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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레논 Sep 19. 2023

샤넬백은 못 사도 과일계의 샤넬은 살 수 있는

인생여전 말고 인생역전

로또를 진지하게 사기 시작한 건 직장인이 되고나서부터였다. 광고 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한지 8년, 매주 들어오는 월급은 뻔했고 회사 생활은 자주 괴로웠다.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는 돈을 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풍요롭게 살기에 충분한 돈은 아니었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누군가 “그 회사 대리급은 얼마 정도 벌어요?”하고 캐주얼하게 물어보길래, 나도 장난스럽게 대답한 적이 있었다. “샤넬백은 못 사도 과일계의 샤넬은 살 수 있는 정도?” 라고. 즉흥적으로 대답한 것 치고는 꽤나 정확히 나의 경제사정을 말해주는 것 같다. 좋은 날엔 오마카세를 예약하거나 과일 코너에서 탐스러운 샤인 머스캣 한 송이 정도는 망설임 없이 고를 수 있으니까. 돈 버느라 고생한 나에게 스몰한 럭셔리를 선물하며,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안의 야속한 욕심이 자꾸만 고개를 쳐들었다.


하루종일 사회성과 에너지를 한껏 끌어모아 업무 시간을 견디고 나면 남는 시간엔 남들의 SNS나 유투브를 보며 도파민을 충전했다. 보송한 얼굴로 화려한 옷을 입고 철마다 해외여행을 다니며 큰 돈을 버는 그들을 보면서 의문이 들었다. 난 이렇게나 힘든데, 매일 얼마나 고생하는데! 왜 난 언제나 ‘소소한’ 행복만을 누려야하지? 대차게 큰 행복을 바라면 안되는건가?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저축은 어느새 뒷전으로 밀렸고 핸드폰 화면 속 인플루언서들의 아이템을 따라사기 바빠졌다.


백화점 점원에게 7개월 무이자 할부로 해달라는 말을 하는 게 뭔가 없어보여서 얼떨 결에 일시불로 질러버린 보테가 베네타 가방을 매고 출근한 날이었다. 무거운 노트북을 넣으면 혹시라도 연한 가죽이 늘어질까봐 핸드폰과 지갑만 겨우 넣고 노트북을 밖으로 안고있는 나를 본 입사 동기는 가방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는가 싶더니 “왜 가방을 사다놓았는데 넣질 못하니~”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안그래도 운수 좋지 못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노트북의 묵직함에 팔까지 저려오기 시작했다. 아무리 인플루언서들이 드는 가방을 따라 산다고 해도 난 그들의 삶은 따라 살 수 없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비싼 물건들을 살 때의 만족감은 빠르게 휘발되었다. 돈을 모아 내가 사고싶었던 건 샤넬백도, 해외여행 항공권도 아니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드디어 해탈한 건가 싶지만 사실은 무엇보다 갖기 어려운 걸 바라고 있었다. 언젠가는 내 삶이 역전될 수 있다는 가능성. 멀지 않은 미래에 단톡방 알림이 울리지 않는 평화로운 시간을 오래 갖게될 수 있을 거라는 안심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었다. 어쩌면 그래서 로또는 나에게 내가 원하는 크고 확실한 행복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재테크 수단이기에, 그렇게 각별한 마음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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