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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쭌스토리 Mar 04. 2019

003.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출발합니다.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 열차


‘준아. 준아..’ 


목소리에 온도가 있다면, 체온과 같은 미온의 익숙함 같은 것이 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어디인지 모를, 풍경도 보이지 않는 창문 밖, 별빛만이 스쳐 지나가는 밤.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 뒤척이는 소리, 잠이 들지 못하고 칭얼대는 아가의 울음소리가 한밤의 적막함을 나지막이 두드렸다. 

그제야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꿈속에서 들려온 것을 알았다. 


몇 시간 전, 나는 울란우데에 가기 위해 횡단 열차에 올랐다.

인터넷으로 예매한 3등석 마지막 남은 자리 하나, 화장실로 가는 문 바로 앞 통로 쪽 1층 베드. 화장실에 콘센트가 있어서 일부러 핸드폰 충전을 위해서 고른 자리였다. 차선이었지만,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차선이라 믿었던 선택이 최악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단 자리를 살핀 나는 뒤로 메는 메인 배낭을 시트 아래에 욱여넣었다. 자로 잰냥 크기가 꼭 맞았다. 문제는 귀중품이 든 앞 배낭이었는데, 베개처럼 머리 아래 두고 잘 수밖에 없었다. 기차 내 담요도 있었지만, 새로 구입한 침낭을 꺼냈다. 워낙 추위를 많이 타기도 했지만, 위생상의 문제도 해결되는 침낭은 앞으로 아주 유용하게 쓰일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창문 밖으로 벌써 어두운 빛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 사람들은 자려는 생각이 없었으나, 나는 조용히 침낭 안에 몸을 집어넣었다. 따뜻했다. 침낭 안에서 온기가 돌아 저절로 눈이 감길 것 만 같았다. 그러나 기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승객들이 화장실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겠지 했는데, 이건 아무리 무디 디 무딘 나라고 해도 버틸 재간이 없었다. 

깊은 한 숨을 쉬며 가방에서 안대와 이어폰을 꺼내 눈과 귀를 닫아버렸다. 누군가의 꿈일지 모르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첫날밤, 그렇게 세상과 단절해버렸다. 


‘후.. 다시 티켓을 예매하는 순간으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정말 이 자리는 피하고 싶어!’


‘딩동’ 

그때 핸드폰에서 알림 소리가 울렸다. 이렇게 흔들거리며 이동하는 기차 안까지 데이터가 터지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메시지를 확인해보았다. 유리였다. 세계 일주를 가는 나를 응원해주기 위해, 라디오에 사연을 보낸 그녀가 신청음악과 사연을 녹음해 보내온 것이었다. 따뜻한 침낭 안에서 이어폰으로 친구의 마음을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가는 DJ의 목소리와 그녀가 나를 생각하며 골랐을 김동률의 ‘출발’이라는 노래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처음 들어본 노래였다. 김동률 목소리가 흔히들 생각하는 응원가 같은 우렁참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어쩐지 한 밤중에 이 노래를 들으니 어딘가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는 게 느꼈다. 침낭 속 두 발을 꼼지락거리며, 들뜨기 시작했다. 간질간질, 설레기 시작했다.  당장 어딘가라도 뛰어갈 아니 날아길 준비가 된 듯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새로운 풍경에 가슴이 뛰고 별 것 아닌 일에도 호들갑을 떨면서 나는 걸어가네 휘파람 불며 때로는 넘어져도 내 길을 걸어가네.



방금 전까지 후회막심했던 마음도, 어수선한 기차 객실 안도, 다 별 것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며칠씩이나 가게 될 열차에, 화장실 문 앞의 접이식 침대에 머리를 뉘인 것은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니까, 후회를 하고, 불편해하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별 거 아니다 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자, 원래부터 배낭을 베개 삼아 잤던 사람처럼 다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빗물이 기차가 달리는 속도에 별똥별 마냥 꼬리를 길게 빼며 창문에 부딪혀왔다. 기차가 설 때마다 기차역에는 내리는 사람, 오르는 사람, 그리고 마중하고 배웅하기 위한 사람들로 붐볐다. 



***

어느 작은 기차역에 섰을 때였다.

한 남자는 한 손에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서있었다. 누가 봐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하늘은 잿빛이고, 안개 효과처럼 뿌려대는 빗 속에서 오직 그만이 선명한 색을 띠고 있었다. 그 손에 들려진 새빨간 장미꽃처럼. 나를 비롯한 창가의 모두가 한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꽃의 주인이 어서 나타나기를, 한 남자의 얼굴에 꽃 같은 미소가 피어오르기를.



덜컹 덜커덩.

기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꽃의 주인의 모습은 아직까지 보이진 않는다. 한 남자는 결코 실망한 표정이 아니었다. 여유롭게, 익숙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결같이... 

시선을 거둬 고개를 돌렸다. 보고 싶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었지만, 보지 않아도 그들은 해피엔딩임을 알 수 있었다. 동해항에서 멀어진 다른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남자의 얼굴이 그리웠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차는 태초부터 달린 것처럼, 멈춤이란 것을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나의 눈물과 그리움을 싣고 다시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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