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왔시유, 새참이여.”
“자자, 다들 새참 허고 하시다잉~”
“어이 향씨, 얼릉 와봐유. 수육은 뜨끈할 때 묵어야 맛나지~”
향수 아저씨가 굽혔던 허리를 천천히 펴며 뒤로 젖히더니, 허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몸을 풀었다. 그리고 장화신은 발로 처벅처벅 소리를 내며 논두렁 밖으로 나왔다.
돗자리 위에 차려진 상 주위로, 마을 주민 여럿이 둘러앉았다. 향수도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앞에 놓인 수육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각종 쌈 채소와 양념장도 놓여있었다. 향수는 언제나처럼 호박잎에 깻잎을 올리고 수육을 얹은 다음 마늘에 된장까지 발라 입안 가득 넣었다. 수육이 살살 녹으며 목구멍을 타고 부드럽게 넘어갔다.
“아니 향씨는 새벽부터 시장 댕기고, 농사일까지 허는 거 안 힘드러유?”
마을 주민이 걱정스런 말투로 말했다.
"일할 땐 일에 집중하고, 쉴 땐 또 느긋하게 쉬어요. 일하면 일하는 대로 쉬면 쉬는 대로 그저 행복하네요."
향수는 먼지와 땀 투성이 작업복 차림으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근디 향씨 얼굴은 어째 갈수록 점점 더 좋아지누? 얼굴에 광이 번쩍번쩍혀. 피부관리라도 받는 거 아녀유?”
아주머니의 농담 섞인 말에 다들 깔깔거리며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배는 부르고 속이 든든했다.
"넓은 벌동쪽 끝으로~"
막걸리까지 한잔 걸친 향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뒷짐을 지고, 동네를 어슬렁 돌아다녔다. 동네 구멍가게 앞을 지날 땐, 가게 앞 평상에 앉아 바둑 두며 부채질 하는 어르신들과 인사를 나눴다. 자기네들끼리 노느라 신난 똥강아지 세 마리와도 마주쳤다. 녀석들은 아저씨를 보자 신이 나서 꼬리를 흔들며 다리에 앞발을 얹으며 졸졸 따라다녔다. 잠시 멈춰 선 그는, 뭉게와 구름이와 몽실이를 차례로 쓰다듬어 주었다. 몽실이는 언제부턴가 목줄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저 셋은 낮에는 항상 붙어다니다가, 해지면 각자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떠돌이 개인줄 알았던 뭉게와 구름이도 알고 보니 주인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집으로 가려다 동네 뒷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정상만 보고 정신없이 올랐을텐데, 이제는 주변 풍경을 살피며 슬슬 올랐다. 이렇게 오르니, 힘도 덜 들었다.
산꼭대기에서 맞는 바람이 시원하고 달콤하기만 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바다의 긴 수평선 끝자락도 보였다.
익숙한 장소들을 눈으로 훝으며 찾아보았다.
새참을 먹었던 논두렁
어르신들 바둑두시던 구멍가게 앞 평상
민박집이 껴 있는 오래된 기와집들
챠키한테 운전 알려주던, 폐교의 운동장 공터.
눈으로 하나하나 살피는데,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싱어, 챠키, 칼, 한점.
사는데 집중하느라 연락이 뜸해진지 오래였지만, 생각은 자주 했다. 다들 어떻게 살고있을지 궁금하고, 보고싶었다.
"중요한 건 아저씨에요. 사업에 성공하고 실패하고가 아니라 아저씨의 삶, 그 자체가 소중하다고요."
한점의 말이 떠올랐다. 기차역에서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나눌 때, 한점이 그에게 건넨 말이었다. 저 말을 떠올릴 때면, 당시의 분위기까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짜식, 말을 참 예쁘게 한단 말이야."
혼잣말을 내뱉은 한점의 입가에는, 절로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 여행 이후로 향수는 서울에서의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여기 고성으로 내려왔다. 민박집 할머니께서 기꺼이 방한칸을 내주신 덕분에, 전처럼 민박집에서 묵고 있었다.
읍내 항구 시장에서 새벽부터 일하고, 마을 일손을 거들며 지냈다. 쉴 때면 오늘처럼 동네 한 바퀴를 돌거나 자주 뒷산을 올랐다. 가끔 바닷가 해변을 거닐기도 했다. 향수에게는 서울보다 이곳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죽으려고 우연히 들렀던 이곳은, 이제 그에게 제 2의 고향이 된 것이다.
이곳에 온지도 벌써 여러 달이 지나 계절이 변했다. 어느덧 한낮의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고, 녹음이 우거진 나무와 수풀에서 요란한 풀벌레 소리가 울려퍼졌다. 향수는 집에 오자마자 수돗가에서 시원하게 등목을 했다. 옷도 새로 갈아입고, 자그마한 책상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책상 위에는 빈 편지지가 놓여있고, 그의 손에는 펜이 꽉 쥐어져 있었다.
“편지로 마음을 전해보는건 어떨까요? 말은 그냥 흘려듣거나 왜곡되기 쉽지만, 글은 진심이 묵직하게 전달되거든요.”
