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리가 없는 세상

예상치 못하게 꿋꿋하고 단단한 마음도 있다

by 일구삼

무기력을 느끼는 순간은 종종 찾아온다. 저항할 여유도 없이 그냥 눈앞에 와있다. 내 안에서 생긴 감정이라면 어떻게 개선하고 통제해 볼 방법을 찾겠는데, 남이 가져다주는 건 어찌할지도 모르고 당한다. *방심하고 유튜브를 좀 보는 사이 어떤 여자가 아주 심하게 맞고 고통스러워하는 걸 봤다. 블러 처리를 했는데도 분명히 폭행의 현장은 보였고, 그 이후에는 울면서 인터뷰하는 게 나왔다. 가해자가 너무 약한 처벌을 받아 보복이 두렵다는 내용이었다. 그걸 보는 줄도 모르고 보다가 아차 싶어 급하게 유튜브에서 나왔는데, 이미 폭력의 잔상들은 다 기억에 남았다. 이놈의 SNS한테 또 당했구나...


그 이후로 밥을 먹다가, 양치를 하다가, 폼 롤러를 하다가, 보고서를 쓰다가, 채용 공고를 찾다가 갑자기 무기력해졌다. 약간 냉정해졌다. 내가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싶고, 세상이 나의 자리를 내주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지고. 이렇게 쫓겨나 세상의 모서리만 걷다 나도 무언가에 맞아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건가? 그게 삶이라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지금 이걸 쓰는 데도 이걸 쓰는 게 또 다 뭔 소용인가 싶다. 원래도 망상이 심한데 그런 자극적인 영상을 봤으니 생각이 멈출 수가 없다. (스스로 그만 생각해! 그냥 닥치고 써! 를 몇 번이나 육성으로 생각해 겨우 노트북 앞에 앉아있다.)


발로 툭툭 채이는 기분이 들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실제로 아무도 안 찼는데 차였으면? 물리적 가해자는 없는데 나도 분명 누군가의 발에 맞아 지금 시름시름거리고 있다고. 중심을 잃고 넘어질 것 같다. 나에게도 무언가 변화가 나타났고, 그런 의미에서 공포는 실체 없는 폭력이 아니다. 공포는 무기력이 됐다가, 우울이 됐다가, 분노도 됐는데 그건 되게 위험한 거였다. SNS에 뜨는 헛짓하는 범죄자들에게 쌍욕을 박는다거나, 쓰고 있는 이력서에 이상한 항목이 있으면 뽑을 것도 아니면서 물어본다고 성을 내거나, 뭐든 바른말에 '어쩔티비'하게 되는 것이다...(이게 아닌가?) 하여간 그래놓고 결국엔 저속한 언어사용에 내가 더 놀라고, 이력서를 착실히 작성해 접수한다는 게 코미디지만.


내 자릴 내주지 않는 세상은 나도 싫다. 날 싫어하면 나도 싫다. 그것만큼 정확한 감정도 없다. 좋고 예뻐 보이는 구석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다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최근 고교 야구 대회에서 막을 수 있었던 큰 사고가 있었다. 경기 중에 선수가 큰 부상을 당했고, 이를 수습할 의료진이 없어 20분 동안 방치됐다. 119에 신고하고, 경기재개를 위해 피를 닦고, 부러진 이빨을 찾는 것은 모두 선수들과 가족을 포함한 관중의 우왕좌왕으로 이뤄졌다. 공식적인 대회였고, 동네 야구도 아니었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사무처장은 "협회가 모든 경기를 다 확인할 수는 없지 않나."라고 했다. 태연하고 정확한 배제였다. 고교 야구 선수의 자리까지 우리가 다 내줘야 하냐는.


다들 분노하고 있는 와중 선수의 가족분이 SNS에 글을 썼다. 잔뜩 안타까워하며 읽다가 마음에 탁 걸리는 한 마디. '선수 생활이 끝났다느니 이런 이야기는 사실 보고 싶지 않습니다. 치아 문제 때문에 완벽하게 낫기까지 2년이 걸린다 하더라도 선수 생활을 다시 이어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다시', '2년', '선수' 같은 단어들은 내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세상 미워 어쩌구 했던 내가 되게 옹졸해 보였다. 그렇다고 그런 마음들이 사라지는 건 아닌데, 그러니까 어떻게 날 버린 대상에 마음을 다시 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예상치 못하게 꿋꿋하고 단단한 마음도 있구나. 그런 마음들이 모여 반쯤 기울어버린 이 세상을 어찌어찌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냥 굴러가는 거구나. 가끔 난 운동으로 108배를 하는데 절을 할 때면 이상하게 절로 비는 마음이 된다. 그날 저녁에는 자꾸만 보지도 않은 그 학생 얼굴이 생각나서 겸사겸사 운동과 기도를 함께 하게 됐다. 부처님인지 하느님인지 누구신지는 몰라도 한번 좀 도와주세요. 이 정도는 도와주셔야 신이라고 할 수 있어요. 꼭 선수가 돼서 프로야구에서 볼 수 있길 바라요. 세상이고 인프라고 비판인 척 냉소를 말하는 목소리도 누군가의 순수한 마음 앞에선 맥을 못 추는 법이다. 어느 정치인의 유명한 캐츠 프레이즈처럼 '사람이 먼저'니까. 어거지로 돌아가는 세상은 여전히 밉고 씁쓸해도, 그래도.




*최근 화제가 된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보도 영상이었다. 너무 자극적인 영상이라 따로 링크는 걸지 않겠다.


**6월 11일 경기도에서 열린 진영고와 부천고의 주말 리그 경기 중 벌어진 사고다. 자세한 내용과 대한야구소프트볼 사무처장의 발언은 기사에서 볼 수 있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7697208&re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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