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복치에게도 끝내기 기회는 온다

병살과 끝내기, 뜬 공과 홈런, 패배와 승리

by 일구삼

세 번째 탈락 통보를 받은 후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난 잘하는 게 전혀 없구나.”


바로 어제, 상담 선생님을 만나 나의 강점에 대해 떠들고 난 바로 다음날이었다. 내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사고하는지, 말은 또 얼마나 조리 있게 하는지, 잡지 창간과 학보사 기자를 거쳐 글을 얼마나 잘 쓰는지… 그러다가 이력서 작성은 문제없이 한다는 허세까지 부렸던 것 같다. 그래놓고 내가 쓴 이력서로 바로 불합격 통보를 받는 처지란. 그 불합격 통보는 단순히 ‘탈락’의 의미를 넘어 나를 비난하는 것 같았다. 너 이력서 되게 못쓰는 거 알고 있니? 어제 네가 한 말은 다 허세라는 거 알고 있니? 평소에도 멘탈이 거의 개복치 수준인 나는 갑자기 떨어진 팩폭에도 맥을 못 추고 비실거렸다. 개복치 게임의 사망 사유가 오백 개는 되는 것처럼 나도 ‘팩폭도 폭력이야…’ 하며 비척비척 죽음의 강을 건너려 했다.


나의 이런 비약적인 자기혐오의 과정을 잘 알고 있는 내 친구들은 하나 같이 내가 잘하는 게 얼마나 많은지 알려주려 노력하지만 솔직히 큰 도움이 되진 않는다. 그게 도움이 됐으면 개복치도 잘 안 죽는 물고기로 쉽게 바뀌었겠지. 자기가 얼마나 나약하게 죽는지 분명 걔도 알고 있을 거다. 개복치도 햇빛이 너무 좋다는 어이없는 사유로 죽어갈 때 속으로 ‘하… 이놈의 그지 같은 멘탈…’ 하면서 죽었을 거란 말이다. 근데 안 되는 걸 어쩔까. 체질 개선이 쉽다면 세상에 알레르기 같은 건 이미 소멸됐을 것이다.


모든 게임이 한번 죽고 나면 다시 도전할 기회가 있듯이 개복치도, 나도 다시 살아갈 기회는 온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정은 내가 이럴 때마다 금세 다시 괜찮아질 거란 걸 강조한다. 평소 '논리적인 사고'를 엄청나게 강조하는 나를 잘 아는 내 친구는 위로의 순간에 요목조목 근거를 든다. "너 3년 전에도 이랬고, 한 달 전에도 이랬는데 항상 또 괜찮아졌잖아. 잘하는 게 없다는 생각은 금방 또 바뀔 거야. 항상 그랬으니까."라고 말한다. 거기에 대고 나는 “... 근데 이번엔 진짜 안 그럴 거 같아!!!”하며 떼를 쓰지만, 나도 정의 말이 맞다는 걸 안다. 오늘은 떨어져서 낙담해도 어제 내가 호언장담한 내 장점들은 진심이었다는 걸 안다.


인생의 몇 가지 큰 성공들을 들춰보면 어제까지 자책하다 어영부영 이뤄낸 것이 꽤 있다. 게으른 내 성정 때문에 ‘난 진짜 안될 인간이다’라고 결론을 내린 다음날 나는 200만 원 상금이 걸린 대회에서 2위를 차지했고, 너무 떨려서 ‘이 멘탈로는 말하는 직업을 못하겠다’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토론 대회에서 우승했다. 자매품으로 ‘나 좀 잘하는 듯?’ 하자마자 결승전에서 호되게 당한 적도 있다. 목숨이 간당간당한 개복치였다가 하루아침에 200년을 살아내는 개 짱 센 고래로 변하는 게 인생이라는 걸 나도 안다. 아는데…


머리로 아는 게 전부 마음에 적용되면 세상은 더 살기 좋아졌을 거다. 달라지는 게 없을 때는 그냥 흘려보낼 수밖에 없다. 다시 작은 성취를 이룰 때까지, 이상한 자신감이 차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일단은 살다 보면 고래가 될 수 있는 기회는 찾아온다. 나도 다시 크고 단단해질 수 있다. 게임에서 리트라이 버튼이 주어지는 것처럼, 야구에서 다음 타석이 주어지는 것처럼.


마음을 달래는 동안엔 그냥 가만히 누워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야구를 본다. 엎드려서 볼을 바닥에 대고 멍하니 본 그날의 경기에도 누군가는 기회를 잡았다. 1사 만루 찬스의 순간에 병살을 쳐서 (…) 미쳤냐는 소리를 들은 타자에게도 다음 타석은 오는 법. 다음 이닝에 순리대로 다가온 타석은 2사 만루의 기회다. 병살을 잊고, 아니 잊으려고 노력하고, 이번엔 개복치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야 한다. 볼은 거르고 스트라이크는 치려고 한다. 주춤되면 안 될 것이다. 고래, 그래 고래의 커다란 몸처럼 드넓은 마음으로 스윙하려 한다. 자연의 순리대로 파도가 치듯이 밀고 나감에 망설임이 없는 스윙. *그런 스윙으로 그 타자는 끝내기 안타를 쳤다. 아주 커다랗고 호쾌한 타구를 만들어냈다.


패배와 승리. 병살과 끝내기. 뜬 공과 홈런. 세 개의 아웃카운트는 깜빡대고 이닝이 지나면 또 다른 이닝을 시작한다. 그날의 경기가 끝나면 내일의 경기가 있다.


이렇게 때때로 야구는 인생과 닮아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다.




*23년 4월 1일 개막전. 키움과 한화의 경기. 이형종 타자는 자신의 통산 첫 끝내기를 키움으로 이적 후 첫 출전한 개막전에서 기록했다. 앞서 8회 말의 병살타를 만회하는 끝내기였다.

https://m.sports.naver.com/video/1059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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