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창궐하던 여름,
다니던 회사가 너무 힘들어서
이직을 했는데 이직한 회사도 힘들어서
금방 때려치고 다니던 회사로 돌아왔었다
이직하느라 개고생하고
다시오느라 쪽팔리고
중간에 퇴사하는 바람에
연말에 주는 큰 보너스도 못받고
결과적으로는 혼자 온갖 발악을 했지만
아무것도 안한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리로 돌아온 게 되어버렸다
제자리도 아니다 손해를 봤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라면 이럴 때
본인의 결정을 되돌아보거나
"그런 일도 있는거지"하고 넘길텐데
나의 허접함과 나의 과오가 내눈에는
너무나 크고 선명하게 자주 보여서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상이 아무래도 나를 억까하는 것만 같고
꼬일 대로 꼬여서 삼라만상을 탓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잘못 지은' 내 이름이었다
일단 내 이름은 회문(回文)이다.
정유정 이효리 토마토 기러기처럼
앞으로 읽어도 뒤로 읽어도 똑같은.
학창시절에 이름으로 놀림 안받아본 사람 어딨겠냐만
유독 내 이름으로 긴 노래(?)를 만들어
부르던 놀림이 기억에 남는다
오토바이 후진하는 빠라바라바라밤~ 멜로디에다가
내 이름을 네버엔딩으로 이어붙이는 식이다
진0진0진0진0진0진~
아무리 노력하고 아등거려봤자 결국 제자리인 삶
그게 이름의 구조적 문제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효리도 슈퍼스타고 정유정도 잘 나가는 작가잖아.
어쩌면 이 지지부진한 터널만 지나면
회문은 유니크한 간지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시 현혹되어 개명을 일단 미뤄두었다
다시 돌아온 회사는 처음 몇 달은 다닐만하더니
역시나 깨진 도자기는 다시 붙이는 게 아니라고
점점 예전의 끔찍스러운 모습을 되찾았고
나는 다시 탈출을 꿈꾸며 피곤한 도전을 이어갔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에도 지원했고,
단편 영화 제작 지원금을 타내려 시나리오도 쓰고,
일본에 있는 광고회사로 또 한 번의 이직시도도 했지만
전부 망했다. 역시 이름이 문제다.
이름의 소리글자를 바꾸는 대신 이번엔
한자의 의미를 바꾸는 정도로 소극적인 변화를 꾀했다
내 이름에는 이상한 한자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완수하다', ‘최고에 달하다' 같이 좋은 뜻도 있지만,
'다 없어지다', '죽다', ‘사망하다' 등의 뜻을 가졌다
기력을 소진하거나 재산을 탕진할 때
전부 이 한자를 쓴다
자꾸 지치고, 돈을 벌어도 돈이 없는 게
다 이름 때문 같다.
돈내고 작명소에서 지어왔다고 들은 거 같은데
별 진, 나아갈 진, 보배 진 같은 좋고 쉬운 한자 놔두고
어떻게 이런 뜻을 가진 한자를
갓 태어난 아기에게 지어줄 수 있는 건지...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를 돌팔이 작명소도
이걸 확인하지 않은 부모님도 전부 원망스럽다.
네이버에 '다할 진 이름풀이'같은 검색어로
대충 검색해봐도 이 한자에는 나쁜 기운이 있어
사람 이름에는 잘 쓰지 않는다는 얘기가 수두룩하다
너로 정했다. 이 망조가 든 한자를 대체할 새로운 '진'
내 평생의 이상형 지진희의 이름에
들어가는 한자이기도 하고
정말 좋은 뜻으로만 꽉 채워져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고민 끝에 개명업체 사이트 인터넷 문의 게시판에
내용을 정리해서 올렸더니 금방 답변이 왔다.
미리 돈을 낼 필요도 없고
'법원에서 개명 신청이 성공적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그때가서 돈을 내면 된단다
심지어 후불제 시스템이라니 망설일 이유가 없다.
그나저나 법원에서 개명을 기각하는 경우도 있나싶어
인터넷에 개명후기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나무위키에서 또 이런 썰을 보게 된다
박사씩이나 되었으면 그런 집념에서 벗어나
운명을 개척할 생각을 해라
박사는 아니지만 실패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실패가 거듭되었다는 이유로 개명까지 고려한
나의 정신상태가 갑자기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쯤되면 보배고 나발이고 그냥
'현혹될 진'으로 개명하는 게 어떨지
그래서 또 이 개명 프로젝트를 무기한 중단한 채
꾸역꾸역 작년을 살았다
결과적으로는 가고싶었던 학교에서
(풀브라이트만큼은 아니지만) 장학금을 꽤 받았고
덕분에 벗어나고싶던 회사는
이제 40일만 더 다니면 되고
합격한 학교가 필름스쿨이다보니
그노무 단편영화...원없이 만들 예정이다
돌이켜보니 개명을 기각시킨 저 판사말이 맞았네
살다가 힘들어서 아효 "진이 빠진다" 했을 때
“너는 '진'이 두 개라서 진 빠져도 힘이 남아있잖아"
라고 해줬던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며
개명을 하려다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