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내 나라의 진짜 나는4

by 이정표

한점은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작 게임 출시를 앞두고 밤샘 근무가 이어졌었다. 다행히 시장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고,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회사는 팀 전원에게 포상휴가를 내주었다. 마침 여름 휴가철과 주말까지 겹쳐 실제로는 일주일 넘게 쉴 수 있었다.

하지만 황금 같은 긴 휴가를, 한점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집에서 보내고 있었다. 처음 며칠은 밀린 잠을 보충하듯 암막커튼을 치고 늘어지게 잠만 잤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이틀, 피로가 가시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떠오르지 않았다. 느긋해서 좋기도, 늘어져 지루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바쁘게 일하던 때가 더 나았단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한점은 원래 시간을 허투루 쓰는 걸 무척 싫어했다. 예전의 그라면, 휴가 계획쯤은 진작에 다 짜놓고, 여행이든 독서든 운동이든 알차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예전에도 정말 하고 싶어서 그런 삶을 산 게 아니라, 가만히 있는 게 그저 두렵고 불안했을 뿐이었다.


오늘도 그는 쇼파에 몸을 푹 파묻었다. 오른손으로 머리를 괴고, 왼손으로 TV 리모컨을 조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채널을 넘기다 뉴스에서 멈췄고, 이윽고 왼손도 머리 뒤로 가져갔다. TV에서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광복절 80주년입니다. 전국 곳곳에서는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커튼이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잔잔한 오전 햇살이 흘러들고 있었다. 테이블 위 머그잔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진한 커피 향이 풍겼다. 한점은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흘끗 보았다. 약속 시간까진,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때,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계속해서 울려대는 소리가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화면에 뜬 이름은, 회사 팀장님이었다. 한점은 고개를 갸웃하며, TV 볼륨을 음소거로 바꾼 뒤 전화를 받았다.


"네, 팀장님."


"한점, 휴가 잘 보내고 있어? 방해해서 미안해. 잠깐 통화 괜찮을까?"


"네. 말씀하세요."


"다른게 아니라 저번에 한점이 정리해둔 유저 피드백 자료 말이야. 대표님이 다시 보고싶어 하셔서. 메일로 한번 더 보내줄 수 있을까해서"


"네, 바로 보내드릴게요."


“고마워. 아, 그리고 하나 더… 이건, 혹시 몰라서 묻는 건데…”


불길한 예감에, 한점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네."


“혹시 SNS에다 이상한 글 올렸어?"


"이상한 글이라뇨?"


"아니,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돌더라고... 한점, 너가 남자 좋아한다고..."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한점이 입을 열었다.


"맞아요, 저 남자 좋아해요."


"맞다고? 그럼 그게 사실이란 말이야?"


"네. 그리고 이상한 글 아니고, 성소수자로 살며 느낀 걸 적은 거에요."


"그런 걸 굳이, 뭐하러 올리고 그래? 나한테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던가..."


"왜 올렸는지는 제 글 보면 아실텐데요. 앞으로는 올리기 전, 하나하나 팀장님께 허락 받을까요?"


"아니, 나는... 자네가 걱정돼서 그러지."


약간의 침묵 뒤, 한점이 입을 뗐다.


"...걱정해주셔서 무척이나 감사해요. 근데, 제가 게이인 사실이 문제될게 있나요?"


“나야 뭐 일만 잘하면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 할까봐 걱정돼서. 그나저나 여직원들이 속 좀 쓰리겠어, 하하하."


팀장이 자기가 한 말에 혼자 웃더니, 이내 걱정되는게 있는 듯 말을 덧붙였다.


"난 혹시 해킹이나 도용 당한 건 아닌가 걱정돼서 물어본 거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 말아.”


"늘상 겪는 일인데요 뭐. 전 오히려 팀장님께서 너무 많은 걱정을 하셔서 걱정되네요."


통화를 마친 한점은 한동안 멍하니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은 소리 없이, 장면만 나오고 있었다. 현충원에서 열리고 있는 광복절 추모행사였다.

우려하던 일이 막상 현실이 됐는데도, 생각보다 덤덤했다. 후련하지도, 그렇다고 두렵지도 않았다. 허무하리만큼 싱겁게 끝나버린 느낌도 들었다. 어쩌면,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한점은 더이상 자신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너한테 뭐라고 하는 사람 있으면, 우리가 옆에서 같이 싸워줄게."


"한점 우린 네 편이야, 알지?"


"저런 사람들 말 신경도 쓰지마. 시간 아까워."


"이 자식 이거, 자기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본인만 몰라."


