보지 않는데 이상하게 다른 사람들을 들여다보고 싶을 때가. 물론 책도 이야기이지만, 그것보다는 얼굴을 마주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해야 하나. 조금만 부끄러운 장면이 나와도 금세 창을 꺼버리기 일쑤인데 그걸 꾹 참고, 넘기지도 않고, 끝까지 남들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게 될 때가 있다. 그런 마음이 드면 미뤘던 영상 콘텐츠 시청을 몰아한다. 아주 작위적이고 오그라드는 얘기도 그냥 그렇구나 하며 본다. 물론 온몸에 소름이 돋고 발가락이 펴지지 않는 걸 느끼면서 꼭 그래야 했을까? 하다가 체념하는 것에 가깝지만. (그렇게 방금도 팔뚝을 쓸어내리며 드라마 하나를 정주행 했다.)
나는 곰곰해진다. 복잡한 생각이 많이 드는데 아무 말도 안 하게 된다. 그렇게 곰곰한 기분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봤던 드라마의 말투가 따라붙는다. 절로 오글거리는 말투로 진지한 얘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드라마 한 편을 멈추지 않고 다 보면 나도 그 세상 사람이 된 것 같다. 저절로 세계관이 옮겨 붙고 자연스레 재벌 3세가 될 수 있는 것이다.(물론 내 통장은 그대로지만.) 고등학생 때 응답하라 시리즈를 몰아보고 엄마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이상한 사투리로 답했던 적이 있다. 모두 알다시피 응답하라 시리즈는 전라도, 경상도 사투리가 모두 등장해서 내 말투는 그 두 가지를 섞은 요상한 것이 되었다. 그게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투리 경험이다. 대구에서 오래 살았는데도 그 일상에서 들었던 주변 사람들의 수많은 말보다 타지에서 몰아본 드라마 한 편의 힘이 더 셌던 것 같다.
가장 아닐 것 같은 이야기로 붙여진 현실성은 무엇일까. 이걸 보면서도 이런 일이 어디 있냐고 웃다가도 감동 포인트에 착실히 눈물을 흘리는 나는 또 뭘까... 그냥 눈물이 많은 거라고 치부하기엔 또 곳곳에 숨겨둔 대사에 요령 없이 웃음이 나온다. 오글거린다고 무시하면서 남몰래 양치하면서도 그 대사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도 생각난다. 따라 하려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투리도 저절로 옮겨 붙었던 적이 있으니 대사를 따라 하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다. 따라 하는 나를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오는데 처음엔 유우머였다가 지금은 좋아하는 건지 헷갈린다. 그건 문득 나를 따라다닌다. 면접보기 직전에 생각나기도 하고, 화장실에서 떠오르기도 하고, 친구와 떠들다 비슷한 대화에 기시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야기는 흔적을 남긴다. 내 삶에 착실히 들어와 있다.
경험이 어려운 사람은 현실에 도통 적응을 못하고 헤맨다. 잘 만들어진 이야기가 나에게 닿을 때 난 좀 더 잘 살 수 있다. 잘 사과하는 법, 꿈이 있을 때는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는지, 위로할 때 좋은 말투 등은 이야기로부터 얻은 것이다. 배우들이 연기한 캐릭터의 얼굴을 잘 보고 느끼면서. 현실에서 그런 게 극적으로 먹힐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그 이야기에 사는 사람들이 허상 같지 않고, 내가 따라 지었던 말투나 표정이 우습지도 않다. 현실에도 정말 드라마 같은 순간들이 있다. 그런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을 보면, 조금씩은 현실에서 비껴간 것들이 이상한 힘을 갖는 것은 자명하다. *시즌 1안타 타자의 12회 말 대타 동점 투런 같은 것들. 저절로 드라마 주인공처럼 눈물 흘릴 수 있는 일들. 말도 안 되지만, 그것 역시 현실의 기록으로 남았다.
*23년 6월 7일 경기. 마지막 연장 이닝인 12회까지 가서 김수환 선수는 동점 투런를 때렸다. 팀을 구해내는 홈런이자, 자신의 첫 번째 대타 홈런이자, 시즌 두 번째 안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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