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으론 내가 아무리 10할 타자여도
최근, 책에서 그런 글을 읽었다. *"나는 족히 많은 구림을 적립해야 하는 걸 알고 있다." 작가로서 자신의 글을 만족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눈앞의 글이 구려 보여도 일단 닥치고 써서 더 많은 구림을 적립해야 한다는. 자신이 상상하는 근사함을 보존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완성할 수 없다. 느닷없는 완벽주의에 사로잡혀 눈앞의 결과물이 두려워 시도조차 못하면 그냥 그 자리에 멈춘다. 그렇게 멈춰있는 동안 누군가는 끊임없이 시작할 것이고, 무언가든 결과물을 내놓을 것이다. 내 머릿속에 아무리 대단한 무언가가 있어도, 그건 세상 밖으로 내놓지 않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세상은 날 내 머릿속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으로 판단할 뿐.
예전에는 그게 인정이 안 됐다. 그래도 내 머릿속이 천재적이고 난 그저 바로 천재적인 결과물을 내기 위한 시기를 보는 것뿐이라고! 그러나 막상 무언가 시도하려고 하면 '초보자'는 누구나 그러하듯 뚝딱되기 마련이고, 내가 무시하던 저 사람은 여러 번의 행동으로 얻은 능숙함으로 무장되어 있다. "상상으로 하면 누가 못해!" 그 말이 맞는 말이다.
이걸 결정적으로 체감한 것은 전국 스피치 대회에서 예선 탈락한 일 덕분이다. 나는 스피치에 대한 자신이 있는 상태여서 예선 통과 정도는 껌이지~ 하며 자만했는데 탈락 사실을 알게 되고 매우 충격받았다. 지금에 와서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동안 나는 코로나로 인해 스피치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고, 그로 인해 감각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또, 스피치의 주제는 굉장히 추상적인 개념이었는데, 명확한 주제 혹은 주장이 없는 대본은 써본 적이 많이 없었다. 결정적으로 스피치 대회는 처음이었다. 이걸 다 무시하고 오로지 내가 스피치를 잘한다는 자신감 하나로 합격을 확신했던 것이다. 내가 멈춰있는 동안, 누군가는 몇 번이나 부딪쳐 능숙한 스피치를 선보였을 것이다. 그 사람의 재능이 나보다 훨씬 떨어진 것이든 아니든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게.
야구를 보다 보면 그런 순간이 생긴다. "내가 쳐도 저거보단 잘 치겠다!!!" 하고 욱하는 순간이. 답답한 타선을 가지고 있는 팀을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이라면 더욱... 자꾸 보면 왠지 내가 칠 수 있을 것만 같고, 나도 훤히 보이는 걸 저 선수는 왜 모르나 싶고, 그럴 땐 진짜 내가 저 선수보다 잘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내 머릿속에선 내가 10할 타자여도, 실제로는 배트도 한번 쥐어본 적 없고 아무 능력 없는 일반인일 뿐이다. 그러니까 내 위로는 우리 팀 1할 타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학교, 고등학교 선수들과, 독립리그에서 뛰는 아마추어 선수들과, 중학생, 초등학생, 동네 야구하는 어린이들까지 존재한다. 야구장에 훈수 놓는 아저씨들도 배팅 기계에 동전을 넣고 배트 한 번쯤은 휘둘러봤을 테니 나보다 위다. 아무리 답답해도 야구 경력 최하위인 내가 끼어들 수 없다.
그러니, 선수들의 구린... 타율, 스윙, 주루, 수비 등등은 수많은 구림을 적립하는 과정일 것이다. 더 많은 구림을 적립해야 비로소 본인들이 원하는 야구선수의 모습을 갖출 수 있을 거다. 집에서 배나 긁고 있는 나는 치열한 구림의 현장에 얹을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리고 어떤 KBO 레전드가 하는 말. **"느낌과 현상은 다르다." 그렇다. 내 느낌으로는 천재적인 타격이 가능할 것 같아도 막상 배트를 휘두르면 오늘도 구림을 적립하는 것이다. 나도 내일 아침엔 모든 회사를 프리패스할 수 있는 이력서 작성을 할 것이다. 써놓고 보면 초등학생보다 못 쓴 것 같아도... 괜찮다. 난 구림을 적립하는 중이니까!
*임지은 작가의 <헤아림의 조각들> 중 인용했다.
**유튜브 프로그램 <야구잡썰>에 박용택 해설위원이 나와 했던 말. 패널들의 답답함과 의문을 통쾌하게 설명해줬다. 직접 하는 것과 상상하는 것은 다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