귓가에 한사람 한사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차에 오르기 전 작별의 시간, 사람들이 한점에게 건넨 진심어린 말들이었다. 그들의 말은 여전히 한점의 마음 한켠을 아늑하게 덥혀주고 있었다. 팀장과의 통화로 얼어붙었던 마음도, 슬며시 녹아내렸다.

돌이켜보면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 한점은 외롭다고 느낀 적이 별로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선가, 꼭 그들이 자신을 응원해주고 있다고 느껴졌다.

어느새 한점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힘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슬슬 준비할 시간이었다. 한점은 기지개를 크게 쭉 펴고, 커피도 홀짝홀짝 마셨다. 그러곤 TV를 끄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점이 도착한 곳은 바로, 노숙자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였다. 한점은 얼마 전부터 이곳에서, 가끔 일손을 거들고 있었다. 이곳은 신부님이 운영하는 곳인데, 매일 노숙자들에게 무료 점심을 제공하고 있었다. 오늘같이 특별한 날은 저녁까지 제공했고, 그런 날이면 훨씬 바빠졌다.

한점은 원래 남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특히, 노숙자들을 아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인 뒤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한점의 시야도, 시각도 변했다. 더 넓고, 더 다채롭게.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어려움과 사연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성소수자들을 혐오하는 사람들처럼, 자신도 이해 못한 누군가를 혐오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 또한 자신처럼, 세상의 냉대와 멸시 속에서, 외로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던 것이다.

신부님께선 그들이 여기서 배만 부른 게 아니라 마음까지 든든하게 채우길 바라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친절히 대하길 항상 강조하셨다. 한점이 하는 일은 그런 그들에게 단순히 밥이 아니라 살아갈 힘을 주는 것이었다. 바닥까지 내려간 사람에게 뜨거운 응원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한점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점은 이곳에서만큼은 누구보다 밝게 웃으며 힘찬 인사를 건넸다.

예상대로, 오늘은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몰렸고, 작은 소동까지 벌어졌다. 한바탕 정신없이 저녁 배식까지 마치고 뒷정리까지 끝내고나니, 몸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그래도 마음만은 어쩐지 든든했다. 자신 또한 이곳에서 마음의 밥을 배불리 먹고 가는 것 같았다.


급식소를 나서자, 밖은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하지만 휴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았다. 대부분은 가족이나 친구, 그리고 연인과 함께였다. 왁자지껄한 무리가 술 냄새를 풍기며 지나갔다. 다정하게 팔짱 낀 연인이 눈앞을 지나갈 땐, 한점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그 사이, 안 읽은 메시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전부 엄마가 보낸 것이었다.


"다 정리하고 집으로 들어와. 대체 왜 그러고 사니?

너가 뭐가 부족해서.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너가 아직 세상 무서운줄 몰라서 그래."


"아버지도 다 너 걱정돼서 그러시는 거니까,

와서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고 싹싹 빌면 받아주실 거야.

아버지 밑에 들어와서 일도 배우고.

이제 아버지 나이도 많으신데, 슬슬 사업 물려받을 준비해야지.

언제까지 그런 작은 게임회사나 다니며 시간 낭비할 순 없잖아?"


"병원 알아놨으니까 같이 가보자. 그런 쪽으로 유명한 곳이래.

건너건너 아는 사람 아들도 글쎄, 거기가서 치료받고 싹 다 나았대.

지금은 결혼해서 애 낳고 잘만 살고 있다더라. 우리 아들도 고칠 수 있어."


"이 사진 좀 봐봐, 예쁘지?

요즘 젊은 아가씨 답지 않게 싹싹하고, 얼마나 야무진지 몰라.

S대 나와서 S사 다닌다더라. 나이도 너보다 한 두살 적어서 딱 좋고.

어때? 너랑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니?"


핸드폰을 보는 한점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저 다시 가방에 넣고, 무심히 걷기 시작했다. 갑자기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눈이 떠졌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암흑 속에서 시계를 확인했다. 바늘은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한점은 급식소에서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고, 한밤중에 일어난 것이다. 또 목이 탔다. 이상하게 요즘 자꾸만 목이 마르고,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갈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주방으로 나와 냉장고 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갑자기 눈부신 불빛이 쏟아져 나왔다. 칸마다 같은 브랜드 생수병이 줄지어 서 있었고, 그 중 하나를 꺼내 단숨에 비웠다. 하지만 갈증은 여전했다. 다른 병으로 다시 손을 뻗던 중, 불쑥, 시원한 맥주 생각이 났다. 한점은 평소 맥주를 잘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한 모금이 너무나 간절했다.



