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상반기가 끝났다. 돌이켜 보자면 온통 분노가 많았던, 누군가를 미워하고 이해하기 위해 에너지를 많이 쓴 시기였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가장 큰 갈등상황을 겪은 시기이기도 했다. 갈등은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갈등으로 인해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냥 나쁜 것으로 남게 된다. 7월은 내게 갈등 해결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될 시기가 될 것 같다.
분별력
분별력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다. 일이나 사물을 구분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요즈음의 나는 분별력이 없었다. 올해 들어 부쩍 특정인, 특정 상황에 대해 화가 많이 났고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는데, 내가 왜 화가 났는지, 그 분노의 근원은 무엇인지, 십점 만점에 몇 점짜리 분노이고, 내가 분노를 표현했을 때 어떤 영향력이 있을 것인지 생각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 그냥 나의 감정에 솔직한 것만이 내게는 최선이었건만, 사실 그건 어린애 생떼와 다를 것이 없었다.
분별력을 길러야 한다. 분별력이 있다면 충분히 심플해 질 수 있을 것 같다. 온갖 감정을 배출하기보다는 오해 없이 필요한 말만을 할 수 있기 위해서도 분별력은 필요하다. 나를 이해하고, 상황을 이해하고, 사회인으로서 그냥 꼭 필요한 최소한의 표현만 하는 사람. 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은 것 같다.
체력
적어도 내게 다정과 사랑은 체력이 충분히 뒷받침 해줘야 생성 가능한 감정이고 상태다. 고민하고 성찰하는 것 또한 체력이 있어야 가능한데, 나는 심리적으로 불안할 때 생각하거나 몸을 움직이는 것을 포기하는 습관이 있어서 체력을 기르는 것을 번번히 실패해왔다. 마음이 힘들어지면 운동(이랄것도 없는 최소한의 움직임)을 포기하고, 운동을 못 하니 다시 체력이 떨어지고, 체력이 떨어지니 성찰은커녕 최소한의 사유도 잘 되지 않는, 몹시 게으른 불행의 굴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불행을 회피하는 식으로 삼십 대가 됐는데, 이대로 사십 대가 되어서는 영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체력도 없고, 사유와 성찰도 없는 사십 대의 나는 매우 못났을 것 같다. 내가 무척 미워하는 모습이 되어 있을 것 같다. 부끄러움을 넘어서 환멸하는 대상이 내가 된다는 건 정말 안 될 일이다.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어떤 감정을 견딜 수 없을 때, 일단 밖으로 나가 걷겠다. 마음이 침착해 질 수 있을 때까지. 울더라도 걸으면서 울겠다. 생각하기를 포기한 나는 더 멍청하고 더 못나질 뿐이다. 감정이 태도로 이어지는 사람을 나는 그렇게나 경멸해 왔었는데, 사실 그건 자기혐오의 어떤 연장선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랑과 이해
잘잘못을 덮어놓고 그저 포용하는 것은 사랑이나 이해가 아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내 눈을 흐리면서 일을 해왔다. 조직 내에서 내 개인성을 가지고 안 되는 일을 되게 해오려고 노력했었는데, 그런 업무 방식은 한계가 있었을 뿐더러 조직 문화에 악영향을 가져왔다는 생각을 한다. 조직에는 조직의 규칙과 방식이 있어야 하고, 공동체다운 질서와 운영이 있어야 했다. 시민단체로서의 본질을 너무 오랫동안 간과해 왔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기록하기
나의 정체성을 기록하는 인간으로 두고서도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역시 에너지가 너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기록하기를 포기하지 않겠다. 성찰과 기록을 계속 이어가겠다. 성찰하고 기록할 힘을 기르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잘 자고, 에너지원을 잘 섭취하고, 분별력을 기를 수 있도록 내 스스로를 잘 돌보겠다.
다시 기록을 시작하는 데에는 서영이 언니가 큰 영향을 미쳤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이면서, 또 나의 좋은 지침이 되어 주는 언니에게 무척 고맙다. 우리 둘 모두 함께 무척 심플하고, 우아하고 간결한 할머니로 늙을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