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2018년 12월 20일 일본 긴자의 고급 클럽 -
실내는 5개 테이블이 놓여있다. 공간은 테이블 20개를 놓아도 충분한 크기인데 5개 테이블만 중간중간 놓여있으니 럭셔리한 실내 인테리어와 함께 내부가 더욱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안쪽 구성에 두 남자와 몇 명의 여성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흠.. 그래도 여전히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걸 저희에게 알려주면 월드그룹에게는 손해가 될 것 같은데 왜 이런 정보를 알려주는 겁니까?"
일본 Top 3 기업 중 하나인 야마모토 그룹 통신사업본부의 부본부장인 스기타는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 갔다. 질문을 끝내고 나서 이쯤 한잔 하는 것이 상대를 제압하는 데 유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기타는 테이블에 손을 뻗어 반쯤 남은 가루이자와 1960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스기타는 위스키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비즈니스를 할 때 어떻게 위스키를 마시고 어떤 표정을 지으며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익숙한 듯이 그리고 잘 안다는 듯이 행동해야 한다.
"스기타 부본부장님, 잘 아시겠지만 월드그룹은 20년 전에 일본 시장에서 쓴 맛을 보고 사업을 전면 철수했었죠. 저희 회장님이 일본을 여전히 자주 가시고 지인들도 많이 있으시지만 일본을 사업적으로 접근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회사 내에서 일부이긴 하지만 다시 일본을 진출해야 한다는 무모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를 비롯해서 회사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불필요한 투자와 손해가 반복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로 윈윈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필요한 협력을 하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해주시죠"
"하지만 그건 통신사업에서 그런 거죠. 이미 월드 그룹은 주력인 자동차는 물론 E-commerce 사업도 전개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E-commerce야 일본 회사를 총판으로 삼아 간접적으로 비즈니스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자동차 이후에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건 분명하지요. 실제로는 월드그룹 회장님께서 통신 사업은 일본에서 왜 하지 않냐고 심기가 불편하신 건 아닌가요?"
"하하 스기타 상 너무 멀리 가시네요. 저도 회장님 생각을 모르지만 스기타 상보다는 옆에서 뵙고 있으니 말씀드리는데 회장님께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자꾸 주변 얘기로 가지 말고 제가 말씀드린 내용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야마모토 그룹은 제가 10년 전 있었을 때 일본에서 점유율이 40%가 넘는 독보적인 1위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실적이 악화되어 2~3등을 왔다 갔다 하고 있고 더구나 4년 전에 독일 회사에게 매각된 후에는 일본 내에서 일본 브랜드로도 인식되고 있지 않습니다. 소위 말하는 'made in Japan', 'Japan Pride"에도 더 이상 해당이 되지 않는 거죠. 차세대 통신 서비스 전개를 위해서 네트워크 장비를 교체하시고 투자하셔야 하는데 그만한 자금 여력을 가지시기 힘드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7년 전에 야마모토 그룹에서 출시하신 더블에이 기술 포맷은 현재 저희 월드만 참여하고 있고 실제 일본에서는 라이트닝, 마루오카, HS 그룹이 밀고 있는 AERD 포맷에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 5월에 HS 그룹에서 AERD 장비를 일부 구매하셔서 구색 맞추기로 AERD 서비스를 출시하신 것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AERD 서비스가 확장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스기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사실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입에서 특히 같은 업계 경쟁사로부터 듣는 것은 불쾌했다. 스기타는 앞에 있는 월드 그룹 사람의 얼굴을 잠시 노려보았다. 