딸랑-

한점의 뒤로 홀로 불을 밝힌 편의점의 유리문이 닫혔다. 거리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한점은 슬리퍼를 끌며, 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양손은 바지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었고, 손목에는 비닐봉투가 걸려 있었다. 걸을 때마다 봉투에선 바스락 소리가 났다.

아파트 현관 출입문에 다가가는데,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야구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고개를 숙인 그는, 난간에 기대앉아 발로 땅만 툭툭 차고 있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한점은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였다. 한점이 그토록 그리워한 사람.

그와 점점 가까워질수록, 미움은 옅어지고 그리움은 짙어져만 갔다. 멀어졌던 시간들도 차츰 좁혀졌다. 그의 바로 코앞에서 멈춰 섰을 땐, 마치 어제 헤어진 사이처럼 느껴졌다.

한점은 무심한 말투로 툭, 말을 건넸다.


"웬일이냐. 마주치려고 할땐, 코빼기도 안보이더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다가, 한점의 얼굴을 보자 환하게 웃었다.


"잘 지냈어?"


“당연하지. 엄청 잘 지냈다.”


한점은 못마땅한 듯 슬쩍 그를 흘겨보았지만, 본심이 새어나오는 건 막지 못했다.

이내 시선을 거두며 물었다.


“넌,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그가 아련한 눈빛으로 한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땐,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걸려 있었다.


“난... 너 생각만 나더라.”


그의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러자 속에서 무언가 울컥했고, 곧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나도, 당연히 못 지냈지, 임마.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잘 지내냐.”


한점이 씩씩대자, 그의 입가엔 슬며시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나... 보러왔냐?"


한점이 묻자,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집 현관까지 안 들어오고, 왜 밖에서 이러고 있냐? 너, 비밀번호도 알잖아.”


걱정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한점이 묻자, 그가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직도 그대로냐?"


그의 말에 한점도 대답 대신, 읖조리듯 물었다.


"...못 마주쳤으면 어쩌려고 그랬냐."


그의 말 없는 미소가 한점에겐 충분한 대답이 되어주었다.

한점은 새삼, 손목에 걸린 봉투가 무겁게 느껴졌다. 그를 집 안으로 들일까 말까, 고민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한점과 그가 동시에 말을 꺼냈다.


"너가 말해."


한점이 양보하자, 그가 말했다,


"걸을래, 우리?"



깊고 적막한 밤, 가로등만이 쓸쓸한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한점은 그와 나란히 걸었다. 천천히, 이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음을 옮기던 그가 슬쩍 한점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점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고는, 놀라워하며 물었다.


"너 좀 변했다. 인상도 부드러워지고. 그새 무슨 일 있었냐?"


한점은 그를 살짝 흘겨보며, 짧게 대답했다.


"너."


그 말에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함을 감추려는 듯, 괜히 더 과장되게.


어느새 둘은 농구장 한쪽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텅 빈 코트에는 농구 골대만 조명이 비추고 있었고, 골대 아래에는 농구공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한점은 봉투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자신도 하나를 집어 들어 입구를 따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맥주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 그동안 묵혀두었던 갈증이 신기하게도 시원하게 씻겨 내려갔다. 어딘가 굳어 있던 몸과 마음도 스르르 풀렸다. 안주로 산 과자와 오징어도 꺼내 봉지를 뜯어 펼쳐 놓았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맥주를 마시며, 저 멀리, 드문드문 불이 켜진 아파트 단지를 바라보았다. 흐르는 침묵 속, 정적을 메운 건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뿐이였다.


“나, 커밍아웃 했다.”


한점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누구한테?”


“전부 다. 회사, 부모님, 내 글을 본 사람들.”


“...혹시, 나 때문이냐?”


“캔을 입에 대려던 순간, 그가 물었다.”


“열린 입에선 맥주 대신 말이 흘러나왔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말이 채 식기도 전에, 입술에 캔이 닿았고, 한 모금 꿀꺽 넘어갔다.


“그 사람들이 뭐래?”


“뻔하지, 뭐. 상사는 불편해하고, 아빠는 노발대발하고, 사람들은 악플달고.”


한점은 잠시 회상에 잠겼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진심을 터놓던 시간, 향수 아저씨가 한점에게 건넨 말이 떠올랐다.


"상처 안 받겠다고 날 세워봤자, 받을 상처 안 받진 않더라. 오히려 더 상처받을 수도 있어."