돈만 벌고 성공만 쫓느라 서먹해진 가족들과의 사이를 풀어보고 싶었다. 그런 향수게 칼이 해준 말이었다. 칼의 말대로 향수는 가족들한테 계속 편지를 보냈지만, 지금까지 아무 답장도 받지 못했다. 전화도 문자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이젠 더이상 쓸 말도 없어서, 몆시간째 사투만 벌이고 있었다. 결국 한 줄도 적지 못한 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심부름도 하고 저녁식사도 먹을겸, 다시 읍내로 나갈 채비를 했다. 주인 할머니는 볼일이 있어 저녁 늦게나 들어올 거라고 하시곤 나가셨다. 트럭을 몰고 읍내로 향하는 길에,
해안도로를 따라 줄지어 걸려있는 태극기가 보였다. 바람에 나부끼는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켠이 뭉클해졌다.
시장 일을 마치고 국밥집에 들렀다. 어머니의 된장국을 맛본 이후로 이곳은 그의 단골집이 되었다. 알고 보니 식당 할머니는 향수와 같은 경상도 출신이셨고, 남편 따라 이곳까지 와서 정착해 살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몇해 전 돌아가셨고, 할머니 홀로 남아 식당을 운영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리 아끼가 뭐한다꼬 궁상을 떨어쌌노. 참말로 답답하데이."
향수는 할머니를 보자마자, 잔소리를 퍼부었다. 이상하게 향수는 할머니만 사투리가 튀어나오고 잔소리가 터져 나왔다.
"밥 먹으러 왔으면 밥이나 퍼뜩 먹고 가지. 뭔 말을 그리 해쌌노."
말은 그렇게 해도, 할머니도 싫지만은 않은 내색이었다.
향수의 잔소리는 계속 됐다.
"이거 받으이소. 거 로션 좀 챙겨 바르소, 참말로."
"이제사 다 늙은 피부에 발라 뭐한다꼬, 자꾸 이런걸 사오노. 내 일해야되고 끈적이는건 딱 질색이다."
유난히 거칠고 투박한 할머니의 손이 향수는 마음에 쓰였다. 꼭 모진 세월을 살아온 할머니의 인생을 보는 것만 같았다.
"동네 어르신들 다같이 제주도 놀러가는데 같이 갈끼죠?"
"내 일해야 한다. 식당 문 닫고 가긴 어딜가노."
"식당 문 하루 닫는다꼬, 뭐 세상이라도 멈추는줄 아나. 평생 일만 하다 갈끼가."
그렇게 서로 툴툴 대는 사이, 향수가 시킨 된장국이 나왔다. 이때만큼은 향수도 잔소리를 멈추고 조용해졌다.
숟가락을 떠서 국물을 한입 맛보는데,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역시 그 맛이었다. 처음 맛보았던 그 맛. 향수는 손과 입을 바삐 움직이며, 머리론 이곳에 처음 왔던 때를 떠올렸다.
죽겠다고 한바탕 난리를 치고 경찰 조사까지 받고선, 넋이 나간 채로 새벽시장을 통과하던 중이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고, 눈앞에는 불을 밝힌 허름한 국밥집이 보였다. 그 순간, 향수의 귓가에 어머니의 음성이 작지만 또렷하게 스쳐갔다.
"아들아, 된장국 먹고 가래이!"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더니, 홀리듯 다리가 움직이는 대로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허름했고, 주방의 자욱한 연기 속에서 앞치마를 두른 노파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공간, 그 모습이 왜인지 편안하게만 느껴져서,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손님이 온 줄도 모랐던 노파는 뒤늦게 향수를 발견하고 놀라더니, 엉망이 된 그의 행색을 보고 깜짝 놀라며 걱정했다.
"오다가 갱도라도 맞았는교?"
넋이 나간 향수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하따 지대로 맞았는갑네. 돈은 담에 받을테니 한숟갈 잡숫고 가쇼."
일행이 있단 말에도 노파는 흔쾌히 먹고 가라고 했다.
"사람부터 살고 봐야제. 돈은 나중에 내도 된다."
향수는 감사하다며 할머니께 꾸벅 인사하고, 테이블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시 주방으로 돌아온 노파는, 요리를 하며 어젯밤 꾸었다는 이상한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꿈 속에 어떤 인자한 할머니가 나타나서 자기 아들을 잘 부탁한다며, 꾸벅 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잠에서 깬 노파는 꿈이 하도 생생해서 귀한 손님이 오려나보다 생각하고, 평소보다 일찍 식당 문을 열었던 것이다.
향수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저 꿈 얘기를 떠올릴 때면,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반응이 나왔다. 꼭, 그 때 그 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을 땐, 날이 어둑해진 무렵이었다. 할머니는 향수보다 먼저 집에 돌아와 계셨고, 향수 앞으로 온 우편물 하나를 내미셨다. 이 집 주소를 알려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향수는 의아해하며 건네받았다. 편지 봉투를 가만 보니, 보낸 사람 주소가 가족이 사는 집이었다.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편지를 가지고 얼른 방으로 들어왔다. 젊은 시절, 합격 통지서나 연애 편지 답장을 받았던 이후로, 이런 떨림은 오랜만이었다. 떨리는 손길로 편지 봉투를 열고 편지지를 꺼내 펼쳐보았다.
“아빠, 거기서 잘 지내고 있어? 밥은 잘 먹고? 그동안 답장 못해서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