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가만히 서서 눈을 감은 채 맞고 있었다. 시원한 물줄기가 그의 머리카락를 적시고, 얼굴과 몸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혼하면 하늘이라도 무너지는줄 알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혼 뒤에도 삶은 존재한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다.
이혼하지 않으려 했던 것도 아내를 사링해서가 아니라, 이혼을 큰 실패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혼한 직후엔 딱히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그 전부터 따로 살아서 그런지 서류 정리가 끝난 것 외에 이혼 전이랑 딱히 달라진 것도 없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난 뒤에는, 전 아내와 내연남의 소식도 건너건너 들려왔다. 결혼해서 세기의 사랑을 하며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매일 같이 싸우며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전 아내는 이제 칼을 놓친 걸 후회하고 있었다.
한때 칼은 전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이혼은 절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아내에 대한 사랑보단 그저 이혼을 엄청난 실패라 생각했던 것 뿐이었다.
한때는 그들이 자신처럼 고통받기를 바랐었다. 통쾌한 복수도 꿈꿨다. 하지만 막상 저런 소식을 듣고나니, 이젠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들에 대한 복수심은 어느새 사라진지 오래였고, 미련도 남지 않았다. 그들은 더이상 칼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칼이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된 건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도 한때는 끓어오르는 분노 속에서 살았었다. 분노가 가진 힘은 대단했고, 스스로도 주체 못해 자기 자신을 집어삼킬 뻔 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그 에너지를 그들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사는데 집중하면서부터,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누구를 미워하며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기에, 인생은 너무나 짧고 소중하단 생각도 들었다. 결국 최고의 복수는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 했던가. 칼은 그 의미를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캄캄한 밤. 오늘부터 휴가가 시작된 칼은 서핑을 즐기러 곧 동해바다로 떠날 참이었다. 휴가철에다 내일은 공휴일이라, 차가 많이 막힐 것을 예상한 그는 밤늦게 숙소에 도착해 하룻밤 묵기로 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하루 종일 바다 위를 누빌 생각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칼은 허리에 타월을 두른 채,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그의 몸엔 군살 하나 없었고, 태닝된 구릿빛 피부엔 윤기가 돌았다. 그건 태양 아래, 바다 위에서 파도와 싸우며 다져온 몸이었다.
머리를 다 말린 뒤, 입고 나갈 옷을 고르기 위해 행거를 살피던 칼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정장 자켓 하나를 발견했다. 허리를 숙여 자켓을 집어 드는 순간, 안에서 흰 봉투 하나가 툭, 하고 떨어졌다. 봉투 겉면에는 크게 '사직서'라고 적혀 있었다. 칼은 조심스럽게 봉투를 집어 들었다. 꽤 두툼했다. 안에서 접힌 종이다발을 천천히 꺼내 펼쳐보니, 작은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건 한때 칼이 회사를 다니며 꾹꾹 눌러 담은 말들을 적은 것이었다.
잊고 있던 사직서를 오랜만에 보고 있자니, 칼은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죽으려고 떠났던 여행에서 살아 돌아온 후, 칼은 더이상 참고 살지 않기로 다짐했다. 할말은 하고 거절할건 거절하고 살기로. 그리고 이 사직서를 써서 정장 안주머니에 넣어두었고, 회사에 갈 때마다 항상 가슴에 품고 다녔다.
하지만 처음부터 생각만큼 잘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꾸 시도하다 보니 훈련이 되었는지 어느덧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회사 사람들은 바뀐 칼의 태도에 처음엔 어리둥절해 했지만, 이윽고 태도가 조심스러워졌다. 전에는 무리한 부탁도 거절하지 못하고, 혼자 모든 업무를 떠맡아 일하느라 야근도 하고 휴가도 미루고 탈진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결 여유롭고 편안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렇게 잊혀졌던 사직서를, 이렇게 오늘 우연히 마주한 것이다. 칼은 사직서가 든 봉투를 다시 자켓 안주머니에 넣고, 자켓을 옷걸이에 걸어 행거에 걸었다. 하지만 이내 망설이다가 자켓에서 봉투를 다시 꺼냈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그는 화장대 서랍을 열고, 봉투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칼은 이번엔 서핑 장비를 챙기느라 집안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창고 불을 켜자, 어수선하게 쌓인 짐들이 드러났다. 그 와중에 벽 한쪽에는 서핑보드가 커버에 씌워진 채, 거치대 위에 가지런히 세워져 있었다. 칼은 조심스럽게 보드의 커버를 벗겼다.
보드의 표면은 빛바랜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스크래치와 흠집이 군데군데 나 있었다. 왁스 자국도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오래된 친구를 보듯 다정한 눈으로 보드를 바라보며, 애정 어린 손길로 거친 표면을 쓰다듬었다.
칼은 그동안 서핑에 푹 빠져 지냈다. 그 시작은, 몇 해 전 고성으로 가던 길에 잠깐 들른 해수욕장에서 비롯되었다. 그때 그는 모든 의욕을 잃고, 오직 죽음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바다 위를 질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거센 자연과 맞서면서도 그걸 즐기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보기만 해도 잠시나마 가슴이 시원해지고, 활기가 전해졌다.
