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내나라의 진짜나는2

by 이정표

“요즘 카페가 얼마나 쉽게 생겼다 망하는 줄 알아? 그리고 뭐, 장사는 아무나 해?

주부면 주부답게 집에 가만히 앉아서 살림이나 해. 괜히 헛바람 들어서 돌아다니지 말고.”


남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챠키가 되받아쳤다.


“언제는 집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뭐라도 하라더니, 이제는 주부답게 살라네?
주부는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욕 안 먹고 인정 받는 건데?
주부는 사람도 아니야? 나가서 바람 좀 쐬면 안 돼?
직장인이 쐬는 건 콧바람이고, 주부가 쐬는 건 헛바람이야?”


남편은 예상과 달리 아내가 세게 나오자, 잔뜩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이내 작전을 바꿨는지, 살살 달래는 투로 말했다.


“나도 나가서 돈 벌어오는 거 힘들어. 내가 얼마나 힘들게 돈 버는 줄 알아?”


그러나 챠키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지 않고, 속에 묵혀둔 말들을 쏟아냈다.


“나도 집에서 꼬장꼬장한 남편, 상전 같은 자식 눈치 보느라 힘들어.
당신은 퇴근이라도 있지. 나는 퇴근도 없어.
당신은 처가에 신경 하나도 안 써도 되니까 편하지?
처가 가면 귀한 백년손님이라고 손 하나 까딱 안 하잖아.
난 꼬박꼬박 시댁 안부 전화 챙겨야 되고, 시댁 가면 귀한 아들 뺏어간 도둑 취급받아.
아니면 공짜로 부리는 머슴이던가.”


할 말이 없어진 남편은 얼굴만 붉힌 채, 거실로 나가버렸다.

그렇게 그날의 싸움은 챠키의 승리로 끝났다.


챠키는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며 어제 벌인 남편과의 말다툼을 떠올렸다.

창문 너머로 포근한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비치고 있었다.

속에 담아뒀던 말을 다 뱉어내고 나니, 웬걸, 속이 다 후련했다. 생각보다 말이 세게 튀어나와서 스스로도 놀랐지만,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동안 돈 못 버는 전업주부라고, 할말도 제대로 못하고 산 세월만 수십년이었다. 챠키는 더는 참지 않기로 다짐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남편은 여전했고, 아내의 변한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챠키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이제는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볼 작정이었다.

문득 시계를 보니, 출근 준비 할 시간이었다. 챠키는 얼마 전부터 작은 카페를 차려 혼자 일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대 앞에 앉았다. 화장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사진이 담긴 액자도 있었다.

화장을 마치고 옷장을 열자, 좌르륵 걸린 옷들이 보였다. 모두 챠키의 것들이었다. 그 중,노란 원피스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위해 처음 백화점에 가서 샀던 옷이었다. 작아서 입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누구에게 주지도 않았다. 그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챠키는 그 옷을 오랜만에 꺼내어 한번 입어보았다. 거울 앞에 서니 웬걸 딱 맞았다. 그동안 바쁘게 지내다보니, 살이 좀 빠졌던 것이다. 그렇게 거울 속 자신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이대로 출근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신발장 문을 열자,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자신의 신발들이 보였고, 한동안 그것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어느새 한자리를 차지하는 자신의 물건들이, 꼭 그만큼 넓어진 자신의 공간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챠키는 변해 있었다. 전에는 로션조차 아깝다며 잘 바르지 않던 챠키였다. 자기 물건 살 돈 있으면, 가족들 거 하나라도 더 좋은 걸로 사주자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머뭇거리지 않고 샀다. 내 돈으로 벌어서 내가 산 물건들이라 더 뿌듯했다.



차에 올라탄 챠키는 시동을 걸었다.


"이젠 본인 차에 꽂히는 차키가 되세요."


한점의 목소리가 마치 녹음기라도 재생되듯,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울려퍼졌다. 여행 마지막 날 작별 인사를 나눌 때, 한점이 자신에게 해줬던 말이었다. 처음 들은 이후로, 저 말은 이제 챠키의 모토가 되어 있었다. 저 말을 떠올릴 때면, 처음 들었을 때처럼 묘한 흥분과 함께 짜릿함이 느껴졌다.

