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이맘때쯤, 국내 최고 패션회사로 꼽히는 한 회사의 최종면접을 보며, 나는 난생처음 옷 지적을 받았더랬다.
자타공인 유교걸이지만, 패션 회사 면접은 달라야겠다 싶어, 투피스가 아닌 원피스에 볼드한 액세서리로 포인트를 주어꾸미고 갔는데, 그게 어딘지 모르게 튀어 보였나 보다.
"우리 브랜드 옷도 아니네?"
"1차 면접 때는 입었습니다만..."
두 번째 지적에는 억울한 마음마저 들어 한 마디 꺼내긴 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궁색한 변명이었고, 나는 면접장 안을 스멀스멀 채우는 탈락의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저기요. 여기 옷한 벌은 백만 원도 넘잖아요!
제가 면접 보자고 몇 백만 원 써야 되는 겁니까?
그리고 왜 계속 반말이세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좁디좁은 HR 분야에서 언젠가는 마주칠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한껏 밝은 미소를 띤 채 뒷걸음으로 총총총 면접장을 나왔다.
전공 지식이나 업무 관련 경험에 대한 질문은 없고 내가 입은 옷 한 벌로 자질을 검증 했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위아래를 훑는 눈빛과 권위적인 말투도 기분 나빴다.
나를 탈락시켰다는 서운함과 오기 때문에 여러 면접 후기와 패션 회사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찾아보았더니 해당 업계는 그런 면이 좀 있었다.
예쁜 인테리어가 된 사무실에서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들이 모여 부드러운 소통을 하고, 만드는 제품처럼 아름답고 여유로운 기업 문화를 갖고 있을 것이라는 내 생각은 착각이었다.
상하관계가 분명하고 보수적인 곳이 많았다. 일이 고되고 급여가 적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션회사 입사를 희망하는 인재가 많았기 때문에 수직적인 조직 문화는 개선되기 어려워 보였다.
굳이 예의 차리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직설적으로전하는 상사, 게다가 자기관리까지 철저한 사람들이다 보니, '살쪄 보인다고 상사한테 혼났다'는 사례가 있을 정도로 직원의 외모 평가도 일반적이었다.
나는 이런 꽉 막힌 조직 문화에서 디자인을 하니, 지난 시즌 옷이나 이번 시즌 옷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며, 런웨이는 지루할 지경이라고, 툴툴거렸던 기억이 난다.
면접 흑역사를 꺼내는 이유는, 그 당시 알게 된 패션업계의 보수성이 요즈음엔 옅어지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잇달아 해당 업계 리더들이 MZ 세대로 바뀌었다는 뉴스를 접한다. 컨퍼런스나 학회에서 패션, 뷰티 회사의 인사 담당자들을 만나 보면, 조직 문화 개선을 위한 고민이 많고 또 다양한 시도로 변화를 이뤄내고 있었다.
캣워크 모델이 눈에 띄게 바뀌었다
내부 못지않게 업계 전반에 개방적인 모습이 엿보인다.가장 큰 변화는 런웨이에 선 모델들의 모습이다.
그동안 패션, 뷰티 브랜드는큰 키의 젊고 마른 백인 모델이 대변했다. 그것은 누구나 선망하는 모습이자 브랜드의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바디 포지티브(Body Positive, 자신의 몸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갖자는 움직임)' 문화는 다양한 체형과 인종, 연령대의 모델을 캣워크에 서게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히잡을 쓴 여성, 볼록한 배의 임신부, 은발의 주름진 할아버지, 플러스 사이즈 여성, 성을 특정하지 않는 퀴어 모델이 런웨이를 걷는 것을 본다.
국제 런웨이 무대에 오른 최초의 히잡 착용 모델 할리마 아덴(Halima Aden)이 이슬람교도를 위한 전신 수영복 부르키니(Burquini)를 선보이고 있다.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로 유명한 릴리 알드리지(Lily Aldridge)는 배에 착 달라붙는 드레스 차림으로 런웨이에 올라 임신부의 모습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성을 구분하지 않는 젠더 뉴트럴 트렌드 또한 모델과 디자인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트렌스젠더 모델 테디 퀸리반(Teddy Quinlivan)은 보수적인 곳으로 유명한 샤넬의 뷰티 모델로 발탁된 바 있다.
Junya Watanabe 런웨이에 오른 시니어 모델들은 패션에 있어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누구나 선망하는 모습'을 일괄적으로 그려내던 패션 회사들이 '누구나 매력적일 수 있다'며 사회적으로 고정화되어 있던 미의 기준을 흔들고 있다.
캣워크 모델은 옷 이상의 것을 입고 있다.
MZ세대는 시니어 모델을 팔로잉하며 열광한다.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있기에, 가녀린 체구가 아닌 사람도 런웨이를 보는 재미를느낀다.여러 집단 간 자연스러운 소통이 반갑다.
내가 지금 그 회사 면접을 다시 본다면, 어쩌면 "스타일이 노멀 하네."라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르겠다며 웃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