이제야 그 말이 제대로 와닿았다. 아무리 애써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한점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회상에서 빠져나온 한점이 이어서 말했다. 근데, 생각보다 별로 안 아프더라. 그동안이 더 아팠어, 이제보니. 한점의 덤덤한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는,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입술을 꾹 깨물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놀리듯 과장된 투로 말했다.


“이야, 많이 컸네. 우리 도련님. 곱디고운 줄만 알았더니...”


차오르는 눈물과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감추려, 그는 캔을 입에 댄 채 고개를 돌렸다. 마시는 척만 하며,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울음을 꾹 삼켰다. 한점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골대 아래로 성큼 걸어갔다. 농구공을 집어 들고는, 툭, 툭—한 손으로 튀기며 물었다.


“우리, 오랜만에 농구 한판 할까?”


그는 얼른 눈가를 손등으로 훔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물었다.


"너, 그 슬리퍼 차림으로?"


"왜, 우리 학교다닐 때, 맨날 틈날 때마다 삼선 슬리퍼 신고 농구 했잖아. 기억 나냐? "


한점이 추억에 젖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내기는 뭘로 할까?”


그가 경기를 앞두고, 벌써부터 몸을 풀며 물었다.


“이기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한점의 말에 그가 실망했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내렸다.


“너무 뻔하지 않냐. 시시해.”


그러다 이내 장난끼가 발동했는지, 눈을 빛내며 이렇게 말했다.


“진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때?”


"뭐? 그게 말이 되냐."


엉뚱한 그의 제안에 한점이 어이없어 하면서도, 웃음만 터뜨렸다. 그런 한점을 보고 그도 웃음이 터졌다. 시시한 농담이 계속 이어졌고, 그들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시합이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장난기 어린 표정은 사라지고, 이내 진지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꼭, 학창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칠흑 같은 적막 가운데, 하얗게 켜진 조명 아래,

한쪽 농구 골대에는—


공 튀기는 소리,

매끈한 바닥을 가르는 발자국 소리,

서로 견제하며 터져나오는 외침들,

농구대가 덜컥이며 흔들리는 소리,

번갈아 터지는 환호와 탄식,

내내 떠나지 않는 웃음소리,


그리고—

바닥 위로 길게 드리워진,

오직, 두 사람의 그림자뿐이었다.



승부가 끝나자, 두 사람은 골대 아래 바닥에 드러누웠다. 머리를 맞댄 채, 서로 반대 방향으로.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고, 몸은 물론 머리칼까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반면 한점은 훨씬 여유로웠다. 호흡도 안정적이고, 이마에는 가벼운 땀방울만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둘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깜깜한 하늘엔 인공위성 몇 개만 떠 있었지만, 한점은 꼭 그와 함께 누워 은하수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헉... 헉... 자, 이제 소원 말해봐.”


그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나랑 여행가자."


한점이 분명하게 말했다. 예상 밖의 대답에 눈이 휘둥그레진 그는, 한점을 흘끗 보고는 물었다.


“... 어디로?”


“발길 닿는 대로.”


다시 한번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뜻밖의 말에 그는 살짝 놀랐지만,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내 장난기가 발동한 그는 슬그머니 옆으로 돌아누워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한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짐짓 능청스럽게, 다시 물었다.


“언제?”


그러자 한점도 고개를 돌려, 그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얼굴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고,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다. 입에서는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앞선 말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점은 힘주어 덧붙였다.


"당장."



내나라에 왔다고 해서 모든 고통이 사라진 건 아니었어요

이곳에서도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들은 남아 있었고,

앞으로 또, 어떤 우여곡절이 기다릴지도 알 수 없었죠.

어쩌면 다시, 과거나라나 죽음나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몰랐어요.


다만, 받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고통이 줄어들었어요.

무엇보다, 그들은 이제 삶 그 자체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답니다.


진짜나가 되어 내나라에 도달한 이들의 앞에는, 또 어떤 삶이 펼쳐지게 될까요?


그리고 여전히 헌나라에 머무는 어른이들 역시,

익숙한 불편함을 벗어 던지고 자신만의 내나라를 찾아 떠날 수 있을까요?


지구별에는 헌나라, 새나라, 과거나라, 죽음나라, 내나라 뿐만 아니라,

다른 수많은 나라들이 있었어요.

이 중엔 존재하지도 않는데 쫓게 되는 허상의 나라와

자신과 타인을 미워하도록 만드는 혐오의 나라도 있었죠.


이 지구별을 떠도는 수많은 여행자들은 다음엔 어느 나라에 도착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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