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정확한 질문과 답만 주고받지 않는다
요즘 지원서류를 쓰다 보면 "참 좋은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네."의 심정이 된다. 나... 꽤 괜찮은 사람인데, 일 진짜 열심히 할 수 있는데 뭐라 설명할 방법이 없다. 내가 가진 이력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이란 걸 말하고 싶은데, 그건 그냥 내가 일하는 걸 그 사람이 겪어야만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지원서류에서 성실함과 열정을 아무리 어필해 봤자 그 단어들은 그들이 받은 모든 이력서에 있을 것이고, 그러니까 그런 단어들은 채용 시장에서 모든 효력을 잃어버린 것 같다. 열정, 성실, 근면, 노력, 개선, 활발, 발전 등등... 그렇게 효력 없는 말들로 지원서류를 채우면 내 지원서류도 아무 효력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것들을 대체할 수 있는 말들도 딱히 없다. 이 격식 있는 서류에 '진짜진짜솔직히말해서' 같은 구어체를 쓸 수도 없고 '내가 찐이다'라는 경박한 어필도 할 수 없고 '난 좀 똑똑한 듯'하는 자아도취는 부정적인 인상만 심어줄 뿐이니... 나도 그냥 현실을 받아들이고 ‘열정적이고 성실한 태도로 임하겠습니다.’ 할 뿐이다.
그럴 때면 지원서류란 무엇인가. 하며 *김영민 교수의 무적 대화법적 사고를 하게 된다. 정말 그 이력서라는 게 뭘까. 이게 뭐길래 내 직무 능력을 평가할 수 있다고 나대는 걸까. 언젠가는 프로야구 구단 홍보팀에 지원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선 '작년 시즌 성과의 이유와 이번 시즌 성적 예측'을 나에게 물어봤다. 순간 나는 내가 전력분석원을 뽑는 직무에 지원한 줄 알았고, 쓰면서는 이걸 내가 알면 내가 구단 감독이지 여기 방구석에서 이러고 있을까? 의구심이 나를 지배했다. 그 지원서류를 작성하면서 내 지원서류에 대한 철학적 의문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 시즌 성적 예측과 프로야구 구단의 홍보팀의 직무가 정말로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사실은 알고 보니 모든 지원서류는 그저 글쓰기를 얼마나 잘하는 가의 영역일까. 그게 아니라면 그냥 애사심? 그게 아니라면 다른 직무에 지원했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인재를 발굴하기 위한 이중질문?
세상은 사실 정확한 질문과 답만 주고받지 않는다. 내가 충청도에 살아서 그런 화법쯤이야 예전부터 겪어왔다. "배고파?"라는 질문에 "아니 뭐, 너 배고파?"라는 또 다른 질문이 돌아오는 메아리식 대화법은 지긋지긋하다. 상대방의 질문이 사실은 "아니 뭐(안 배고픈 건 당연히 아니지), 너 배고파(하지만 네가 배고프지 않다면 나도 안 먹고 참을 수는 있지)?"라는 엄청난 맥락을 읽어내야 하는 답이었음을 이젠 안다. 알긴 아는데 나는 아직 분노를 참을 수 없어서 자꾸만 지원서류에다 대고 "그래서 궁금한 게 뭔데!!!"하고 싶은 것이다. 당연히 그럴 수 없지만.
이 교묘한 맥락 덩어리로 이뤄져 있는 세상에 나는 아직 적응 중이다. 면접관의 의뭉스러운 질문 꾸러미나 알 수 없는 지원서류 항목들과도 친해지는 중이다. 야구 중계가 끝나면 그날의 수훈선수는 인터뷰를 한다. 그때 캐스터와 해설위원이 질문을 하는데, 안타깝게도 어쩌라고 싶은 질문들도 종종 있다. 그럴 때의 선수들은 베테랑처럼 능수능란하게 답하기도 하지만, 나처럼 영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짓기도 한다. 상대 투수에게 특별한 날이면, 수훈선수 인터뷰를 하러 온 타자의 활약보다 상대투수에 대한 질문을 더 많이 하기도 한다. 곤란하긴 하지만 질문하는 이들의 입장도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 다른 팀 선수를 추켜올려주며 잘 마무리한다. 그걸 티비로 보며 역시 어른은 다르다(나도 어른인데), 완전 나이스하다(난 나이스하지 못하구나)를 반복하는 한편, 어떤 고집스러운 대답도 있다. **유독 취약한 팀을 상대로 본인의 팀이 얼마나 못하고 있는지는 아냐는 짓궂은 질문에 어떤 선수는 단호하게 "말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오. 왠지 통쾌해서 웃음이 나다가 일순간 좀 멋지단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의 지원서류에는 나의 독립잡지 경험을 쓸까 말까 고민되는 항목이 있었다. 회사의 성격 상 '여성잡지'를 만들었던 경력이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럼에도 그걸 꾹꾹 눌러써 제출한 것은, 이게 당신들이 궁금하지 않은 것이어도 "말하고 싶습니다"라고 밝힌 무언가의 신념이 아닐까. 앞으로 세상과 친해지며 여러 이력서와 면접을 겪으면서 나는 그들의 입맛대로 바뀌어갈지도 모르지만, 웃어넘기고 맘에도 없는 칭찬을 하게 될 날도 많겠지만, 나도 어느 순간에는 분명히 나의 의지대로 대답하거나,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김영민 작가의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 실린 '추석이란 무엇인가_명절을 보내는 법1'의 내용을 읽고 썼다. 책이 나오기 전 경향신문에 기고한 '[사유와 성찰]“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가 원본으로, 특유의 유머감각을 드러내는 유명한 글이기도 하다.
기사 인쇄 | [사유와 성찰]“추석이란 무엇인가” 되물어라 (khan.co.kr)
**6월 4일 SSG와 키움의 경기에서 역전 솔로 홈런을 터트리고 승리를 가져온 수훈선수 김혜성의 인터뷰. 인터뷰 중 '알고 있다' 그러나 '말하지 않겠다'를 분명히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