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뭐야?

침묵과 환호의 냉정한 승부

by 일구삼

야구를 함께 보던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악!은 뭐야?” 방금 심판에게서 스트라이크 콜이 나온 직후였다. 그 사람이 말하는 "악!"은 심판이 "스트라이크!"를 빠르게 외치려다가 나오게 된 외마디 비명같은 것이었다. 어찐지 "스트라이크!"라고 외치는 심판은 아무도 없다. 모두 제각각이다. 어떤 심판은 명랑하게 "호오옥!"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후~휘~"같이 타자를 좀 놀리는 거 같은 소리를 내기도 하고, "으으윽!" 괴성같은 소리를 내기도 한다. 이번 심판의 스트라이크 콜은 유독 절규같이 들렸다. 야구를 매일 보는 나 같은 사람은 그게 스트라이크 콜인줄 알겠지만, 야구장에 처음 와보는 그 질문자는 그게 그냥 비명으로 보일 터였다. “보통 심판이 소리를 지르면 그게 악!이건 스트라이크!건 무조건 스트라이크라는 뜻이야. 보통 볼에는 소리를 지르지 않으니까.” 내가 그렇게 설명하자마자 투수는 스트라이크 존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볼을 던졌고 심판은 침묵했다. 나도 말을 잃었다. 저… 저딴 곳에 공을 던지다니.


스트라이크에는 소리 지르고, 볼에는 침묵한다. 이토록 단순하고 냉정할 수 있을까. 그 침묵의 시간엔 시간이 엉겹으로 흐르는 것 같다. 심판은 물론 포수와 타자, 팬들까지도 그 투수를 바라보고, 공이 투수에게 되돌아오는 동안 시선은 계속되고, 투포수가 사인을 맞추고 다시금 스트라이크를 꽂아넣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박수 소리는 침묵을 비집고 나온다. 화날 때 가장 무서운 사람은 말이 없어지는 사람이듯이, 투수 입장에서 그 침묵은 단순한 분노를 넘어선 비난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 같다. 가장 명징한 방식의 비난이 계속되는 동안 자신이 견뎌야 할 것은 그 비난 뿐만 아니라 그 비난을 잊고 집중하여 투구할 용기를 얻는 것까지다. 아니, 그 용기로 스트라이크를 꽂아넣는 것 까지다.


소리와 침묵으로 명료하게 떨어지는 승부의 세계는 비단 투수에게만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타자도 볼을 고르거나 안타를 치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지만, 헛스윙을 하면 싸늘한 정도의 침묵이 돌아온다. 이건 내가 몇연패에 빠진 팀의 팬과 함께 야구장을 가봐서 안다. 적당히 화나면 눈을 부릅뜨고 "안타쳐라…." 라고 조용히 요구하기라도 하지, 몇연패가 계속 된 그날의 경기에는 아무 말도 안했다. 친구를 포함한 그 팀 팬들은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사직 야구장은 응원가 소리가 힘차서 *‘사직 노래방’이라고도 불리는데, 노래방이 독서실처럼 고요해지면 분명 큰 문제가 생겼다는 거다. 실제로 롯데가 대패를 한 날엔 어김없이 팬들이 야구장을 나가는 모습이 중계된다. 정말, 이토록 단순하고 냉정하다니. 적막만이 감도는 노래방처럼, 그럴 때의 사직 구장은 영업중지를 선고받는 것 같다.


하지만 야구는 인생과 같아서 그 조용한 침묵의 시간들은 환호의 순간을 기다리며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예를 들자면, 엄청난 호수비의 순간이나 9회말 역전 만루홈런 같은 때. 그런 함성의 순간 이전에는 반드시 침묵이 존재한다. 희망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침묵한다. 그 침묵은 현재의 상황이 절망의 순간이라는 뜻 같기도 하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모양새같기도 하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때 우리는 기도하듯이, 기도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가장 희망을 생각하며 하는 것인 것처럼, 기도를 할 때면 모두 입을 꾹 닫듯이. 그런 침묵은 꼭 기도의 시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침묵을 견뎌 얻어낸 결과는 귀가 멎을 정도의 큰 소리를 불러온다. 엄청난 함성과 박수. 따라나오는 응원가 혹은 아파트(다들 아시는 윤수일의 아파트 맞다. 꼭 승리 후에 야구장에선 아파트를 틀고 즐기는데, 왜 하필 그노래인지 이유는 전혀 모르겠다.). 그런 함성을 들어본 날이 내 인생에 몇 순간이나 있을까 모르겠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함성 소리는 어느 전국 대회에서 준우승을 했을 때인데, 그 때는 내가 2등을 했다는 기쁨보다는 마지막 패자가 됐다는 절망감에 취해있느라 환호를 즐기지 못했다. 심지어 혼자서 약간 울었던 것도 같다. 누군가는 말도 안된다고 하겠지만, 그때는 정말 승부욕이 강해서 지는 걸 못 견뎌했다. 뭐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아 야구팬이 된 것 같긴 하지만….


하지만 눈물도 어느 종류의 소리다. 눈물이 왜 나오는지도 모를 것 같은 기분 속에서 울 때 뭔가 참았던 것들이 다 터져나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야구장에서도 아주 희망을 가지고 오랫동안 숨을 참은 이후에는 허무하게 경기가 끝났어도 이상하게 박수를 친다. 수고했다는 의미, 혹은 격려 혹은… 아무생각없이 박수를 칠 때도 있다. 그 여운을 느끼며, 그 시간을 지난 것을 깨달아가면서. 누군가가 안타를 치기를 혹은 안타를 맞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 마음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 대회를 시작할 때 나도 기도를 했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오늘 결과가 좋게 나길 바란다고 빌었다. 그게 물론 “진짜 다 찢어버릴 거야. 완전 발라버릴 거야!”같은 잔인하고도 유치한 말이긴 했지만…. 아마 그래서 울었나? 그리고 돌아가는 길엔, 어두워지고 있는 밤하늘을 보면서, 같이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팀원들에게 말했다. “그래도 잘했다.”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말한 거였다. 그게 아마 패배의 순간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멍하게 박수를 치게 되는 마음과 비슷할 것이다. 결과가 나지 않아도 기다리고 기도했던 침묵의 시간 이후에는 누구든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건 아주 냉정한 세계에서도 그렇다.




*'사직노래방'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영상. 사직 구장에 울려퍼지는 '부산갈매기' 떼창은 영상으로도 뭉클하다.

https://youtu.be/-CLzJsuok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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