그는 일본어를 제법 하지만 일본 비즈니스 매너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만약 일본에서 비즈니스를 제대로 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상대 회사의 치부를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어를 할 때 확실히 몇 개 음절은 일본 네이티브처럼 발음을 하는 것을 보아 일본에 수년간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비즈니스 관행을 잘 모르는 것을 보면 성인이 되기 전 학생 때 일본에 살았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 사람들은 스스로가 확실히 납득하고 만족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요. 세계 경제에서 일본 모노쯔쿠리(장인정신) 신화는 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완벽하게 스스로가 납득하고 만족을 해야 다른 사람들도 납득을 하고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저희에게 월드 그룹의 앙숙인 HS 그룹 AERD의 자금상황 같은 비밀정보까지 알려주시면서 AERD 장비를 저렴하게 살 수 있는 타이밍이니 HS와 손을 잡을 잡고 AERD 사업 확대를 하라는 얘기를 월드 그룹에서 제안해주었다는 걸 야마모토 그룹의 어느 누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스기타 상 다시 말씀드리지만 월드는 일본에 통신사업을 해서는 안됩니다. 야마모토 그룹이 HS그룹과 손을 잡고 AERD 사업 확대를 하시면 월드 그룹의 일본 사업 추진 세력도 힘을 잃고 일본 사업 추진은 백지화될 겁니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게 윈인 하시지요"
"아무리 그래도 같은 회사 내에서 이런 식으로 견제를 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네요. 월드 그룹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하하하"
스기타는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내가 월드 그룹의 회장이어서 이렇게 밑에서 파벌싸움을 하는 상황을 알게 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 2020년 12월 27일, 한국 서울 월드그룹 본사 -
경민은 프린터가 뱉어 내고 있는 최종 보고서 마지막 장이 나오기를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이걸로 이제 일본에 가는 건가. 11번째 TF인데 드디어 하긴 하는 구만'
경민은 사실 지난달 일본 사업 관련 미팅을 하면서 통신사업 총괄 강 사장이 일본 사업 진출에 대해 얼마큼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사내 반 이상의 임원들이 일본 사업 재진출에 대해 반대를 하고 있었지만 사업성 검토가 진행될수록 강 사장이 말한 진행방식과 일본 시장 상황에 대한 인사이트가 상당 부분 설득력 있게 맞아 들어갔다. 오늘 보고에서 검토 내용이 최종 공유되면 그동안 수도 없이 검토만 하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보류나 취소된 월드그룹 통신사업 일본 진출이 확정되는 것이다.
"띵띵"
갑자기 경민의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뉴스 속보 알람이었다. 원래 중요한 미팅 전에는 핸드폰을 확인하지 않지만 이상한 기분이 들어 핸드폰을 열었다
' 야마모토 그룹 - HS 그룹과 AERD 사업 공조 MOU 체결 '
경민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바로 지난주까지 더블에이 포맷으로 월드그룹과 공동개발 및 출시를 협의하고 있었던 야마모토 그룹이 경쟁사인 HS 그룹과 AERD 관련 MOU 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경민은 주소록을 열고 야마모토 그룹 커뮤니케이션 창구인 노무라 실장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노무라 이 녀석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회의 20분 전에 이런 뉴스가 나오는데 나한테 아무 얘기도 안 했다고?'
"모시모시(여보세요), 도모 박상 오세와니 낫떼 오리마스(박상 신세 많이 지고 있네요). 아사 하야이 지깐 도우 사레마시다? (아침 일찍부터 무슨 일이에요?)"
"도모 노무라 시쯔죠(안녕하세요 노무라 실장님). 조금 전 요미우리 신문 속보를 봤습니다. 야마모토 그룹과 HS 그룹 MOU 관련"
"잉? 박상 그게 무슨 얘기예요 잠시만요. 속보라니. MOU라고 이런 말도 안 되는"
노무라 실장은 MOU 관련해서 아는 바가 없다. 일본인이긴 하지만 연기파 배우는 아니니까. 경민은 일본에서 주재원 생활을 해서 일본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월드 그룹과 MOU 발표를 목전에 둔 야마모토 그룹이 바로 직전에 경쟁사인 HS 그룹과 MOU를 체결하고 그걸 야마모토 그룹 사업개발실 총괄실장이 모르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 2- 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