죽으러 떠난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로, 챠키는 그동안 자신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돌아보았다. 엄청난 경험을 했고, 그렇게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새 삶을 살기로 다짐했었다.

챠키는 페달을 밟고, 핸들을 돌리며 제법 능숙하게 차를 몰았다. 중고로 구입한 소형차였고, 덕분에 편하게 출퇴근할 수 있었다. 막상 해보니 별거 없는데, 그동안 왜 그렇게 운전 하는 걸 겁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챠키는 결국 장농 면허에서 탈출했다.

모두 향수 아저씨 덕분이었다. 아저씨한테 혼나면서 운전을 배우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땐 억울했는데, 지금은 그 시간들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보고 싶었고, 특히 아저씨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그렇게 카페를 향해 차를 몰면서, 챠키는 죽으려다 살아 돌아온 날들을 회상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모든 건 그대로였지만 챠키 자신만 바뀌어 있었다. 엄청난 경험을 했고 이제는 다르게 살리라 다짐했다.

우선 평소 눈여겨 봐두었던 바리스타 학원부터 등록했다. 항상 지나치기만 하다가 그날은 마음을 굳게 먹고 들어갔다. 그렇게 누구보다 열심히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난 뒤에는 수많은 카페에 지원을 했다. 하지만 대부분 떨어졌고, 간혹 면접 보러 오라는 곳이 있었지만 연락은 없었다. 그렇게 지원하고 떨어지길 반복하던 어느날이었다.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집에서 좀 떨어진 경기도 외곽에 자리한 카페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드디어 합격통보를 받은 것이다. 혼자서 뛸 듯이 기뻐하다 사람들 단톡방에 이 소식을 전했고, 민망할 정도로 쏟아지는 축하인사를 받았다. 가족들에겐 지나가듯 이야기하고선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만 해도 가족들은 챠키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남편도 딸도 자기 아내와 엄마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전과 똑같이 챠키를 대했다.


“엄마 이것 좀 해줘. 엄마 저것 좀 해줘.”


“여보 내 챠키 어딨어. 챠키 어디다 둔 거야 대체.”


하지만 점점 외출이 잦아지고, 급기야 카페에서 일까지 시작하자, 서서히 변화를 눈치채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챠키는 혼자만의 1박 2일 여행을 가기로 했다. 가족들에겐 하루 전에나 통보했다. 물론 가족들로부터 잘 갔다 오라는 따뜻한 인사는 받지 못했다. 남편은 자포자기 상태로 아무 말이 없었고, 딸은 모든 걸 스스로 해야하는게 싫어 칭얼댈 뿐이었다.

챠키는 며칠 전부터 가족들 먹을 반찬이며 빨래며 청소며 모든 집안일을 마쳐놓은 상태였다. 휴일이라 차가 막힐 것을 우려해 서둘러 나오다, 집을 나서기 전 아직 잠에서 덜 깬 딸에게 당부를 했다.


“엄마 갔다올게. 밥솥에 밥 해놨고, 냉장고에 반찬 만들어서 넣어놨으니까, 꺼내서 잘 챙겨먹어.”


“엄마, 진짜 갈거야?”


“어, 왜?”


“아니, 나 곧 있음 시험인데, 엄마가 집을 비운다는게 말이 돼? 아빠도 집에 오면 엄마부터 찾아.”


“내가 언제까지 챙겨줄 순 없잖아? 너도 아빠도 혼자서 할 줄 알아야지.”


“아, 그래도. 엄마가 챙겨줘야 되는 거 아냐? 엄마는 엄마잖아.”


딸이 흘리듯 내뱉은 마지막 말에, 챠키는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무언가를 느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희생 한다고, 너랑 아빠가 더 잘 되는 것도 아니잖니?
내 인생 산다고, 너희가 더 못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벙찐 얼굴로 멍하니 서 있는 딸을 뒤로 한 채, 챠키는 당당한 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이제는 딸도 엄마가 자신이 알던 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을 것이다.

당장은 너무 냉정해보일 수 있겠지만, 챠키는 딸이 의존적이던 예전의 자신과는 다르게 살아가길 바랬다. 그래서 더욱 당당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차에 올라탄 챠키는, 자신의 차에 차키를 꽂고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선 생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은 광복절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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