그 뒤, 죽으러 떠난 여행에서 살아 돌아온 칼은 서핑을 배우기 시작했고, 어느새 서핑은 그의 일부가 되었다. 이제 그는 누구보다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삶도.
추억에 젖어 흐뭇하게 미소 짓던 칼은 다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서서히 입꼬리가 내려가고, 어느새 미간은 찌푸려졌다. 아까부터 왁스를 찾고 있었는데, 어디 갔는지 도통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뒀는지도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짐을 뒤적이다가, 구석에 쳐박혀 있던 현수막과 피켓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들은 뽀얀 먼지에 덮여 있었다.
몇년 전, 광화문광장에서 시위하려고 제작했다 무산된 것들이었다. 그 뒤로 버리지도 못하고 잠깐 둔다는게, 그대로 잊혀져 여태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그것들을 마주하니,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고, 힘들었던 지난 시간이 떠올라 씁쓸하기도 했다. 그러다 이내 피식,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당시엔 힘들었지만, 이제는 모두 추억으로 남았다.
"칼,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애썼어."
향수 아저씨의 따뜻한 음성이 귓가에 들리는듯 했다. 기차역 대합실에서 작별을 앞두고,아저씨가 칼에게 건넨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칼은 참아왔던 울음이 터지며, 아저씨의 품에 파묻혀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그날 기차역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런 칼을 아저씨도 다른 사람들도, 말없이 등을 토닥이고 쓰다듬으며 다독여주었다. 그때 느꼈던 따뜻한 품과 따뜻한 손길은 지금까지도 느껴졌고, 평생 잊지 못할 거 같았다.
"이혼한다고 인생 끝난거 아니야. 삶은 계속되고, 또 새로운 삶이 펼쳐져."
아저씨가 마지막으로 건넨 말이었다. 이제보니 그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칼은 지금 그 말대로 살고있었다.
"찾았다."
생각에 잠긴 채 짐을 뒤지다가, 마침내 애타게 찾던 왁스를 발견한 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보드 위에 왁스를 정성스레 문지른 뒤, 다시 보드백에 조심스레 넣었다. 이제 떠날 준비를 모두 마쳤다.
밤은 지나가고, 새날이 밝았다. 살랑이는 커튼 사이로 막 깨어난 햇살이 고개를 내밀었다. 전날 밤 늦게 숙소에 도착한 칼은, 눈을 비비며 부스스하게 일어나 이불을 젖혔다. 그는 맨발로 발코니로 나갔다. 따스한 햇살이 얼굴을 감싸고, 바람은 살랑살랑 볼을 스쳤다. 파란 하늘, 넘실대는 파도. 서핑하기에 완벽한 날씨였다. 오늘 하루 종일 서핑할 생각에, 칼은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강릉의 해변은 여름휴가를 즐기러 모여든 피서객들로 북적이며 활기로 가득했다. 튜브를 끼고 물장구 치며 헤엄치는 아이들과, 파라솔 아래 누워 햇볕을 쬐며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 칼은 한창 서핑을 즐기고 있었다.
한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
깊이도 끝도 알 수 없는 광활한 바다가 넘실거렸다.
칼은 보드를 들고 첨벙첨벙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발끝부터 차가운 물이 차올랐고,
어느새 다리, 배, 가슴, 그리고 목까지 물에 잠겼다.
찬물에 아찔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짠 바닷물이 물결을 타고 입안으로 밀려들었다.
그는 보드 위로 엎드려 힘차게 물살을 저었다.
찰랑이는 물결이 보드 위를 적시고,
입안으로 밀려들며 짠맛이 난다.
파도가 가까워질수록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때다.
순간의 점프로 두 발이 보드 위에 올라섰다.
벌린 양팔과 두 다리로 중심을 잡고,
파도 위를 죽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물방울이 사방에서 얼굴 위로 튀었고,
시린 바람이 젖은 몸을 쉴 새 없이 때렸다.
속이 뻥 뚫렸다. 짜릿했다.
어느새 날은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샤워가운을 걸친 칼은 샴페인을 땄다. 펑- 소리와 함께 병 입구 위로 거품이 흘러나왔다. 잔에 따르자, 치이익- 탄산이 터지며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왔다. 바깥에선 펑펑-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발코니 난간에 기댄 그는, 샴페인을 마시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색 캔버스 위로 총천연색 물감이 칠해지고 있었다. 해변 한쪽에 설치된 야외무대에선 국악 선율이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다. 광복절 기념행사가 한창 열리는 중이었다. 폭죽이 터질 때마다 칼의 얼굴 위로 불빛이 번쩍였다. 칼은 지금 이 순간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그의 얼굴 위로 흐뭇한 미소가 잔잔히 흘렀다.
지이잉-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이 작게 진동하며, 메시지 창이 떴다.
축하드립니다. 하와이 지사 발령이 확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