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은 종종 당황스러운 순간에 나아진다

어느 루키의 160km 공과 우리 팀 4번 타자의 생경한 유니폼

by 일구삼

졸업을 하고 나서 처음으로 학교에 갔을 때, 내가 꽤 당황했던 부분은 실시간으로 기분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나 친구와 만나 점심을 먹고, 데려다주는 길에는 누가 날 알아볼까 뒤늦게 좀 곤란했다. 실제로 신문사에서 함께 일했던 기자가 날 알아봤고, 잔뜩 삐걱대며 인사하고 후회를 하는 중이었다. 데려다주지 말걸. 그냥 집에 갈걸. 그런데 내가 다니던 단과대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리 과 수업이 열리는 4층에 도착했을 때 이상한 기류를 느꼈다. 이상하다. 기분이... 좋아진다. 복도에 덩그러니 있는 테이블에선 항상 거기에 떠들고 있는 애들이 여전히 떠들고 있었다. 마주치고 인사하면서 결코 사람과 만나는 게 엄청나게 즐거운 일은 아닌데도, 좋았다. 거기에 있으니 나도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이런 유치한 말을 쓰게 되는 날이 오다니. 근데 진짜다. 졸업을 아직 하지 않고, 과제에 떠밀리면서도, 아무것도 제한되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가능성에 의존해 희미하게 흐뭇했던 때로,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고.


원래 나는 눈치가 아주 빠른 사람이라고 자신해 왔다. 기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우는 사람이라 순간의 흐름도 잘 읽었다. 그런데 요즘엔 꿈과 현실도 자주 헷갈린다. 바보가 된 기분인데, 이렇게 살아도 멀쩡하게 살아진다. 그렇게 살다 보니 정신을 못 차리고 대학 시절 거기에 갔다고 대학생이 된 기분을 바로 느꼈을 거다. 말했듯이, 그런 기분을 느끼고 '내 머리에 큰 문제가 생겼어!'라고 비명을 지르던 때는 지났다.(분명 있기는 했다.) 그냥저냥 살아지니 태평하게 기분이 좋네... 이상하네... 하고 마는 것이다.


살다 보면 기분은 이렇게 종종 당황스러운 순간에 나아진다. 언제 한 번은 잊고 있다가 기자 장학금을 받았는데, 묘하게 기분이 나아져서 스스로에게 거리감을 두고 싶었던 적도 있다. 방금 전까지 시험 기간에 온갖 과제가 겹쳐 있는 대로 인상을 쓰고 있었단 말이다. 내가 정말 이렇게 까지 속물이라니. 꼴랑 10만 원 정도에 방금까지 땅바닥을 기고 있던 내가 은근슬쩍 웃고 있다니. 돈뿐만이 아니다. 친구의 지나가는 칭찬 한마디에 일주일을 헤매고 있던 내 자존감이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 지나가다 사 먹은 과자가 맛있어서 인생은 충분히 살만하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심지어는 오랫동안 버겁게 준비하고 기다리던 대회에 떨어졌을 때 묘한 안도감을 느끼고 더 열심히 살기도 했다. 이렇게 쓰고 나니 정말 이상한데, 내가 좀 유난인 구석이 있긴 해도 사람이라면 다 이럴 거라 믿는다. 그리고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응원하던 야구팀이 이겼을 때.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왜 그들의 노력과 결과에 내 인생을 의탁하는지 정말 별로라고 생각하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건 사실이다.


내 기분 체계는 아주 사소하고 예민해서 이겼을 때만 기분이 좋은 건 아니다. 아주 어린 선수의 빛나는 가능성을 발견했을 때면 져도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는다. 아주 뿌듯하고 행복하게 잠들 수 있다. 작년 루키의 데뷔 첫 선발과 안타, 그리고 *'잠실 폴대를 완전히 흔들어 놓은 홈런'은 지금까지도 꺼내서 들여다보는 영상들이다. 또 다른 루키의 데뷔전 첫 타자 상대 스윙 삼진도 볼 때마다 심장이 찌르르한다. 신인들은 팀이 일원이 된 지 얼마 안 돼서 거의 낯을 가릴 지경인데도, 거의 생판 남이 하는 스윙과 투구에 울고 웃는 꼴이다. 쌓아온 정이 아주 오래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좋을까. 아무래도 쌓아온 정 같은 건 상관없다. 왜냐면 난... 다른 팀 루키가 잘해도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게 우리 팀을 상대하는 것이라도....


**오늘은 다른 팀 어느 루키가 KBO 역대 국내투수 최고 구속 기록을 갈아치웠다고 한다. 유튜브에서 몇 번 마주친 게 전부인데도 이렇게 내가 다 뿌듯한 걸 보면 정말 이상하다. 작년에 처음 리그에 들어온 아주 어린 투수 덕분에 이제 우리나라에도 100마일의 시대가 시작됐다. 160을 뿌리던 얼굴은 그 어느 때와 비슷하게 어리고 그렇지만 침착한 얼굴이다. 땀은 많이 나는데 그래도 말간 얼굴, 아무리 많이 알고 싶어도 아직은 잘 모르는 얼굴이다. 그 혼신의 힘을 보고 있으면 울컥하기도 한다. 위로되기도 한다. 작년, 코로나에 걸렸을 때 나를 위로해 주던 건 다름 아닌 신인 선수의 프로 첫 홈런이었다. 그중에서도 오래 기억에 남는 장면은 더그아웃에서 샐쭉하게 웃던 얼굴. 이게 다 처음이란 걸 잘도 티 내는 얼굴이었다. 그때 난 집에 혼자 갇혀서 '나도 코로나가 처음인데 흑흑'하면서 이상한 기분에 엉엉 울었다.


야구가 반복되고 해를 거듭하며 승리와 패배는 교차한다. 신인 선수는 중견선수가 되고 그들이 은퇴하는 날도 올 것이다. 샐쭉 웃고 어색해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냉정하거나 평온한 표정을 하게 될 것이다. 처음이 처음이 아닌 게 되고, 내가 매일 쓰는 마스크처럼 너덜너덜 해질 것이다. 그래도 어딘가에서는 당황하고 웃기도 하겠지. 매일 가던 학교에 오랜만에 갔다고 기분이 널뛰는 것처럼 아직도 통제할 수 없고 생경할 수 있는 부분이 남아있다는 게, 아주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게 그래도 다행이다. 그 순간순간에, 놀랄 만큼 나아지는 인생도 숨겨져 있다고 믿고 싶다. 가끔씩 꺼내보는 영상 중엔, 오래전 ***우리 팀 4번 타자의 생경한 유니폼과 그보다 더 새로운 웃는 얼굴도 있다.




*22년 4월 15일. 키움 히어로즈 박찬혁 선수가 두산 베이스 최승용 선수에게 본인의 잠실 첫 홈런을 때려냈다. 캐스터의 '잠실 폴대를 완전히 흔들어 놓은 홈런' 멘트는 들을 때마다 통쾌하다!

https://m.sports.naver.com/video/930440


**23년 4월 12일. 한화 이글스 문동주 선수가 국내 선수 최초로 160.1km의 구속을 기록했다.

https://m.sports.naver.com/video/1062370


***히어로즈 4번 타자가 위즈 4번 타자가 되어 우리에게 보여준 끝내기 홈런. 새롭지만 익숙한 광경이었다.

https://m.sports.naver.com/video/969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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